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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연재 [문화저널]
백제기행6백제부흥운동의 現場을 찾아
진호(2004-01-27 12:22:30)


백제정신을 찾는 과거로의 긴 여행


 백제기행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로서가 아닌 시대적 의미의 「백제」로의 기행을 처음 가졌다. 「백제부흥운동의 현장을 찾아서」란 주제를 걸고 나선‘ 끼행팀은 일정상의 이유로 부득이 년대쓸 年代)을 거슬러 후백제라 이름 붙여진 900년代 그 부흥과 멸망의 상징이기도 한 김제 금산사를 향해 떠난다. 우리가 가까운 휴식처로 또는 소풍장소로 툭하면 찾는 금산사를 굳이 날을 정해 다시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먼 과거로의 기행이 오늘날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목탁소리와 풍경소리 거기에 다 불타버린 대적광전복원과 미륵전 보수공사에 한참인 목수들의 망치소리, 산새와 풀벌레 소리… 그 한가운데 앉거나 서서 우리는 「백제」가 갖는 의미를 차근차근 되새겨본다. 원래 백제의 건국은 고구려에서의 왕권다툼에서 패한온조·비류 등과 그 일행에 의한 저항과 개척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북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또 다른 「살만한 땅」을 찾아 이 땅을 중심으로 한 반도의 서남해안 지방에 정착했을 것이고. 아직 부족의 연맹체차 아닌 .아쩌역 ‘헛고따굴가의 성립이 이처럼 끈질긴 개척의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또한 백제인들이 가졌던 끊임없는 변혁과 역동적인 힘을 보유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들이 꿈꾸던 이상국가의 멸망은 지역민들의 恨을 그만큼 뿌리깊게 만들었고 그 후 백제유민들이 보여준 격렬한 부흥운동은 그들의 가슴에 남은 앙금에 비례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멸망과 그후 부흥을 꿈꿨던 후백제의 패망은 자연히 전라도 사람들에게 깊은 恨의 뿌리를 형성하는 역사적 근거로 자리잡는다. 건국초기 그들이 가졌던 개척의지와 함께 자연이 준 풍족하고 비옥한 땅에서 가장먼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넉넉한 의식으로 일찌기 나라의 창을 활짝 열었던 「백제」는 그후 외세와 결탁한 신라의 통일과 역대 왕조들의 잘못된 지배사관에 의해 이제 그 역사적 자취는 거의 은닉되고 사장된 채 버려져 있다. “미륵은 언제 오는가? ”주위의 소음으로 방해를 받으면서도 기행팀은 연사의 주위에 둘러서서 후 백제의 생성과 멸망에 대한 긴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들어야 했다. 철저한 실중사학자답게 항상 단정적 어미보다는 추상적 어미를 사용하는 전북대 윤덕향교수는 역으로 그만큼 기행팀들에게 더 큰 신뢰감을 안겨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고고학자 본인에게는 어쩌면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교수는 어느 글에선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얘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백제의 유적을 이야기 할때 공통되는 서글픔도 좀 더 폭넓은 발굴조사와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명확한 근거와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지 못하고 항상 추상적으로 머물 수 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아물든 윤덕향교수는 금산사와 후백제의 관계, 견훤이 이곳 금산사에 본거지를 택해야 했던 이유, 그리고 직후백제탄생과 미륵신앙이라는 사상적 토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시작된 백제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자 백제유민들은 오랜동안 죄苦의 세월을 보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된 이곳 금산사는 미륵불의 현세출현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자연히 금산사는 백제 유민들에게 있어 도피처로서의 구심점이 되었을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견훤은 바로 이같은 백제유민들에게「반신라」라는 명분을 제공함으로써 후백제를 성립시킬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것입니다”
