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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4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살풀이에 대한 고찰3
박소현(2004-01-27 10:46:12)


(c) 신상팔궁(身上八宮)이미 지난 호에서 살에 대한 이야기를 했듯이 우주의 에너지와 인간의 에너지를 우리는 살이라 하며 사람이 우주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자기의 에너지와 잘맞추어 이용할 때 우리는 이것을 초능력이라 한다. 단전호흡이나 선(輝)의 기초는 인간의 살을 제압하여 유용하게 쓰기 위한 것이다. 필궁은 두, 수, 견, 복, 흉, 옴, 이, 족(騙 手, 冒, 題, 凶, 陰, 耳, 足)의 여덟가지로 인체를 나누어서 인체부위에 낀 살을 알아보는 방법의 일종이다. 생월과 생시로 찾아보면 인체 중 어느 부위의 에너지가 가장 센가를 알 수 있는데 이 에너지를 잘 이용하면 득이 되지만 잘못 이용하게 되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살이 된다. 예를 들어 권투 선수가 점이나 사주를 보게 되면 수살(손살)이 들었다고 나온다. 수살이란 인체부위중 손에 에너지가 밀집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둑이 점을 보아도 수살이 든 것으로 나온다. 똑같은 수살일지라도 한 사람은 손의 에너지를 잘 다듬어서 손에 힘을 가지고 손을 발달시켜서 특수한 기술자가 되거나 권투 선수가 되었지만 도둑은 손에 밀집된 에너지를 다듬지 못하고 에너지발산을 억제하지 못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또한 몸의 에너지가 발에 집중되어 있는 족살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방황하며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일정한 직업이 없이 계속 떠도는 사람보고 역마살이 끼었다고 한다. 발의 에너지가 센 사람이 마라톤과 같은 육상 선수가 되든지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할 때는 재물을 많이 얻을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떠돌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머리에 있는 두견살의 경우 머리가 영리함을 나타내며 무릇 나쁜 방향으로 머리를 쓰지 말라는 경계이다. 이는 일생 동안 근심이 없으며 의식은 스스로 이르게 된다. 두견살, 즉 머리에 에너지가 집중된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가 많으나 이 살을 제압하지 못하면 두통중세나 신경성을 앓게 된다. 견살의 경우 힘을 씀에 있어 남보다 우수하며 운동신경이 발달하였으니 그 힘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경계이다. 복 측, 배의 에너지가 센 사람은 먹고 남음이 풍부하다는 뜻으로 남을 구제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면 복통, 배앓이 등의 질병을 유발한다는 뜻이다. 흉부에 에너지가 밀집된 사람은 포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마음을 좁게 쓰게 되면 신장이나 심장질환을 얻게된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반드시 신체 한 부분에 특수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힘이 발산되었을때 살 내렸다고 한다.
(E) 년살, 월살, 시살, 이미 앞부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람은 우주의 정기를 받아 신의 섭리와 조화 속에서 태어난다. 영혼의 세계에서 인간에게 포태되어 육(肉)이 될 때 신은 그 사람에게 운명의 이름을 세어 주는데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 이름은 한 생명체가 인간세상을 하직 할 때까지 자신이 바꾸지 못하고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이 지어준 시나리오 즉 각본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사주팔자라고 부르며 태어난 쾌, 월, 시로 구분하여 네기둥을 삼으니 주요, 네기둥에 연자를 걸어 집을지으니 이것이 팔자이다. 태어난 해를 보아서 드는 살을 년(年)살이라 한다. 우리 주변에 흔히 말띠가 팔자 세다느나 하는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이것이 곧 태어난 해운년의 짐승이 사납고 순한 점을 골라 이야기하는 것으로 년살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월(月)살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부모님이 혼사를 치를 때 몇월생일은 좋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태어난 달의 통계를 따져서 좋고 나쁜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즉 월살이 있느냐,없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월살이 들면 처자궁에 근심이 있고 만일 처궁의 살이 아니면 골육의 정이 없다. 월살과 같이 일(日)살이 있는데 닷새날 생이 면 숫자를 셀때 주먹을 꼭 쥐어야 하므로 주모가 있고 열흘 생일은 숫자를 셀때 펴야하므로 재물을 모으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뜻 생각하기에 지어낸 소리 같지만 그날의 일진에 살이 있는가 없는가를따져서 하는 말이다. 사주중 중요한 것이 태어난 시인데 소가 소시(표時)에 태어났으니 고생하겠다는등 범이 새벽에 태어났으니 바쁘게 옴직여야 한다는 말은 시(時)살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태어날때의 주로 그 사람의형체와 행동 그리고 말소리 등을 구분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살로 구분된다.
