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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0 | 연재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우리들의 잔치-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종민 본지편집위원(2003-12-18 16:03:43)


 이제 잠실벌에 가득했던 함성도 사라졌다. 우리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았던 ‘단군이래의 최대의 잔치요 축제’가 끝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폭력적 군부독재세력의 음모의 일환이라고, 또 이들을 비호하며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려는 독점재벌들의 엉큼한 장사속이라고 배척되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도 있으리라 기대를 모으기도 했던 이름하여‘동서화합의 최대의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나 흥분,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장으로 떠밀려갈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음모 속에서 유치되고 치루어졌는지, 또 그것이 한민족의 발전에 있어 어떤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줄 것인지, 또 우리 민족에 있어 가장 절실한 문제인 민주 자주 통일에 대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러하지 못했는지는 우리의 흥분이 다소 가라앉은 상태에서 분명 좀 더 엄밀하게 점검 규명되어야 한다. 이는 이를 위하여 우리가 너무도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희생을 감수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활동마저 유보 당해야 했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이를 확대 포장하여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옹호하려는 기득권자들의 또 다른 음모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절실한 문제에 관하여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운위함은 과거에 대한 엄정한 점검이 현재와 미래의 삶의 설계에 있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역사의 진리를 망각해서가 결코 아니다. 이는 우리의 문제제기가 단순히 분노의 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시대에 당면한 문제들을, 적어도 가시적 차원에서는, 유보해야 할만큼 엄존했던 이 잔치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 운동경기가 야기시키는 특유의 열기를 일부 극소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고, 이러한 흥분파 열기에 뒤따르게 마련인 잔치 뒤의 허탈감도 무시해서는 안될 객관적 상황이며, 또한 내부적으로도 ‘동서화합의 장l이 한민족의 화합의 장은 되지 못했던 비극적 상황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엄정해야할 점검의 주체적 여건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작업을 한없이 미루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이 단순한 푸념의 차원이나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좀 더 차분한 자세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작업이 민주화나 자주화, 더 나아가 민주통일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라 할 때 흥분한 상태에서의 즉흥적 반용이 이를 이용하여 고도의 책략을 모색하고 있는 세력에게 부질없는 빌미를 제공해 주어서 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호들갑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대응은 그것이 안고 있는 긍적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허점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은폐 보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유사이래 최대, 최고의 올림픽’이니 ‘인류화합의 제전’이니 ‘명화의 대제전’이니 하는 선정적 구호들도 그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나타난 현상-승부조작, 약물복용, 스포츠 귀족들의 거들먹거림, 미국 NBC와 선수들의 오만불손, TV의 광적 보도 지방의 소외와 북한의 불참 둥-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응의 형태가 유사한 구호적 차원에 머물러 버리면 그것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국제올림픽위원과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재벌기업의 결탁에 의한 상업주의, 세계 기충민들의 소외, 엘리트 위주의 체육정책 ,스포츠 강대국들의 힘겨루기와 제삼세계국가들의 들러리 둥-을 드러내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역비판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어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켜 버릴 염려까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적 소외감만을 조장시켰던 거창한 각종 올림픽 문화행사들에 대한 비판도 객관적이고 파악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을 때에는 그것이 안고 있는 한계-반민족적 반민중적 성격 및 그 배후에 숨어있는 불순한 정치 경제적 의도 둥-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사람들의-그것이 스스로 자청한 것이든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된 것이든-푸념적 불명 정도로 호도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올림픽이 민족 발전의‘결정적 계기’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끝남이 거창한 명분의 상실로 인하여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유지하려 발버둥쳤던 세력을 일거에 와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제공해주지 않는 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는 이를 위한 7년여에 걸친 우리의 희생과 유보의 생활이 대수롭지 않다고 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몇 십년을 기다리며 싸워왔고 전 민중의 인간다운 자유로운 삶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을 기다리며 노력해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올림픽에 대한 명가나 비판은 의당 이러한 지상의 과제의 실현과 연결되어 이루어져야한다.