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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어머니와의 사별
임안자 영화평론가(2022-03-10 13:57:53)

어머니와의 사별


1982 5 어머니가 조카집으로 옮긴 3 반이 지난 뒤에 나는 조카로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아주 위태롭다는 충격적인 연락을 받고 망연자실했다. 두어 전에 어머니와 전화 미처 알아채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심한 위기에 처해 있음이 분명했다. 남편도 말을 듣고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듯한데 편지에 밝혀진 증상들로 봐서 오래 같다 빨리 애들하고 먼저 한국으로 떠나라고 했다. 하지만 현이 여름방학 일주일 전에야 휴교 허락을 받아서 어쩔 없이 늦게 7 말에야 떠날 있었다. 그런데다 남편은 겨우 전에 개업을 했던 터라 일거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처지가 돼서 등록된 환자들만 받아주고 우리보다 3 늦게 한국으로 왔다. 남편과 애들에게 한국 방문은 그게 처음이었다. 시절에 만한 항로는 취리히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독일 비행기) 가서 대한항공으로 바꿔 타고 페르시아만의 바레인(Bahrain) 두어 시간 머문 뒤에 김포 공항으로 가는데 바레인에서 타는 승객은 거의가 지역으로 파견된 한국의 노동자들이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날씨에 아주 지루한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1978 겨울에 마닐라에서 하룻밤을 지낸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짧아진 편이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90 초에 우리가 번째 한국을 방문 적에는 취리히에서 미국 비행기로 러시아의 북쪽을 거쳐 알래스카의앵커리지”(Anchorage) 가서 대한항공으로 바꿔 타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3 초에 대한항공의 취리히-인천 직행이 시작됐으나 그것도 처음에는 계절과 수요에 따라 노선이 자주 바뀌다가 21세기에 들어서 드디어 일주일에 번씩 한국과 스위스를 직접 오갈 있게 됐다. 그로 인해 한때는 그토록 멀어 보이던 한국이 10-11시간이면 닿을 있게 되어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는데 2020 이후 코로나의 팬데믹으로 취리히에서의 출발은 끊기고 옛날처럼 유럽이나 새로이 아부다비를 거쳐 한국으로 가게 됐다.    


말머리를 되돌려, 나와 애들이 김포 공항에서 도착하자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카가 택시로 우리를 과천의 아파트로 안내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근심스러운 표정에서 집안의 어려운 상황을 어느 정도 감지할 있었다. 우리가 아파트에 도착하자 안방에 누어있던 어머니가 나를 금방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어서 오라고 소리치며 반가워했다. 미자와 현을 어머니에게 스위스 손자들이라고 하자 새끼들하면서 애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분도 가서 어머니는 애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묻고 물었는데 그러면서도 애들이 귀여운 궁둥이를 자주 다독였다. 어머니의 몸은 예전에 비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튼튼해지고 식욕도 왕성했는데 조카는어머니의 기억 상실증은 벌써 전에 시작됐다 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견디다가 전부터 증상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만약을 위해 연락을 것이다. 실지로 어머니의 기억 상실증은 아주 심했다. 가장 두드러진 증세는 어머니가 자꾸 밖으로 나가 어디론지 사라지는 점이었는데 조카가 출근하면 조카며느리와 어린것들이 어머니를 지켰으나 어쩌다 문이 잠겨있지 않으면 어머니는 어느새 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조카며느리가 어머니 저고리 안쪽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붙임쪽지를 달아주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머니는 그걸 뜯어버렸다. 그리하여 조카는 경찰서와 아파트 단지의 경비원에게 어머니 사진과 조카집의 연락처를 제출함과 동시에 실종할 경우 신고할 있게끔 양쪽에 연락선을 비치했다. 뒤로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런데도 행방불명된 어머니를 찾지 못하여 조카 가족이 불안에 떨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시외버스를 타고 경상남도 어느 시골에까지 갔는데 다행히 그곳에 사는 부부의 도움으로 3 뒤에 다시 찾을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하루는 심지어 나도 어머니를 잃어버려 죽을 고생을 했다. 남편이 한국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었는데 조카며느리가 그날 시청에서 볼일이 있어 내가 어머니와 애들을 맡았었다. 나는 어머니를 목욕시키고 애들 넷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애들은 점심 바로 아파트 밑의 놀이터로 가버리고  잠깐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틈에 어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조카의 아파트는 10층에 있었는데할머니는 승강기가 무서워서 항상 계단을 걸어서 다닌다 조카며느리의 말이 기억나서 나도 계단 밑으로 빨리 내려갔지만 어머니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경비원 사무실로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경비원은 어머니 문제를 알고 있었던 지라 나와 아파트 주변을 시간 넘게 살펴봤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그래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나중에 혼자서 어머니와 가끔 산보하던 아파트 근처의 논밭 주위를 서너 보았지만 허탕이었다. 그러던 저녁 8시경에 경비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과천 경찰서 순경이 근처를 순찰하던 중에 길을 잃은 할머니를 발견하고 파출소에 모시고 있는데 댁의 어머니 같다 상당히 멀으니까 자기 차로 가자 했다. 순경 덕분에 나는 어머니를 파출소에서 다시 찾았다.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하나는 신발을 잃어버려 진흙투성인 의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나를 보는 순간 화가 배고픈데 어디 갔다 이제 오냐 소리로 나무랬다. 차마 뜨고 없는 어머니의 딱한 모습에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경찰들 앞에서 울었다. 뒤로 나는 어머니가 산속에서 또는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끔직한 꿈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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