경상도 상주사람이었던 견훤은 892년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현재의 光州)를 점령하고 다시 완산주(지금의全州)를 점령한 후 900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준다는 명분으로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후백제라 칭한다. 이처럼 경상도(당시 신라) 사람이었던 견훤이 백제 유민들을 모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말기(진성여왕)에 오면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계급은 서민계급과 철저히 유리되고 나라를 지탱하는 사상적 토대와 불교 또한, 돈으로 극락(내세)을 얻겠다는 지극히 문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즉권력의 속성상 귀족계급은 다시 귀족 속의 귀족을 낳게되고 이 같은 경향손재력으로 권력을 살 수 있는 풍토와 함께 진골계급의 수가 늘어나면서 헤게모니 싸움이 절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항해서 귀족에 포함되지 못한 6두품세력과 원효를 중칩으로한 선종세력은 자연히 반신라적 입장에서는 대조적 세력이 된다. 한마디로 당시 진골을 위시한 귀족(지배)계급은 고기를 안 먹는 것보다 고기를 먹으면서 극락에 가겠다는 것이 그들의 정토정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피지배(서민)충은 그저 “나무관세음보살만을 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건국초기부터 백제에 대한 견제를 지속해온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인 주요한 이유로 고구려보다 백제세력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이후에도 고구려유민에 비해 백제유민에게 훨씬 더 가혹한 정책을 쓰게된다. 즉 지배지역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흔히 쓰게 되는 지방호족에 대한 대우를 봐도 백제귀족은 고구려귀족에 비해 지나치게 격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백제의 2등, 3등관인 달솔과 은솔계급→신라의 10등, 11등관인 대나마, 나마 수여. 고구려 3등, 4등관인 주부, 대상(大相)→신라의 7동, 8등관인 일길찬, 사찬 수여 아물든 이 같은 백제귀족층에 대한 격하와 함께 고대사회에 있어 경제기 반이되는 농촌사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백제유민들로 하여금, 염세적이고 현세도피적인 속성을 갖게 하였으며, 이 같은 양상은 통일신라시대 피지배계 충민들에게도 일반적 의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현상은 사회발전단계가 제일 늦었던 신라라는 사회가 구국을 통일한데서 기인하는 소화불량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런 사회 분위기는 곧 현세에서 복을 받는 속성의 불교, 새세계에 도래할 미륵불의 현세출현(現世出現)을 믿는 미륵불교가 선종의 유행과 함께 크게 성행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금산사는 바로 이 같은 사회분위기에서 백제유민과 피지배계층의 민심을 사려는 의도로 신라 혜공왕이 진표율사를 시켜 창건하게함으로써 세워지게 되고, 겉으로 법상종을 표방한 것과는 달리 진표율사가 미륵불로부터 받았다는 점찰경(點察經)과 함께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의지로 이룩된 금산사는 당시 백제 유민들의 구심점으로 등장하게 되고 그후 미륵신앙은 민중충의 저변에 깊은 뿌리를 내려 어지러운 사회가 도래 할 때마다 개혁운동의 중심사상으로 회생,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들불을 일으키게 되며, 지금도 후천개벽을 꿈꾸는 많은 신흥종교들이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모악산에 잉태하게된 동기를 이룬다. 나라를 세운 견훤의 후백제는 싸워서 져 본일이 없다고 할 정도의 강력한 세력으로 신라와 고려를 압박하고, 927년에는 안동을 거쳐 경주에 침공, 경애왕을 살해하기에 이르지만, 935년 왕실내분으로 견훤을 이곳 금산사에 유폐되며, 같은 해 고려군과의 선산, 황산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고려에 통합되고 만다. 이로써 견훤이 갖는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웠던 백제에의 꿈은 다시 좌절을 맞게 됐지만 그후 백제유민들은 계속된 소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회변혁에의 강한 의지로 살아있는 것이다. 당시, 숱한 댓가를 치룬 뒤 가까스로 황산전투에서 승리한 고려군이 새왕조를 만들고 나서도 왕건은 이른바 훈요십조를 통해 「차령이남의 사람은 등용치 말라」는 몰래 역사적 짓거리를 하지 않았던가? 기행팀은 견훤이 유폐됐다는 금산사 입구 누각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출입문이 대체 감옥으로 쓰기엔 안성마춤이라는 등, 견훤의 처가 29명이었다는 설(說)이 과연 사실일까 아닐까를 여담으로 흘리면서, 역사를 더 거슬러1300년전으로 향한다.“격렬했던 백제 부홍운동은 곧 백제인의 곧은 저항정신에 다름 아니다”부안읍내에 도착, 점심을 마친 기행팀은 부안을 지극히 사랑하는 유종남씨와 합류 개암사로 향했다. 