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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6
윤덕향(2004-01-27 11:58:11)

왕궁평(王宮萍)
전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가 미륵사지가 있는 금마면에 들어서기 전에 오른편으로 왕궁리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석탑이 있는 곳은 주변의 논보다 20-30M 가량높은 산구릉으로 북쪽, 즉 금마면쪽으로 이어져 금마산에 이른다. 이 일은 구릉과 그 주변지역을 동리사람들은“왕검이”, “왕금이”, 또는 “왕금성”이라고 하며 주변의 들을 “궁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곳에 기준이 도읍을 했었다고도 하며 혹은 견훤이 도읍했었다고도 한다. 또 근래에는 미륵사지와 더불어 이곳으로 백제가 천도를 했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이 있는 왕궁명에 대해서는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하고 있는 문화재연구소에서 곧 발굴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문화에 대한 많은 자료를 얻게되기를 바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1. 왕궁평
왕궁평이라는 이름은 왕궁이 있는 들판이라는 의미로 동서로 230여M, 남북으로450여M크기의 명명한대지를 칭하고 있다. 이 대지에서 궁궐이 있는 토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왕궁리 5층석탑은 이 대지의 동서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남쪽으로 140여M지점에 성의 남쪽끝이 자리하고있으며 북쪽으로는 200여m지점까지가 명명하고 그북쪽으로는 소나무가자라고 있는 구릉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왕궁명에 대하여 1976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이곳에는 궁궐의 담장지가 있다고한다.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1977년에 펴낸 [마한백제문화] 제2집에 실려있는〈익산왕궁명 발굴조사약보고〉참조) 잘 가공한 돌로 만든 담장으로 이 담장의 폭은3M내외라고 한다. 또 이 담장지의 바깥으로는 돌로 만든 성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고한 다. 그리고 왕궁리 오층석탑의 주변지역에는 절터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大官”, “官宮” 등의 글씨가 있는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절의 본래 이름이 “대관사’, 또는“관궁사’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발굴조사 결과는 매우 제한되고 부분적인 것이었던 탓으로 유적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주지는 못하였으나 출토된 유물에 의하여 백제시대에 이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다만 발굴조사에서 이곳에서 조사된 유구를 궁궐의 담장지로 추정한 것과 일반적으로 토성이라고 전하는 이곳을 석성으로 판단한 것은 앞으로의 조사과정에서 재검토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석탑의 주변지역에서 절터가 확인된 것은 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2. 왕궁리 5층석탑
보물 제44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석탑은 1968년에 탑을 수리하기 위하여 해체작업을 하던 중 제1층 옥개석부(집의 지붕에 해당되는 곳)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심초석(탑의 중심에 놓여서 탑의 중심을 받는 돌)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불상이 출토되었다. 탑은 낮은 단층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단의 각면에는 각각 2개씩의 기둥이 있고 각면의 코너부분에는 윗 기둥이 양각되어있다. 기단의 덮개 돌에는 턱이 패여있는데 이 같은 턱은 신라의 건물기단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단의 위에 있는 1층탑신은 각면의 중앙에 1개씩의 기둥이 있고 윗기둥도 표현되어었다. 옥개석 아래에 있는 공포부위인 옥개받침은 3단으로 옥개서과 탑신, 옥개받침이 각기 별개의 돌로 되어있다. 