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0.1 | 연재 [교사일기]
참교육의 현장
어느 선생의 하루
황임택 부안여자고등학교 교사(2003-09-08 10:22:17)

어느 선생의 하루
황임택 부안여자고등학교 교사

김 선생은 눈을 뜬 채 이불 속에 그냥 누워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탓도 있었지만 오늘따라 학교 아닌 다른 곳으로 피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출근을 하면 월말교무협의회에서 어제 십여 명의 평교사모임에서 결정된 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격의 건의를 자신이 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 버릴 수가 없었다. 지난 학기에 탈퇴각서를 쓰지 않고 세 명의 교사가 해직된 뒤로 참교육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매달 만원씩을 기부하고 있는 자신의 몰골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해직도 되지 못한 주제에 매달 얼마씩의 돈을 냄으로써 양심의 저 아래에 있는 부끄러움을 면죄 받으려 하고 있지 않나 해서였다. 처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 주위 선생님들의 눈초리도 생각났다. 우리 학교처럼 건전한 학교에서 무엇 때문에 노조 하는 것에 가입하여 사소한 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따져서 평소에 알고도 생각지 않으려 하는 것들을 생각케 하여 자신들이 안주하고 있는 생활에 분란을 야기하느냐는 원망의 표정과 더불어 '그래, 너희들은 잘났어','너희들끼리 잘해봐, 너희는 참선생이니까'라는 비아냥거림이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세 명이 해직되고 나머지는 탈퇴각서를 썼을 때 그들의 표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런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는 터에 오늘 자신이 그런 말을 한다면 윗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몇몇 동료들도 역겨움을 표시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김 선생은 오늘 학교에서 해야 할 일도 생각했다. 특활시간에는 학생들 농구시합 심판을 봐주기로 했고 3학년 5반에서는 경희가 김 선생 시간에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를 원어로 부르기로 하고 며칠 전부터 연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나자 어떤 이유에서도 결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무협의회는 오후 4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그 시간으로 정해진 것은 아마도 어제 평교사 몇몇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궁리하였다는 것을 알고서 미리 그 예봉을 피하려는 방책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그의 뇌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주임들이 발표하는 부별 업무보고는 40분을 넘기기 시작했고 2학년 수학선생인 강 선생의 교수법에 대한 연수가 끝났을 때는 타지에서 출퇴근하는 선생들의 싫은 표정이 역력해졌다. 그제서야 사회를 맡은 교무주임이 건의사항을 말하라고 하고는 아마 없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회의를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 선생이 얼른 일어섰다. "오늘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만일 그 사항들이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면 선생님들의 중지를 모아 그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첫째는 교복에 관한 것입니다. 지난 봄 학기에 교복의 블라우스가 검으니까 흰색이기만 하다면 티셔츠 착용 허용을 고려하자고 했을 때 몇몇 선생님께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민주화와 자율화에 편승하여 학생들에게 무질서를 조장한다고 해서 교복 원형을 변형시킬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날씨가 추워졌다고 학생들에게 바지를 입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바지를 입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교복에 대한 원칙이 변한 것에 대한 배경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는 방학 중 보충수업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학교의 상급학교 진학률은 낮은 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열심히 노력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지도하는 선생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느끼는 학생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학 중 보충수업에 모든 학생을 참여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코아래로 무겁게 내려않은 안경을 밀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김 선생님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게 계시는 듯 합니다. 교육법에 의하면 모든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교수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장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그 부분을 잘 헤아리셔서 충분히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맥없이 흘렀다. 이제 시간은 6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집에 가야한다는 표정을 숨긴 채 누군가가 그만 끝내자는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교감 선생님이 일어섰다. "선생님들, 지금 퇴근시간이 훨씬 지났습니다.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다음 월말교무협의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목소리 큰 과학 선생이 그러자고 대답하였다. 교무실 여기저기에서 가방 챙기는 소리가 들리고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회의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제 모였던 선생들도 체념하는 듯 했다.
김 선생은 나란히 걸어가는 세 여선생을 지나쳐 걸음을 빨리 했다. 벌써 해직교사 이 선생을 만나기로 한 때가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걸음을 빨리 하면서도 뒤에서 나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저 선생이 하는 말이 맞는 것은 같은데, 잘난 체 하는 것 같아서 싫어"라는 소리가 바람결에 스쳐 지나갔다. 이 선생은 소주를 반 병 넘어 비우고 있었다.
"야, 왜 이제 오나?"
"예, 회의가 길어졌어요."
"그래, 뭐 좋은 소식 있냐?"
"없어요, 시간에 쫓겼어요. 얘기만 꺼내고 원군을 얻지 못했어요."
"야, 그걸 짐작 못했냐? 인간의 벽이 얼마나 높은데. 권위의 벽, 무관심의 벽, 하긴 네가 그것을 알게 되는 날 관념적 민주주의를 버리게 될 거야, 야, 관념적 민주주의자! 술이나 한잔해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