동산복으로 차려입은 유종남씨는 앉아서 따따부따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부안의구석구석을 누비며 부안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바로 살아있는 향토인이다. 개암사로 들어서는 입구는 생각보다 길고 노폭이 좁았다. 개암호수를 돌면서 기행버스는 심한 몸살을 겪어야 했고 그나마 번지르한 관광버스가 아니어서 통행이 가능했던 그런 길이었다. 기행팀은 개암사앞 잔디밭에 둘러앉아 잠시 주지스님과 함께 하기도 했다. 역사를 탐방하는 우리일행을 맞은 효산스님은 이제야 얘기할 상대를 만났다는 듯, 개암사의 연혁부터 백제멸망이후 현대사까지를, 부안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 향토사를, 또한 이후남벌을 중심으로 불의에 타협치 않고 義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새시대의 주역은 바로 이곳에서 나온다는 개벽사상까지를 스님의 한없는 여유로 이어갔고, 따라서 우리의 바쁜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스님의 얘기가 끝나고, 기행팀은 다시 그날의 주제를 찾아 개암사뒤의 주류산에 오른다. 아직은 뚜렷하게 남아있는 山城의 흔적들, 그리고 저 멀리 펼쳐진 개화도의 가없는 풍경을 보면서 하나둘씩, 정상의 편편한 바위에 모여 앉았다. 제171백제 부흥운동은 백제가660년 7월18일, 패망한 직후부터 시작되어 임존성이 함락된 663년 11월까지 약4년에 걸쳐 끈질기게 지속된다. 이 같은 부흥운동은 백제가 멸망할 당시 나당연합군에게 장악된 사비성과 웅진성을 비롯한 몇 개의 제한된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다.(당시 백제의 성은 200여개)
1. 임존성 중심기
@초기 백제부흥운동은 임존성(현재,충남 예산)을 중심으로 백제유장 복신과 숭려 도침, 장군 혹치상지등에 의해 일어나 10일만에 3만여명의 군사가 모이는 큰 세력으로 부상(백제 멸망당시 계백장군 휘하의 군사는 5천여명).
@위 사실은 백제가 멸망은 했지만 아직도 많은 지방은 나당연합군의 세력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입증.
@1차 사비성 포위공격시도, 그러나 무열왕의 구원과 지도부의 조직미비로 실패 
2. 주류성 줄심기
@혹치상지, 당시 당나라 벼슬을 지내던 부여읍(의자왕 아들)에게 투항
@661년, 복신과 도침 2차사비성공격실패 - (3고구려의 신라침공으로 나당연합군의 세력이 분산, 약화환、틈을 이용, 주류성 남방지역 장악
@662년 5월 일본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의자왕 아들)을 왕으로 옹립 
3. 내분과 소멸기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왕자 “풍”이 복신을 살해하는 내분 발생
@663년 8월 일본원군(수백척)이 백강전투에서 패배, 풍왕은 고구려로 망명. 9월 8일 주류성 함락
@ 장군 지수신, 임존성에서 끝까지 투항했으나 혹지상지에 의해 섬멸, 지수신 고구려 망명으로 부흥운동 실패 
윤덕향 교수는 현재 문제가 되어온 주류성의 위치가 과연 어디인가? 에 대해서 4가지 說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충남 한산설(신채호, 이병도·주장)과 충남 부여설 그리고 전북 부안설(안재홍, 전영래), 전북 고부설이다. 이 문제는 부흥운동군과 일본 원군이 패배한 곳으로 전해진 白村江은 어느강이며, 白村은 어디인가? 그리고 기 별포가 어노포구·였는지를 밝혀냄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과제일 것이다. 전북 부안설로 보는 견해는 기벌포를 계화도 부근으로 추정하여 백강을 현재의 동진강으로, 白村을 부안 백산면 부근으로, 그리고 주류성을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 뒷산에 있는 위금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가없는 바다와 갯땅, 그에 이어지는 질펀한 들판과 두툼한 산자락, 이곳이 바로 전라도의 삶터다”이제 주류성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작업은 학자들의 몫으로만 치부해 버릴 얼은 아닌 듯하다. 정상에 오르면 한눈에 봐도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는 위금산성의 정상에서 우리는 한때는 포구였고 갯터였을 계화도를 바라보고 눈을 돌려 대지의 풍성한 벌판을 웅시한다. 끝없는 바다와 갯당, 그에 이어지는 질펀한 들판과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두툼한 산자락까지-.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가꾸어야 할 땅, 바로 우리의 삶터다. 천여척에 달했다는 일본 원정군과 혼신의 힘을 쏟아 저항했을 백제인들의 최후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그들의 혼과 정신은 다시 바다를 건너 섬나라땅에 수많은 흔적을 남긴채 지금껏 살아 숨쉬지 않는가? 백제기행은 언젠가 이시기 일본 속의 백제문화를 찾아봐야 한다는 당위를 생각하면서 이 땅에 대한 좀더 진지한 탐구의 길을 계속 모색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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