이같은 초층의 구성은 그 위의 층에서도 동일하며 다만 한 개의 층을 이루는데 소요된 적재의 수만이 차이를 보인다. 옥재혐의 추녀끝부분에서 옥개받침과의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의 여유가 있으며 이점은 백제계 석탑, 즉 미륵사지나 정림사지의 석탑과 공통되는 요소이다. 또 옥개석의 추녀부분의 두께가 그리 두껍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거의 같은 두께이면서 귀에서 반전을 이루며 위로 치켜진 점도 백제계 석탑의 특정으로 지적된다. 측 이 석탑은 기단부의 덮개돌에 턱이 마련되어있어 신라계의 영향을 볼 수 있으나 옥개석의 형태나 낮은 기단위에 자리하고 있는 점 등에서 백제계의 석탑으로 분류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석탑은 부여 정립사계통의 특정이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백제 멸망이후 백제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석탑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사리장치가 출토되었으며 이 사리장치들은 국보123호로 지정되었다. 사리장치를 마련한 구멍은 제1층 옥개석의 윗면에 2개소가 있었으며 심초석의 윗면에는 3개소가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도굴된 흔적이 있다. 제1층에서 출토된 사리장치는 사리를 담아두었던 사리병과 사리병을 담은 금제외함과 금제 금강경판 등으로되어있다. 외함을 전체 높이 9.8cm, 길이 7.2cm, 넓이 6cm외 크기로 상자모양이다. 합의 아래는 직육면체를 이루며 위는 아래의 함은 덮는 뚜껑인데 뚜껑은 아래부분이 곧게 세워졌다 7위분에서는 중심으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뚜껑의 중심부분에는 앓게 오린 금판으로 연꽃잎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연꽃은 반쯤 핀 꽃잎이 위로 치켜올라가고 아래쪽으로 다시 꽃잎이 있는 형태이다. 함의 외면 전체에 얕게 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아래합의 무늬구성은 각면의 중심에 4각의 폭이 넓은 구획선을 긋고 그 안에는 옆에서 바라본 연꽃이 있으며 연꽃잎은 안쪽에 짧은 선을 그어서 액센트를 주고 있다. 이 연꽃의 주변 공백부분은 크기가 작은 원을 찍어서 메우고 있다. 이 연꽃이 있는 구획의 바깥으로는 다시 각면의 외곽선을 따라서 역시 폭이 넓은 구획선이 돌려져 있으며 안쪽의 구획선과 바깥쪽 구획선과의 사이에는 보다 큰 원을 군데군데 음각하고 큰 원의 사이 사이에는 연꽃주변의 원과 같은 크기의 작은 원을 여러개 음각하였다. 뚜껑부분의 곧게 세워진 부분에도 위와 아래에 각각 구획선이 돌려진 사이에 큰 원과 작은 원을 음각하였다. 비스듬히 중심으로 모아지는 부분에도 아래쪽과 4면의 코너부분에는 구획선이 마련되어있으며 그 안쪽의 중심에는 초화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초화문의 외부 공백부분에는 직은 원을 가낙 음각하였다. 즉 이 외함의 무늬 구성은 연꽃과 초화문이라는 주제와 그에 딸린 무늬요소로 크기가 큰 원과 작은 원으로 되어있다. 외함의 내부에 있는 사리병은 짙은녹색으로 병의 높이 7.7cm, 아가리부분의 직경 1cm이며 아가리부분에는높이 1.8cm의 금제 마개가 있으며 낮은 연꽃받침 위에 놓여있다. 병은 목이 긴 형태로 주둥이 부분은 옆으로 약간 넓어졌고 긴 목운 아래쪽에서 완만하게 넓어져 몸체에 이어진다. 유리의 내부에는 작은 공기방울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유리의 질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금제 마개는 병의 아가리 위로 올라오는 부분이 연꽃봉오리형태를 이루고 있다. 병이 놓여있는 연꽃받침은 1변의 길이 4.8cm의 정사각형의 안쪽에 위로 좁아드는 하대가 놓이고 이 하대에 위로 넓어지는 상대가 있는 형태로 불상의 좌대형태와 비슷한 구도이다. 이 받침의 하대부분에는 외곽에 짧은 선을 촘촘하게 돌렸으며 상대에는 상대부위와는 분리되어 금판을 오려서 만든 연꽃잎이 위를 향하도록 배치되어있다. 또 받침부위의 아래 정사각형과 원을 이루는 하대의 이음부분, 즉 정사각형의 상면 외곽을 따라서 인동꽃 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금경판은 폭 137cm이고 길이 148cm인데 모두 19장으로 되어었다. 각장에는 17줄씩 금강경이 찍혀있는데 글씨의 크기는 0.6cm내외이다. 높이가 낮은 경판함에 담져져있었는데 정밀하게 조각된 핀목(板木)에 대고찍은 것으로 목판인쇄술을 밝히는 좋은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석탑에서는 이외에도 각종구슬과 청동으로 만든 여래불상이 출토되었다. 
