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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7 | 연재 [문화저널]
<문화가이드>마라의 죽음쟈크 루이 다비드 作
문화저널(2003-12-18 14:49:18)


 루이 다비드(Louis David, 1748-1825)에 의해서 창시된 신고전주의 회화는 프랑스 혁명의 발발, 그 전개 나폴레옹의 등장, 제정기를 통해서 프랑스 회화의 주류를 형성시키고 「드라크르와」의 등장에 의해 출현하는 낭만주의 회화가 나타날 때까지 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기수였다. 1775년부터 1781년까지 로마에서 그의 화풍은 절정에 이룬다. 지위와 명성을 이미 확립시켰던 「다비드」는 자신의 예술을 안고 혁명의 무대로 뛰어들었다. 그는 혁명 당시 적극적인 역할을 해서 행정 쪽에서도 크게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1793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기도 한 「마리의 -죽음」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마라(marat)」가 욕탕 안에서 살해된 내용을 역사 속에서 후세에 영원히 알리기 위하여 국인의회에서 결의하여 「다비드」에게 제작을 의뢰했던 것이다. 역량이 부족한 화가라면 당혹하게 될 제재(題材)에서 「다비드」의 깊은 정감은 걸작을 낳은 것이다. 「마라」는 피부병 때문에 욕탕속에서 책상 대신 나무판을 놓고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샤를로트 코르데」란 젊은 부인이 개인적인 청원서를 들고 돌아와 「마라」가 그것을 읽고 잇는 사이에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다비드」는이 광경을 옷깃을 여미게 할 만큼 숙연하고도 생생하게 그렸다. 나라를 위해 죽은 이 위대한 혁명가를 널리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된 이 그림에서는 헌신적인 심상과 역사적인 설명이 함께 녹아 있다.
문제의 이 작품은 「마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죽음이 주제로 되었다는 것과 「다비드」라는 또 한사람의 문제의 인물, 즉 화가이며 정치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시민이라는 관계에서 더욱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의 선입견을 멀리하고 현실적으로 우리들의 모든 생각을 읽고 당시의 상황속에서 생각해보면 「마라」의 죽음을 애국적 희생으로 승화시킨 「다비드」의 작품은 결국 그 당시의 혁명 그만큼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마라」는 무명의 의사이고 과학자였으며 또 신문기자였다고 한다. 혁명에 가담하여 대의원이 되고 국민의 회의 소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의원이었다.
그는 항상 시민의 친구로 소시민의 대변자임을 자심의 대명사를 삼고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증오의 대상으로 되버린 이유는 그의 극단적인 사상과 행동에 있었다. 철두철미하게 혁명을 실천에 옮기었고 그에 저항 또는 걱대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극형에 처하였다. 따라서 그를 두고 피에 굶주린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욕탕에 갑작스레 죽음을 만난 「마라」의 모습은 그의 분주한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사가들의 말대로 다음날 의회에서 토의사건을 작성 중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라의 죽음」이나 「다비드」의 작품이 국민들의 가슴을 지르고 애국심을 고조시켰다고 사학가들은 전하고 있다. 이에 관계되는 하나의 예는 1793년10월14일 국민대의원회에서 의원인 「프랑스와 팔레」의 제안에서 알아보게 된다.
『우리의 관청 공공 건물내에 걸려 있는 십자가상이나 왕의 초상들을 없애기로 합시다.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을 많이 복사하여 그것으로 대체시킵시다』
이 같은 제안은 채택되었고, 예술은 애국이라는 차원에서 주장되고 또 최초로 인정 받게 외었다.
「조국을 위한 예술」「예술과 국가」등의 이론 서적이 많이 나온 것도 바로 이때였으며 예술의 윤리적 사명이 절대시 됐다
「다비드」가 그 10년 뒤 「나폴레옹」을 위하여 그의 대관식 장면을 그림으로 담아 놓게 된 새로운 처지를 생각할 때 작가로서의 그의 활동을 흥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폴레옹」이라는 황제의 영광을 기록하기 위하여 또 제2의 제국을 상징하는 대관식 장면을 제작한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릴 때의 작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1789년 혁명 후 1871년에 비로소 안정된 공화국 체제를 갖게 된 후까지 작품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관제예술경향을 발생케하였고 관청 및 공공 건물 학교 등에 애국적 미술작품을 구비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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