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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 | 연재 [문화저널]
백제기행 11익산 먹거리 문화를 찾아
김용옥 시인(2003-09-08 11:16:27)

문화저널사의 뜻있는 일거리의 하나인 백제기행이 어느새 열 한 번째.
이 고장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후예로써 우리 고향 우리 땅에 대하여 좀 더 알아야겠다고, 또 알아야 관심이 생기며 관심이 있는 곳에 애정도 싹이 튼다는 단순미묘한 논리에 따라 서서히 애향의 저변확대를 이룬다고 할까? 처음에 백제기행에 대한 안내소식을 접했을 땐 바람이나 쏘일 겸 나들이 삼아 따라나섰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솔직히 말하면 내 고향의 역사성이나 문화, 삶의 애환 등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졌고 그때부터는 늘 다음의 백제기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각설하여, 1990년 1월 20일 열 한 번째 백제기행을 다녀왔다. 그것도 내 잔뼈 굵힌 이러 익산 지방의 유적지 순례와 더불은 먹거리 여행이었으니 일석삼조인 셈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기행이 되었듯이 특별히 먹거리 얘기나 해볼까 한다.
조선땅-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보다는 이런 땐 조선이라는 말이 먼저 불쑥 튀어나온다- 중에서도 이곳 호남평야는 자고로 먹을거리가 풍성한 땅이다. 살만한 면적의 약 60%의 땅이 농경지로 되어 있으니 비교적 식생활이 안정될 터수다. 지금도 익산군민의 85%가 농가인구로 되어있다. 또한 어려서부터 웃어른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리 익산 땅은 큰 가뭄이나 물난리 같은 천지재해가 거의 없이 기후도 비교적 온난 무난하여 천혜를 받는 땅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지방의 산천은 지나치게 높거나 깊지 아니하다. 뒷동산같이 둥그스럼 하고 낮은 산들이 알맞게 솟아 있어서 사람들이 가까이 접하기 좋은 곳이니 산채도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민물의 먹을거리도 풍성하였다. 따라서 먹을 것을 풍부하게 소유할 수 있었으며 먹을 걱정 없이 사는 게 만족하니 인심이 후했을 것은 당연지사며 배부르면 놀이가 발달한다 했으니 금상첨화로 놀이문화 또한 성해졌을 것이다.

먹거리는 인간육신이 존속 되기 위한 기초
흔히 문화라는 말은 정신적 가치에 붙여 쓰지만 음식문화라는 말도 요즘은 종종 사용한다. 음식이라는 말 소위 먹거리는 인간육신이 존속되기 위한 기초다 굶주린 사람에게야 허기만 면할 수 있다면야 보리밥덩이인들 풀뿌리인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먹거리가 혼전해지면 배부른 타령이 생기게 마련이다. 곧 음식을 먹되 좀 더 맛을 따지게 되고 보기 좋은 떡이 좋더라고 모양새 나게 음식치장도 하고 싶어질 것이고 그것이 발달하여 소위 음식문화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다.
30명 남짓의 회원들은 왕궁탑과 동양 최대의 절터라는 미륵사지를 더텨 익산군 황등면에서 점심때를 맞춰 하차했다. 현대에 발맞춰 시장문화와는 달리 아직도 옛날식의 5일장날이 서는 날이기도 해서 황등장터를 휘휘 한바퀴씩 돌았다.
소나무 잔가지를 때던 것이 가스불로 바뀌긴 했어도 강냉이와 수수를 튀겨내는 튀밥가게에서는 느닷없이 펑!소리와 함께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부수게(산자)에 라일락 꽃잎보다 이쁘게 돋아앉은 수수튀밥 알갱이는 참으로 구수하고 보기 좋았다. 씽씽 거리는 찬바람 속을 추위도 잊고 이 모습 저 모습 눈을 즐기면서 찾아든 곳은 상호조차 내걸리지 않은 황등시장 모퉁이의 비빔밥 집이었다.