공방살, 원진살, 상충살 사람이 태어날 때 누구나 좋고 나쁜 살을 가지고 나온는 데 이 살 중에는 본인 혼자 있을 경우에는 빛(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아 자신에게도 아무런 해가 없다가 어떤 대상과 겹쳐졌을 때(만남) 해를 끼치는 살이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혼히 듣는 공방살이 바로 그러한 좋은 예가 된다.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며 상대를 미워할때 공방살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남자의 살과 여자의 살이 서로 에너지를 발산하여 상대방을 밀어내는 힘으로 변하여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하기를 거부하고 서로를 피해다녀 불상사가 일어난다. 또 하나의 예가 원진살과 상충살이라 하겠다. 이 살은 특히 결혼 적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가 궁합을 볼 때 반드시 보는 살이다. 개인에게 있을 때는 해롭지 않으나 타인과 합쳐졌을 때 스파크가 일어나는 살로서 새로 시집을 오는 며느리와 시부모, 시동생들과 이 살이 닿지 않나 염려한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와 자식간에도 작용되어 뜻이 전혀 맞지 않고 서로를 미워하며 시기하고 헐뜯고 싸우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을 보고 상충살이 들었느니 한다. 원진살은 마치 자석의 극과 극이 부딪혀서 밀어내는 형상이며 상충살은 전기의 양극이 부딪혀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그냥 듣고 넘기면 우tm운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새겨보면 우리 인간의 신비함을 점점 더 할수있는 이야기이다. 둘이 보태어져서는 안되는 살은 마치 녹용이나 산삼이 대보약임이 분명하나 몸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해를 보게 되는 인체생리학이나 똑같은 현상이라 하겠다.
옥녀살
옥녀살과 공방살은 결혼한 부부가 결합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혹은 서로를 중오 하게 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시집장가를 보낼때 반드시 옥녀살 방위를 본다. 옥녀살은 신혼초에 드는 것으로 신중에 옥녀각시라고 하는 청상에 죽은 여자가 있는게 그 혼은 남녀가 쌍을 이루는 것을 못 보아 이를 시기하고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우리 선조들은 혼례를 을릴 때 옥녀각시가 없는 방향으로 신부를 앉히기 위해 신부가 깔고 앉을 방석의 위치를 잡아놓은 것이다. 옥녀각시가 들었을 때는 신랑, 신부가 눈에 명태껍데기를 붙여 구렁이를 보는 것처럼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 충청도 대전을 기점으로 위쪽 지역에는 옥녀각시 살이 다른 유형의 살로 흡수되어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전라도 지역에는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천중살과 지중살
옛날부터 인간은 하늘을 무서워하고 땅을 두렵게 생각하여서 하늘에서 준살을 천살, 그리고 땅에 준 살을 지살이라 한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배꼽을 중심으로 하여상체를 天, 하체를地라 한다. 그리하여 하늘에 가까운 곳 즉 상체부위에 병이 나거나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반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엉뚱한 행위를 할 때 천살이 들었다 한다. 그리고 땅에 가까운 곳 즉 하체부위에 병이 나거나 일정한 곳에 거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통틀어 무속에서는 지살이라고 한다. 천중살은 하늘과 땅의 운을 타고난 사람에게 하늘의 운이 따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천중살은 곧 하늘이 당신을 무섭게 뒤흔들어 당신이 하는 일과 가정, 재산, 건강 나이가 애정관계와 대인관계까지 모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드는 현상인 것이다.

