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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6 | 연재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시인 박봉우민족시인의
백학기 ·시인(2003-12-18 14:05:57)


 꽃밭은 없는가. 우리가 잠을 자고 가도 좋을 꽃밭은 그런 꽃밭은 없는가 우리의 심장을 익은 해와 같이태워도 좋을 사랑이란 집은 영영 없는가. 시인 박용우 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오월 그 무덥던 날 내가 금암동 언덕받이에 있는 全州中央圖書館으로 찾아가며 나즈막히 외웠던 시귀절이다. 선생의 死守派첫행들이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 회색의 아파트 건물을 지나, 돌아올라 잠깐 멈춰서서 시내 쪽을 내려다보던 나는 어느 집 마당가에 떨어져 누운 꽃잎들과 벌들 잉잉거리는 아카시아 향내를 共感으로 체득하였다. 그리고 웬지 가슴 한 구석의 쓸쓸함과 허탈감을 지울 길 없었다. 새벽의 전화 속에서 선생은 이미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지새다가 시청 앞 순천식당에서 농주 몇 사발을 들이키고 돌아와서 곤히 주무신다는 선생의 아들 나라의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거의 매일을 술에 젖어 지내는 선생의 일상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안타깝다니. 나는 내 자신을 꾸짖으며 힐책하였다. 내가 걱정하였던 것은 순전히 선생의 건강 문제였다. 언젠가 선생께 節酒를 권하자 선생은 지랄헌다라고 일축하였다. 맑고 높은 정신 안에서 좋은 시가빚어지겠다? 하긴 그럴지도 몰랐다. 선생은 구 법원 네거리에서, 시청 앞 광장에서, 분수대 로터리 신호등 곁을, 카톨릭 센터 골목길을, 천변길을, 잘도 돌아다니셨다. 술에 취해 서울 종로바닥을 검정고무신에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닌 추억을 지니고 있는 선생이 아니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의 기억력과 통찰력은 무시못할 바 있다.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나 단 한번 수인사를 건네어도 선생은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고, 地에서 풀잎의 조그마한 흔들림이나 떨림조차 파악해내는 놀라운 감각까지도 그 나이에 잃지 않고 계신다. 전쟁과 폐허의 50년대를, 독재와 혁명과 좌절의 60년대를, 긴장의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70년대를, 민주화의 열기가 거리거리마다에 드높은 80년대를 살아오는 시인 박봉우선생은 그의 길고 광활한 얼굴모습만큼이나 슬프지만 분단 구조 속에서 통일을 지향하고 民族의 영원한 얼굴을 향한 詩의 그리움은 절절하며 그와 맞서는 정신적 견지 또한 당당하다. 누가 선생을 무너졌다 일컫는가. 누가 선생을 황폐해 졌다 일컫는가. 박봉우 선생은 1934년 전남 광주 학동에서 5남매 중 막둥이로 출생하였다. 서석국민학교때 6년간 코흘리개 급장으로 통했고 이미 4학년 때 일본 朝日신문(아사히 신문) 문예현상 공모에 병아리란 작품으로 당선되었다. 어린 나이에 글의 맛을 알아 노란 햇병아리 시인으로 행세하며 주위의 여러 사물들에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둘러보며 집안의 재줏꾼으로 성장하였던 선생은 광주서중 교지 「常錄」지에 글들을 써가며 持情性에 눈을 떠갔다. 또한 그 당시 학생들의 큰 위안이었던『수험생』지에 황소의 노래로 당선1석을 차지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때 윤삼하, 신봉송도 글을 썼지, 라고 선생은 말한다. 