3. 왕궁평의 성격
위에서 살펴본 바를 요약하면 왕궁명은 직사각형을 이루는 성으로 그 구역은 탑을 중심으로 한 북쪽이 남쪽보다 한단 높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또 제한된 조사인 탓으로 명확하지는 않으나 탑의 주변에는 건물유구가 있으며 남쪽의 명지에는 궁궐의 담장으로 추정한 유구가 있다. 그리고 탑의 주변과 남쪽 대지에서 노출된 유구는 백제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석탑은 그 탑의 조형에 신라계의 양식이 섞여있으며 또 사리장치들에서도 백제 이후의 것으로 판단되므로 백제가 멸망된 다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유구와 백제가 멸망된 다음의 석탑이 뒤섞여있는 왕궁명에 대하여 심한시절 기준의 궁궐터였다거나 견훤이 도읍을 둔 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 이곳을 왕이 살고 있던 궁성이라는 의미에서 왕궁들판이라고 부르며 주변에 왕과 관련되는 명칭인 옥룡천(玉龍川)이 흐르고 있다. 이 같은 것들이 전혀 허구가 아니고 어느 정도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주목되며 백제의 익산 천도설이 제기되는 근거가 된다. 백제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처음에는 현재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도읍을 두고 있다가 그 후 공주와 부여로 천도하였다. 이에 따라서 공주와 부여에는 왕궁이 있고 그 왕궁을 둘러싼 성곽이 있어 각기 공산성과 부소산성으로 남아있다. 익산천도설에 의하면 부여에 도읍을 두고 있던 백제는 무왕 때에 익산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무왕온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록사를 창건한 왕으로 의자왕의 부친이며 서동설화의 주인공이다. 서동설화의 내용을 축소하고 많은 부분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서동이라는 사람-대체로 무왕을 지칭-이 금마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무왕 때 백제가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고 그 궁성이 지금의 왕궁평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문헌기록이 근거로 제시된다. 첫째는 중국의 육조(六朝)시대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관세음용험기”라는 책에 기록된 것이 있다. 그중 “百濟武廣王 避都tP、幕寶地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次E갖十-月 天大雷雨…”라는 기록이 익산천도설의 유력한 근거가 된다. 위의 기록과 그 뒤의 내용에 의하면 백제 무광왕이 지 모밀로 천도를 하였고 정관 13년(당나라 연호로 서기 639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탔는데 부근 땅속에서 사리와 칠보가 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광왕을 무왕으로 파악한다면 무왕이 지모밀이라는 곳으로 천도한 것이 되며 무왕이 600년-641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므로 연대도 부합된다. 그리고 지모밀에 대해서는 왕궁명에 있는 토성을 “모질메”토성이라고도 하는데 모질메가 앞뒤가 뒤바꾸어 지모밀이라고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어떻든 간 지모밀이 익산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며 따라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두번째 문헌으로는 〈삼국사기〉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 8년조에 “…六月 jr官늦놓 #水 짧血 金馬那地 流血廣五步’란 기록이 있고 백제의자왕 20년조에는 “…春二月 王都井水血色”이라는 기록이 었다. 이 두 기록은 태종무열왕 8년이 서기로 661년이고 의자왕 20년이 660년이므로 시간상 차이가 있으며 또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과 이후라는 차이도 있으나 같은 현상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만약 같은 현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백제의 왕도인 금마의 대관사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고 결합할 수가 있어 백제의 도읍이 금마였음을 전하는 기록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위와 같은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유물과 유적에서 몇 가지가 제시된다. 첫째로 미륵사와 같은 큰절을 금마에 세운 것은 이곳이 도읍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두번째로는 왕궁리 5층석탑의 주변에서 건물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그에 따라 석탑이 주변에 “광궁사’또는 “대관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은 소개한 바가 있다. 이 절은 출토된 유물에 의하여 백제때의 것으로 보이며 궁성에는 왕실의 소원을 벌기 위하여 왕실의 사찰이 자리하며 이를 “대관사”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왕실의 원찰이 되는 절을 가지고 있는 왕궁평은 왕성이라는 견해이다. 또 탑의 남쪽대지에서 궁궐의 정원석으로 놓여졌다는 것들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익산 천도론은 다시 백제가 멸망할 때 금마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는 견해와 무왕 때에 천도를 했다가 다시 부여로 돌아가서 부여에서 멸망했다는 견해로 나쉰다. 전자의 견해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다 많은 가치를 두는 것이며 후자의 견해는 무왕과 금마와의 관계에 보다 역점을 두는 입장이다. 이 같은 천도설 외에 별도를 익산에 두었다는 별도 경영설이있다. 즉 백제에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소경이 있었으며 그중 하나가 익산의 왕궁명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익산 별도설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익산조에 “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에 근거를-두고 있다.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경영설과는 다르게 왕궁리 5층석탑이 문제로 대두된다. 즉 왕궁명에 백제 때 궁성이 있었건 별궁이 있었던 간에 석탑은 백제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언제 만들었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석탑의 양식과 사리장치와 유물에 의하여 신라말이나 고려초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를 근거로 후백제의 견훤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더 나아가 견훤이 후백제의 도읍으로 선택했다는 완산이 이곳 왕궁명이며 석탑은 그의 치세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곳을 완산으로 보는 견해는 조선 영조때의 군수였던 남태보가 펴낸 〈금마지〉고적조에 왕궁리 5층석탑에 관한기록 중 “…而搭成之日完山畵훨三日”이라는 기록에 근거한다. 지금까지 왕궁평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논의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논의는 앞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보다 넓은 조사와 왕궁평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재검토가 될 것이다. 또그에 의하여 많은 것이 밝혀지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전개되는 의견들이 명확한 근거와 확고한 사실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으며 약간의 근거를 중심으로 한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연구자들의 탓이 아니며 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역사도 묻히고 한낱 전설처럼 설왕설래되고 있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역사의 망각은 비단 이곳 왕궁평만의 일이 아니며 다른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유적에서는 공통되는 서글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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