입에 넣어 공글리노라니 사근사근 감쳐드는데
장거리의 주막 같은 곳이다. 위생시설 운운은 간곳없이 정감과 함께 구수한 내음에 콧구멍부터 벌름거려졌다.
주인 아낙의 솜씨 좀 물어보자. 고명나물은 미나리, 묵(철에 따라 청포묵 또는 도토리묵)무우생채, 고사리, 콩나물, 고구마순 나물이다. 도시의 상품화 된 비빔밥의 고명에서 볼 수 있는 색깔내기의 당근이나 은행, 계란지단 같은 것은 얹지 않는다. 철에 따라 상추채. 부추, 어린 열무채 등이 쓰인단다. 이 나무새들은 집에서 담근 조선장으로 마늘냄새가 날똥말똥하게 따로 묻혀 놓는다. 특히 한 가지 다른 것은 돌그릇에 돼지 비계 기름낸 것을 발라 뜨뜻하게 한 다음 보리 섞인 밥한 주걱을 담아 뜨거운 선짓국물을 조금 끼얹어 밥에 윤기를 내어 비빈 후에 나물고명을 얹고 참기름 두어 방울과 깨소금 약간 묽은 찹쌀고추장을 한 숟갈 얹어낸다.
수저를 들어 잘 어우러지게 비벼서 한 술 한 술 입에 넣어 공글리노라니 사근사근하게 감쳐드는데 여러 가지가 어울어졌음에도 담백하고 깔끔하였다. 게다가 금강을 끼고 도는 웅포에서 구해다 쓴다는 잘 삭은 새우젓과 속젓을 젓가락 끝에 찍어 먹으니 소화도 절로 절로 디는 양 하였다.
도시의 비빔밥처럼 지나친 기름 냄새나 자극적인 양념 맛이 아니라 순하고 부드러워 편식 잘하는 어린이들도 투정 없이 잘 들 먹었다. 이구동성으로 맛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뚝딱 한 그릇씩 게 눈 감추듯 비웠다. 이 아이들이 열명 남짓, 아이들의 먹성을 보고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음식을 가리는 사람에게는 적이 많다고 한다. 그런고로 성격이나 사회성교정을 위하여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칠 것은 편식하지 않는 식습관이라 했다.
고루 어우러진 영양만점의 음식 비빔밥. 그처럼 전라도 땅의 사람들은 서로 어우르는 법을 절로 배우며 자란 포용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미루어 보았다. 흔히 비빔밥 하면 전주비빔밥이나 해주, 진주의 비빔밥을 손꼽으나 미식가들에겐 이곳 황등시장의 비빔밥이 더욱 소문나 있다.
식견이 짧은 탓인지 책들을 뒤져봐도 비빔밥의 유래는 명확히 알아낼 길 없다. 다만 어릴 적에 들은 풍월로 옮겨보자.
동냥아치가 문전걸식을 하느라 깡통에 얻어온 밥과 반찬들이 들고 나며 흔들리어 뒤범벅으로 비벼진 것을 먹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했고 부농이나 반가에서 어른이나 주인댁이 물린 밥상의 찬 부스러기를 한 그릇에 쓸어 담아, 바쁜 종들이 시간에 쫓기며 섞어먹은데서 비롯되었을 거라고도 했다. 부농의 진사댁이었던 외갓댁에 갔을 때 부엌어멈이나 머슴들이 그렇게 비벼먹는 걸 본 기억도 있다.
대개 비빔밥이 유명한 황등, 전주, 진주, 해주 등은 농토가 풍부한 곳이다. 따라서 농사가 주업이었고 봄철 파종시부터 추수마당에 이르기까지 논과 들일을 하는 동안에는 집울 밖 벌판에서 식사를 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고로 아녀자들은 점심이나 새참을 커다란 대소쿠리나 함지박에 담아 이어 날랐다. 흔들리는 걸음 따라 함지박 속에 옆옆이 챙겨넣은 반찬들은 한 동아리처럼 엇섞이게 되었을 것이고 이왕 어우러진 것을 마저 뒤섞어 밥에 놓아 나눠먹을 수밖에 없었겠다. 이에서 꾀를 얻어 반찬 가짓수대로 무겁게 챙길 그릇수도 줄이고, 섞어 먹어보니 맛도 그럴듯한데다 바쁜 일손 중에 식사시간도 한갓지게 할 겸 그야말로 자연발생적인 요리법이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날씨는 끼니 걸른 시어미의 성깔처럼 차가왔으니 기분 좋게 든든해진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랐다. 황등면 용산리 대동부락을 향하여.
윤덕향 선생님의 스쳐온 유적지에 대한 보충설명을 들으며 창밖에 눈을 주니 논밭두렁가에 누렁이와 검둥이들이 한가롭다. 하차하여 오른쪽에 교회를 끼고 돌아드니 바람 곁에 솔솔 단내가 안겨든다. 찹쌀엿 생산가에 다다른 것이다.

