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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연재 [시]
이리중학교
안도현(2004-01-27 13:46:24)

어느 때묻지 않은 손이 닦아놓았나
유리창을 열면
군산선 화물열차가
바다에서 돌아오는 콧
운동장 앞으로는 목포 여수 서울로
호남선과 전라선이 달리는 곳
짓꽃은 아이들이 그래서 기차길 옆 오막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리중학교, 꼭두새벽 도시락 싸서
나는 낡은 외투를 입고 출근하고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데리고 둥교한다.
우리나라 모든 학교가 그러하듯이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가 열리고
펄럭이는 태극기 아래
아무것도 모르는 가슴에 손을 대는
일제 치하 어린 학동 교장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분단 나라 젊은 국군 담임선생님이 그러하였듯이
측백나무처럼 오와 열을 맞추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코같이 랩고 발이 시린 겨울
이리중학교에서
누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나
일주일에 스물네 시간 국정 국어교과서를 가르치
한 달에 스무 시간 보충수업을 하는
조회 종례 때마다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수업료 보훈성금 방위성금 불우이웃돕기 성금
극기훈련비 수학여행비 졸업앨범비
날이면 날마다 독촉을 하는
명찰 배지 실내화 두발검사를 하는
성적이 떨어지면 매를 때리는
나를 아이들은 선생님, 하고 부른다.
나는 분필밥 겨우 2년 먹었는데
나는 봉급날을 기다리는 가난한 월급쟁이인데
나는 넥타이도 제대로 밸 줄 모르는데
나는 배고픈 아이 라면 한번 못 사주었는데
이 유리창을 닦으며
모르븐 사이에 하늘을 닦던 아이들 중에
먼 바다에 배 타고 고기잡으러 간 아이는,
소작 얻은 황토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이는,
아리역 화약폭발 사고 때 하늘로 떠난 아이는,
그때 살아 남아 교문 앞을 손수레 끌고 바삐 지
나는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감옥에 간 아이는,
귀금속공장에서 하양게 밤새는 재작년의 아이는,
추억의 동창회가 열려도 돌아을 줄 모르고
그 옛날 총각선생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렸다.
그 옛날에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버드나무들이 톡톡 손가락 꺾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러면 봄은 또 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그날 평교사를 위한 시를 쓰고 싶었다.
겉보리라 불리던 김경회 수학선생님이
책상 속을 정리하고
40여년 교직생활을 그 서랍을 닫고
홀로 뒷모습을 보여주며 떠나시던 날
나는 숙직실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까닭없이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이리중학교야
나도 저 무명의 찬란한 길을 가리라.
점심시간이면 김치 냉새가 우리를 적시는 교실에서
손목과 발목이 굵어지는 운동장에서,
추운 아침이면 서로 뿜어주는 입김 속에서,
모이면 햇불이 될 아이들의 수많은 눈빛 속에서,
이 뜨거운 조국의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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