그러던 선생은 해방을 맞이하였고 감격의 눈물 바다 속에서 좌 ·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사회의 어지러움들 속에서 차츰 사회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중2때 선생은 이 땅의 분단 이데올로기가 가져온 처참한 전쟁과 폐허 속에서 무등산으로 피난, 어두운 시절을 보내었다. 광주고를 거쳐 전남대 문리대 정치과에 입학한 때는 1955년이었으며 인간의 고통들과 민족의 아픔, 분단을 생생히 목격한 선생은 1956년 休戰線으로 朝蘇日報 신춘에 당선하였다. 심사위원은 양주동과 김광섭 시인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톨스또이의 復活올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사상천집을 읽어내리는 讀破의 찬란한 시절이었다. 이태준, 정지용,한설야, 박태원, 이기영 등의 시인 ·작가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좋았지. 李箕永의 문장이 좋았어. 나는 이기영의 작품 故觸올 떠올렸다. 詩는 길어서는 안돼. 역사와 사상을 퍼 담아야돼. 첫 시집 선생은 말하였다. 1957년 정음사에서 r휴전선』, 두번째 시집, 시인 朴南秀가 경영했던 백자사에서 r겨울에도피는꽃나무, 그게 1959년.성문각에서 1962년에 『四月의 火隨日』,창비에서 『地의 풀잎』.1976년.재작년에 전예원에서 시선집으로 『서울 下野式』, 참 너도 전예원에서 시집 하나 내놔. 나는 웃었다. 그리고 작년 1987년 思社冊에서 『딸의 손을 잡고』 6권. 선생의 기억력은 놀랍다.산문집도있잖아요? 그거,옛날에『女」지에 연재했던 거. r詩人의 사랑』,그렇다. 선생은 6권의 시집과 1권의 산문집, 이 지상에서 그가 소유한 책들이다.결혼? 지랄헌다. 서울 파고다公園에서 했어, 역사적인 결혼식이었지 소주파티했지. 선생은 술 마시러 가자고 졸랐다. 언젠가의 당신의 입술이 주신 순수의 선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인가고 이제 느낍니다 핑크빛 日記를 적으면서 나는 오로지 외롭습니다. -핑크빛 日記 全文 나는 민족시인의 핑크빛 사랑을 떠올렸다. 오월의 눈부신 신록을 내다보며 詩人의 사랑을 생각해봤다. 눈부신 신록들처럼 詩人의 사랑도 눈부셨다. 광야에서 목놓아 울던 시인들, 대지위를 산맥처럼 치닫던 시인도 강의 시인도 평야의 시인들도 우리반도 안에서 눈부셨다. 그들 사랑은 더욱 눈부셨다. 李朝 오백년 당쟁싸움의 나머지를 이 땅에선 잔인하게 뿌리뽑아 버리자 어진 일꾼들 도매금으로 유배 보내거나 죽이고 또 李朝 오백년의 나머지 피가 설렁탕이 되는가 정신 좀 차려요 李朝 오백년의 나머지들 남한산성 북한산성 돌담을 쌓고 한 그릇 설렁탕에 원망했단다. 정신 좀 차려요 정신 좀 차려요 새 百科事典 한 권 들고 새 歷史책 한 권 들고 새 國語책 한 권 들고 한 사람 살지 않는 섬에서 한 여자 얻어서 이젠 내 共和國의 일학년을 만들고 싶다 알에서 태어나서 알로 돌아가는 나의 눈물 말 많은 놈들 속에서 말 많은 내가 슬프다 어린 아이와 장난 삼아 동양사나 서양사를 뒤척이며 내 스스로 유배를 당해야겠다 李朝 오백년의 뒤처리들이 지금도 여기 남아 양반행세 한다 이젠 내 식모로 모시고 잘 섬기겠다. 설렁탕 한 그릇에 싸구려 어서 자시고 떠나시요 나는 설렁탕장수에 술장수 李朝 오백년의 한을 씻어드리리 멋대가리 없는 놈들 속에서 내가 詩人이라고 바보야 바보야 정신나간 바보야 나는 왕이나 되어보련다 李朝 오백년의 찌꺼기들 칼을 뽑기 전에 정신 차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허허 오늘은 웃어버리자 -「설렁탕들」全文 선생의 분노, 희망, 사량, 좌절이 담긴 길고 광활한 시편들은 언제 어디서 읽어도 우리에게 힘을 준다. 선생은 벌써 또 노래를 흥얼거린다. 울 밑에 선 봉선화여, 네 모습이 슬프구나. 홍난파 작곡, 박봉우 작사의 슬픔이 깔려오는 노래 속에서 시는 곧 노래이며 분노이며 사랑이며 좌절이며 희망임을 실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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