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가 처한 객관적 상황을 냉정하게 점검하고 이에 실천적으로 대처할 준비를 해야한다. 우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정세 변화의 본질적 속성을 규명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지배 세력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종합무역법안의 통과 및 INF협정폐기 둥에서 확연하게 노정되는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신고립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동북아시아 전략에 있어 근본적인 수정,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자국의 군비축소와 일본에 대한 군비중강 요구와 연결되는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 정책, “2000년대 사회주의강국’을 목표로 현대화 정책을 펴나가고 있는 중국 실용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파 이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 ·일 둥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관계개선은 물론 소련과의 화해 분위기 조성, 또 일본에 대한 무역편중을 완화하고“한국기업의 유치를 통해 서방측의 관심을 고조”시키며 자기들에게 필요한 자본과 기술의 도입을 경제교류를 통하여 이루려는 속셈으로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개선,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내적으로 페래스트로이카라는 “더 많은 사회주의”로의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중국은 물론 일본과도 적극적인 경제교류를 희망하며, 아울러 88올림픽을 기하여 확인되었듯 주로는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추진함은 물론 이 지역내의긴장완화를 도모하는 둥 적극화하는 소련의 아시아정책,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바라는 일본의 대북한 유화제스쳐 및 이를 위한 이 지역 내 긴장완화정책, 중 ·소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중·소에 대한 ‘피곤한 줄다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된 북한의 조심스러운 대외개방 및 미 ·일과의 관계개선 시도 둥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긴장완화와 명확정착이라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각국의 현상유지정책의 본질적 속성을 명확하게 규명하고 이러한 정책들이 전제로 하고 있으며 또 강화시킬 수밖에 없는 분단의 고착화라는 문제도 좀 더 엄밀하게 점검되어야한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에 편승 실질적인 변화는 담보하지 않은 체 선언적 차원에서만 제시되고 있는 개량 유확정책의 실상 및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도 명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7·7선언이나 북방정책의 표방이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의 포기가 아니며 민주화 및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이와 병행하여 자행된 갖가지 폭력적 조치-통일논의의 독점, 남북학생회담 추진세력에 대한 물리력을 동반한 탄압 구속, 「자본론」출판인의 구속, 북한 둥 공산국가에 패한‘보도요강’ 하달, 주체사상에 대한 논의금지 및 관계서적 압수, 5공비리와 광주문제 해결에 있어 미온적 태도, 이념논쟁의 확대 과장을 통한 본질적 문제의 호도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과 문화의 교류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한계에 다다른 지배이념의 모순을 은폐하는 데 이용하려 하고 있다. 겉으로는 화해니 통일이니를 말하고 있지만 속셈은 속속 드러나는 군부 및 소수 재벌에 의한 독점적 지배의 모순과 신식민척 상황에서 노정되는 갖가지 비리를 감추고 분단이E}는 상황까지를 포함한 뒤틀린 현 상태를 유지 지속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결국 88올림픽은 긴장완화를 통하여 자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주변 강대국들과 현 상태를 유지하여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지속시키려는 국내 독점지배 계층의 이해가 합치된 ‘그들만의 화합의 장’이 되고만 셈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을 거의 광중에 이를 정도로 사로잡았던 잔치-‘우리들 모두를 위한’ 잔치는 아니었으나 우리 모두의 땀과 희생으로 치루어진‘우리들의 잔치’였음에는 틀림이 없는-가 끝이 났다. 이 잔치의 들러리를 섰던 거창한 문화행사도 몇몇 문화귀족들에게 공허한 허영심만 심어준 체 끝이 났으며 엄청난 돈올 처들인 문학인들의 잔치도 구속문인 하나 석방하지 못하고 대신 노망한 원로문인을 대학강단에서 몰아내면서 막을 내렸다. 이제 언제고 중단할 수 없는 민족 민주운동의 입장에서 이 잔치와 들러리행사들의 의미를 점검하고 새로운 각오로 이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이산하 시인의 말처럼 올림픽올 전후하여 그 극에 달했던 개량 유화정책, 그“개량화의 허구성을 밝혀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허구적‘지배이념에 대한 총체적 전면공격’이라는 문화운동의 기본과제를 충실하체 수행해 나가는 일이 개량적 문화정책을 통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련화하려는 요즘 가장 절실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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