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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1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백제의 토성
윤덕향(2004-01-27 14:09:13)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백제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주로 볼만한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었다. 이제 이 물건을 만든 주체들의 터전에 대하여 남겨진 토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결국 물건이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데 있어서 백제인들의 생활터전이었고 전쟁이라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축조된 성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눈에 띄는 화려한 유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백제의 역사를 파악하고 백제인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들 물건도 기층 민중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우월적인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소속되는 것이기는 하나 이를 통하여 기층민중의 생활이 어느 수준이었을까를 가늠할 수는 있을 것으로 믿는다. 서울 올림픽의 주무대였던 잠실벌판에는 현대 한국 건축의 정수가 모여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체육시설과 휴식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이 잠실 주경기장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는 몽촌토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올림픽을 계기로 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몽촌토성에서 멀지 않은 천호대교률 건너서면 암사동 선사「적지에 한반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웅집이 복원되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워커힐과 마주하고 있으며 워커힐의 뒷산에는 바보로 유명한 온달장군이 전사했다고 전하는 아차성이 있다. 그리고 암사동의 서쪽으로는 들어선 높은 집들에 가려서 끝부분이 보일까 말까한 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토성이 풍남리 토성으로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들 한강유역에 자리한 유적중 강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풍남리 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백께의 초기 성곽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1. 풍납리 토성 풍납리 토성은 현재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소재하고 있으며 사적 11호로 지정되어있는데 본디 경기도 광주군 풍납리에 소속되어있었기 때문에 풍납리 토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토성은 원래 남북길이 약 3Km, 동서 폭1Km로 둘레 길이가 4Km에 이르는 장타원형으로 토성 중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이었다. 그러나 1925년 한강이 대홍수 때 일부가 흘러나가고 지금은 약2.7Km가 남아있다. ’이 토성에 대해서는 1966년 서울대내 학교에서 부분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성격의 일부와 연대가 밝혀졌다. 발굴조사 이후에도 상당기간 방치되다 시피하다가 1976년부터 78년까지 정비하여 본디의 모습에 가깝게 남아있다. 성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북벽 부분에서는 8M에 달하는 곳이 있으며 바닥부분의 성벽 폭(족 두께)는 30M를에 이른다. 바깥부분 성벽 경사로는 2단으로 축조되었으며 잘 남아있는 동쪽에서는 성문터로 파악되는 곳이 남아있다. 오랜기간 동안 역사 속에 묻혔던 풍남리 토성의 모습이 다시 조명된 것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1966년 발굴조사를 통해서이다. 이 발굴조사는 매우 부분적인 것이었고 1925년 홍수시에 파헤쳐진 단얘면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토성의 전모를 파악하는데에는 미흡한 것이었으나 몇 가지 의미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첫째로 이 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이 이 토성의 주변지역에 살고 있었으며 그를 기반으로 하고 중국, 고구려문화와의 접촉을 통하여 새로운 토기문화를 형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이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지역에서 백제 이전시기의 토기 전통이 남아있으며 이 토기류가 주로 식료품 따위의 저장을 위한 그릇이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또 중국 토기의 영향도 있으나 고구려 토기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으며 이는 이곳의 생활주체들이 양 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로 파악되는 것이다. 둘째 이 토성의 축조에는 판축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판축이란 흙을 쌓아올리는 방법의 하나인데 대단한 인력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즉 흙을 일정한 두께로 쌓은 다음 그 상면을 매우 다지는데 이때는 대체로 직경 5Cm미만의 나무끝으로 전면을 정교하게 다지게 된다. 이처럼 다진 다음 다시 그 위에 흙을 쌓고 마찬가지로 다지는 방법으로 쌓는 방법을 판축법이라고 한다. 이 같은 작업에는 흙의 조달이라는 어려움외에도 판축과정에 많은 인력이 소요될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셋째 토성내에는 적지 않은 집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는 이 성이 도읍이 있었던 도성이었건 아니면 도성을 방어하는 외곽의 진성이었건 간에 성안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군사적 목적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성안에 어떤 부류의 사람이 거주하였는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정치, 경제 및 어쩌면 종교, 문화적인 중심지의 하나로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성의 성격에 대하여서는 그 명칭과 입지조건을 중심으로 두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중 명칭을 중심으로 한 견해에 따르면 풍남이란 우리말로 “바람드리”이며 이를 근거로 이토성이 “배암들”이라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기록에 나타나는 사성(*熾 : 뱀성)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사성은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286년-298년) 조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과 더불어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축조된 것, 즉 백제 초기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이 토성을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는 일본인에 의하여 제기된 바가 었다. 이 견해는 이 토성의 주변지역에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돌무지무덤(積石場)의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곳을 백제초기의 도읍이었던 위례성으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이라는 약점이 있으나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이곳에 도읍이 있었을 만한 유물은 출토된 바가 없으며 이곳에 사성이었다는 근거도 확인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성은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도읍이 있었던 한성이 무너지고 개로왕이 죽고 난 이후, 즉 백제의 도읍이 공주로 천도된 이후 폐기된 것으로 여져진다. 2. 몽촌토성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행정구역상 강동구 이동에 속한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전하여 오다가 1983년부터 올림픽에 대비한 문화적 공간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사적 297호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은 자연구릉을 이용하여 일부는 자연 암반층을 깎아내어 급경사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일부 지역에는 흙을 덧쌓음으로서 성벽을 만들었다. 또 북벽의 단을 이루는 곳에는 목책을 세워서 방어기능의 효율을 높이고 있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보거나 당시의 정치적인 양상에서 이 성이 주로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파악된다. 