문학사의 연속성 확보를 위해서
-鄭芝溶작품 고찰-
박유경
최근 들어 우리 문학사에서 실종 당해야 했던 몇몇 문인들에 대한 해금의 문제가 새삼 제기되고 있다. 해금작가의 작품이 전혀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거나 미답의 불모지였던 것만은 아니다. 그 동안에도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정지용을 위시하여 金훌려*, 白石퉁 1930년대의 주요 문인들의 경우 이미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상당한 분량의 연구업적이 축적되어 왔다. 이는 학교 교재에도 익명 내지 O ·×로만 표기되어오던 그들의 작품에 관한 연구성과를 일반화시키고 공시화 한다는 점에서 또는 한쪽 면으로만 치우쳐왔던 문학사가 그 다쐐과 깊이를 확보한다는 첨에서 기대되는 문제이다. 이들 월·납북 작가들이 주로 활동한 1930년대는 우리의 詩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시기며 일제 강점기를 넘어서 해방 이후의 詩로 연결되며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단절된 듯이 여겨지는 우리 문학사에 연속성을 확보해주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한국문학」이라는 단일개념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고전문학」이니「한국현대문학」이니 하는 용어가 실제 통용되는 게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 바 아니다. 원론적으로 한국사를 韓民族의 역사전개의 과정으로 살펴본다면 한민족이 존속하는 한 그 민족의 문학 또한 엄연한 연속성을 확보해야 합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역사전개상 문학이 차지하는 몫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韓國語 통한 저항과 창조의 작업이다. 즉 문학에서의 저항과 창조는 한국어의 세련과 그것을 통한 사회적 모순의 표현 및 포착에 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의식을 안고서 30·40년대의 암흑과 혼란을 거쳐 民族分斷과 전쟁 그리고 오늘까지의 대 전개에 있어서 표면적 혹은 이면적으로 한국 현
대시의 높이를 언어의 비유로써 지탱한 詩人인 鄭효溶을 만날 수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1935년에 나온 「鄭芝容詩集」과 1941년의 「白 澤」은 다함께 중대한 史的 意義를 띤다. 그가 쌓아올린 높이는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들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30년대 金趣* 또는 모더니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권 아래에서 출발했으나 오히려 그 영향의 밖을 지향하여 동양의 古典과 우리의 전통문학과 만난다. 그러나 그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사는 詩人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芝容의 詩가 지닌 현대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金起林의 견해를 정리해보면 좋은 한국의 시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었으며 詩속에 공간성을 이끌어 넣었으며 원초적 ·직관적 감상을 詩속에 맞아들여서 독창적인 형상을 주었고 詩의 유일한 매개인 言語에 대해 주목한 최초의 시인이
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얼 컬어 혹자는 그가 英文學을 전공했다는 것과 그의 시에 청신한 시각적 이미지가 풍부하다는 점을 결부시켜 서구의 이미지즘이나 일본의 감각파의 영향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동양적인 영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동양의 古典에서의 경도는 그의 詩論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에 따르면 詩는 언어와 肉化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肉化의 방법은 서구의 것에서 획득되기보다는 동양의 것에서 쉽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鄭훨입의 리듬은 한국의 사설시조 또는 민요가락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애송되는 것이다. 우리 언어에의 血肉的 愛는 전통의 기반 위에서 체득되는 것이지 이론적 습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국문학의 연속성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자세히 검정해두어야 할 부분이 20세기 의 개화기문학과 新文學이 접하는 부분, 일제 말 解放문학의규명이라 할 때 해금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런 문제에 실질적으로 접근해갈 수 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특히 鄭芝容의 작품은 빼놓을 수 없는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줄기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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