엿가마솥을 둘러싸고 서서 나무수저 끝에
촌가의 사립 옆 가축우리에는 살찐 암소와 송아지 녀석이 볕살을 쪼이고 있고 흑염소도 몇 마리 아양스런 소리를 낸다. 대뜸 아이들은 외양간 냄새도 아랑곳없이 와글와글 신난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어찌 영악하랴 싶다.
잠시 헛생각도 해보며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엿 생산을 위한 일감들이 널려있다. 수런수런 틈에 주인 아낙을 마주하고 품질 좋은 엿을 만드는 비법이라도 따로 있는지 물었다.
찹쌀은 깨끗이 씻어 일주일 이상 물을 갈아대며 불려 삭이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엿기름 기르기인데 실뿌리와 연푸른 싹의 길이가 각각 1cm와 5mm정도 골고루 자라도록 신경을 써야 한단다. 엿고명으로는 밀가루처럼 곱게 빻은 생강과 후춧가루 그리고 콩가루와 참깨를 입히기도 하고 또는 참깨를 제피하여 노릇하고 통통하게 살짝 볶아 통째로 묻혀내기도 한다.
축사 한 켠에 낮은 지붕과 굴뚝을 인 커다란 흙화덕이 있는데 거기에 검은 가마솥을 걸어놓고 주인이 장작을 지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엿을 고는데는 불떼기가 중요하단다. 한꺼번에 몽땅 나무를 지펴둔 채 딴전을 부려서는 안 되며 서서히 같은 조시로 세 시간 남짓 엿물을 곱는다. 시간을 재 넘기면 엿맛이 딱딱하고 싼맛이 나게 된다. 엿을 고는 시간의 양에 따라 다른 이름의 문건이 생기는데 한 시간 남짓 고아서 맑은 꿀 같은 엿물을 떠낸 것이 조청이요, 두어 시간 고아서 그대로 차게 식힌 것이 호박 빛의 투명한 개엿이다. 개엿은 자반음식을 만들 때 재료로 쓰며 때로 한약재를 달일 때 넣어 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세 시간 가량 고아서 뜨거울 때 바람을 일궈 넣으며 연하게 부풀려 만든 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엿이다. 이곳의 엿모양은 밥톨만한 마름모꼴이다.
엿가마솥을 둘러싸고 서서 나무수저 끝에 엿물을 떠서 찬 바가지 물에 식혀 끈적쫄깃한 개엿을 만들어 먹느라 입수선을 떠는데, 마루 끝 햇볕 쪽에서 누군가가 '엿 먹어라'하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일행 모두 돌아보다가 하하 낄낄 웃음보를 터뜨렸다. 쟁반 가득 주인 아낙이 맛보기 엿을 내놓은 것이다. 복잡한 일손을 들여가며 힘들게 만드는 귀한 무공해음식 엿도 어느 코미디에서부턴가 '엿 먹어라'하는 달갑잖은 비어로 전락했다.

사라져가는 전통맛이 이뿐이랴.
용산엿에 대하여 몇 가지 기억이 있다. 30여 년 전, 방학 때면 서울 나들이를 가끔 하였는데 교통편은 거의가 기차이용이었다. 그 열차 안에는 늘 엿판을 목에 건 아저씨가 지나다녔다. '용산엿이요.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찹쌀엿, 용산엿 사려'하고 구성지게 가락을 뽑아댔다. 또 추석이나 설날에는 조부께서 함열 지방까지 소작인을 거느리고 계신 연고로 그쪽의 소작인들이 대나무 설짝에 용산엿을 담아 보내오곤 했다. 그때로는 엿이 흔한 간식이었지만, 이 용산엿은 어쩌다 어른들의 밑자리에서 얻어먹는 참 특별한 간식이었다.
찰칵찰칵 가위질소리만 나면 빈 병이나 헌 고무신짝을 들고 나가 엿을 바꿔 먹었다. 수레 엿장수는 오색 물들인 방석만한 엿판을 가지고 다니며 돈냥에 맞춰 한쪽 가위날이 엿판에 대고 다른 쪽 가위로 탁 쳐서 엿조각을 떼어 주는데 이게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엿의 양많고 적어지는 것이다. 그뿐이랴. 사내동생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손가락엿으로 엿치기하던 재미 또한 별났다. 가볍고 맑은 것으로 골라 한번에 뚝 부러뜨린 후 입바람을 훅훅 불어넣어 끊어진 부분의 엿구멍새가 큰 쪽이 승자가 되는 놀이였다. 큰 쪽은 승리자가 먹고 작은 쪽은 진자가 먹으며 참 즐겁고 따뜻하게 지냈다.
현대판의 카라멜에 밀려 찾는 이도 적어졌겠지만 손가는 것에 비해 수입이 적기 때문인지 1890년대부의 역사를 가진 이 고장 풍물 용산엿도 겨우 두 집에서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사라져 가는 전통의 맛이 이뿐이랴. 간식까지 챙겨든 백제기행 일행은 옹포를 향했다. 가을이면 물살과 노을에 아롱져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옹포의 갈대숲은 이 겨울에도 서걱 이고 있는데 다문다문 그 하늘 위로 겨울철새가 떼 지어 날고 있었다. 금강줄기를 사이하고 검은 자갈돌을 던져 놓은 것처럼 수많은 겨울새가 서식하고 있었다. 철새 도래지라면 낙동강포구만 알고 있었지 내 고향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는 걸 깜깜 모르고 있었다니.
어느새 노을빛에 젖은 강물과 들녘. 낮은 산등성이를 끼고 철새는 열을 지어 나는데 우리는 그저 묵묵히 먼 하늘을 바라다 볼 뿐이었다. 우리의 하행길을 인도하듯 남녘으로 나른다.
지친 듯 돌아오는 차안에서 조용해진 아이들을 둘러보며, 나보다는 내 아이에게, 어른들보다는 동행한 어린이들에게 오래 남는 고향의 맛이고 고향의 이야기이고 고향의 모습이 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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