성은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탓으로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나 한쪽편이 길게 뻗어나간 마름모꼴에 가깝다. 규모는 남북최대 길이가 730M, 동서최대 길이 540M이고 성벽의 길이는 성벽의 정상부분을 중심으로 할 경우 서북벽이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여 M로 전체 길이는 225M에 달한다. 그리고 동북쪽으로270M가 더 나간 외성이 었다. 이 성벽에 의하여 구획되는 성내부는 면적이 6만7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축조당시의 지변에서 125-17M까지가 남아있으며 상면의 폭은7.5-105M, 하면의 폭은28-65M내외이다. 동, 남, 북쪽에서 문지(門址)가 확인되었으며 성의 바깥으로는 해자(해子 : 불을 흘려서 방어하는 구덩이가 마련되어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기의 집자리, 저장구덩이와 토광묘 독무덤(토광훌), 토광적석묘 등이 조사되었다. 이중 집자리에서는 기와를 사용한 예가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당시의 문화수준으로 미루어 보아서 지배층의 집에는 기와가 입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사된 집자리들은 백제 이전시기와 같은 형태인 움집으로 이를 지배충의 집자리로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저장구덩이는 원형과 장방형 평면의 것이 있는데 직경 3M남짓한 크기로 깊이나 파내려간 형태에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내부에 물건을 저장하기 위한 기능의 것들로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에 이 성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집자리 부근에서 주로 발견되는 점에서 실생활에서의 저장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성안에서 토광묘 동의 매장유구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이 방어목적 외에도 생활의 주된 무대였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조사가 추로 생활과 관련있는 유적의 확인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조사에 기대하는 바가 크며 우선 지금까지의 조사를 중심으로 몇 가지 점을 살펴보겠다. 첫째 이 성에 얼마만큼의 사람이 살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산출할 방안은 없으나 면적만으로 따지만 1-2만명이 수용될 수 있으며 그중 거주에 부적당한 곳을 제외하더라도 8,000-10,000명 정도를 수용 가능하다는 추론이 있다. 이 같은 인구는 오늘날 작은 읍에 거주하는 인구와 같은 것으로 이 지역이 방어적인 속성외에 생활의 터전일 것이라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성안에서 전통적인 음식이 조사되며 출토되는 토기에서도 새로운 토기의 도입 외에 전통적인 토기양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기와를 사용하거나 특별히 신분의 차이를 입중할 만한 집자리가 조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일반 민중들의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정치, 경제 등의 중심으로서의 성안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외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밖에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성의 수용인구라는 것이 유사시의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근거지는 성밖이었을 것이나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민중들의 생활의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기본적으로는 이 성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인 것이고 지표에서 기와나 중국 육조시대의 물건들이 출토되고 있는 점에서 공공건물이나 지배충의 생활근거지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으나 어쨌든 전통성을 가진 집단들의 생활근거로서 기능하였을 것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셋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전통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으로 나뉘는데 외래적인 것은 고구려적인 속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구려적인 속성의 유물 특히 토기의 출현과 펴불안 유구에서도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점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생활유물에서의 변화는 외부, 또는 내부에서의 문화의 변화, 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시사하는 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조사에 의하여 의미있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된다. 3. 토성에 의한 추론위에서 살펴본 2예의 토성은 발굴조사에 의하여 부분적이나마 그 성겨이 밝혀진 것이다. 출토유물에 의하면 이 성들은 백제의 도읍이 한강지역에 있을 때의 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성들이 있는 인근 지역인 석촌동과 방이동, 가락동 등지에는 백제초기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적석총이나 용토분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성들이 도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도성의 수비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들이 축조된 시기는 일치되지 않으나 대체로3-5세기사이에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이 토성에는 3-5세기의 백제 역사가 투영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5세기라는 시기는 백제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남으로 전남지역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던 시기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하여 도읍이었던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는 사건이 있었던 시기로 기록된다. 이 시기는 따라서 백제역사에 있어 영욕이 교차되는 시기였으며 그 주된 무대는 아마도 도성이 한성과 그 전초기지로서 한강변에 자리하고 었던 이 같은 류의 토성이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토성들에 대한 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토착적인 토기가 주로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제의 지배계층이 고구려에서부터 갈려나온 유이민집단이라는 점에서 백제를 유이민에의 한 왕조로 파악하려는 견해와는 상치되는 것이다. 즉 당시 성안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물건중에는 백제의 성립이전단계부터의 문화적 산물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토착적인 집단이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일부 지배충이 유이민이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국가의 틀이 다져졌다고 하더라도 토착민들과의 결합에 의한 것이고 유이민만의 왕조라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를 이민집단이 지배집단이고 토착집단은 피지배집단이라는 2분법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토착집단과 유이민집단의 결합에 의하여 백제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며 이같은 점이 분명하다면 전북지방에 자리하고 있던 마한집단을 백제가 아우른 다음도 같은 양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즉 마한집단이라는 전북지역의 토착집단이 백제왕실에 피지배-지배의 관계로 편입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으며 그중 대부분은 명민으로서 피지배관계로 전락하였을 지라도 일부는 지배계층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이 같은 추론을 입증활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없으나 전북지방, 특히 부안지방을 중심으로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토성, 또는 목책지들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 같은 조사를 통하여 기충민들의 문화와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확인될 것이다.


 백제,  토성,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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