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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 | 연재 [문화저널]
향토작가의 향토장편서리친 돌계단에도 온기가
우한용 소설가, 전북대 교수(2003-09-08 11:37:41)

부산에서 올라왔던 친구 정남형을 어정쩡히 돌려보낸 후, 그는 한 주일 내내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사무실에서도 그랬고 집에 돌아와서도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콩콩 내려앉을 것처럼 동계가 왔다. 기분까지 잡쳐 지냈다.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었다. 사십에 장가를 들었고, 삼년이 지나 겨우 딸을 하나 낳은 그였다. 만일 입이 삐뚜름하게 돌아간다든지 영치에 마비가 와서 엉금거리고 다닌다면 그 탓이 온통 자기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
그렇게 마음을 조이고 있는데 서예가 지송이 찾아왔다. 그것도 큼직한 족자 한 폭을 들고 와서는 받으라는 것이었다. 지송을 알고 지낸 적이 없는 터여서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존함은 들었습니다. 제가 감히 그런 작품을...." 
"객사에서 자고 간 친구 부탁이 요낙관을 만들어 보냈습디다."
정남형이 전주에 놀러오겠다고 했을 때, 그는 일찌감치 여관을 잡아놓은 다음에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런데 정남형은 그게 아니었다. 친구네 집을 두고 왜 여관에를 가자느냐며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니는 전주놈이 아닌기라."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적어도 전주에 십년 가까이 살아온 그였다. 전주 알만한 데는 대충 안다고 자부했고, 어디 가서도 전주 인심이 순후하고 그윽하다는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곤 하던 그였다.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의 일갈이라니, 워낙 고집이 센 친구라 더 붙들고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술부터 한잔 하고 거나해지면 여관으로 몰아넣는 게 최상책이지 싶었다.
객사 앞을 지날 때였다. 그의 두어 걸음 앞에서 구부정하니 걸어가던 정남형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객사를 멀거니 바라보며 발을 뗄 줄을 몰랐다. 그는 객사에 취해 있는 정남형에게 자기가 아는 대로 객사에 대한이야기를 했다. 그가 얘기한 객사라야 전주 관아에 일이 있어 올라오는 지방 관리들이 머물던 해원 정도였다. 객사에 대한 이야기랄 것도 없었다. 작은 안내판이라도 서 있으면 그보다는 자세할 것이었다. 사실 그는 객사에 걸려있는 거대한 현판을 제대로 읽을 줄을 몰랐다. OO之館이라는 것은 읽을 수 있는데 앞의 두 글자는 누가 썼는지 어지간히도 휘둘러 썼다는 그런 식이었다.
"풍-패-지-관-, 억수로 거슬러 올라갔고마"
객사 건물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남정형은 그렇게 목소리를 빼어 옮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제서야 몇 차례 들은 듯한 느낌이 왔다. 그는 남정형의 뒤를 따라가며 풍패지관을 몇 차례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듯한 울림이 울려나왔다. 무슨무슨 관이라면 여관이나 고급스런 음식점이 연상되는데 풍패란 말은 그 뜻이 짐작도 안갔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조금은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관이면 어떻고 기생집이었으면 무슨 상관이랴, 또 풍패면 어떻고 패풍이면 전주 구석 어디가 달라질 것인가 하는 셈으로 카페에 가서 실컷 퍼마셨다. 카드로 긋는 데는 이골이 난 그였다. 외상이라면 암소도 잡아먹는다는 격으로, 마누라 몰래 그어 놨다가 눈먼 돈이라도 생기면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처음 발령을 받아 왔을 때, 부장이 힘주어 한 말 중에는 전주에서 인심 믿고 외상 재미 들렸다가는 코다친다는 것이었다. 카드는 현금이지 않은가. 그 편리한 카드까지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싶었다.
"술도 한잔 했으니 여관에 가서 뜨뜻하게 자라구." 
"객사 안 좋더나."
"객사에서 얼어 죽으려구 작정을 한게로군"
"그라몬 오늘 형수 젖빨면서 잘끼다. 말리지 말그레이."
"미친 소리 작작하라구. 괜시리 전주에 와서 몰매 맞지 말구." 
남정형은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에라도 가는 것처럼 홀을 빠져나갔다. 그는 혼자 훌쩍거리면서, 제깟 놈이 소설을 썼으면 썼지 어디 가서나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인가 고까운 생각이 들었다. 금방 들어올 줄로 알았던 정남형은 한시간이 다 되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는 점점 불쾌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친구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주의니까 집에 들어가 마누라에게 주접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정이 지나고 카페아가씨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안달이었다. 그는 일단 여관에 가서 정남형을 기다리기로 하고 카페를 나왔다.
정남형은 여관에도 와 있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혹시 전주에 사귀던 여자라도 있는 것인가. 기분이 상해 부산으로 도로 내려간 것인가. 여관 주인에게 그 꺼벙한 친구가 늦게라도 돌아오면 방을 열어 주라 해 놓고는 집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그 나이에 어디 한데 잠이야 잘라구. 마음을 느긋하게 하려면 할수록 속이 졸피고 불길한 공상이 꼬리를 물었다.
어지러운 꿈으로 잠을 설쳤다. 일어나자마자 여관으로 전화를 했다. 안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혹시 콩나물 해장국집에 가 앉아서 모주를 마시는 것인가 해서 그는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왔다.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났지만 길가 마른 풀섶에는 서리가 허옇게 덮여 있었다. 코끝이 알알할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다. 한데 잠을 자다가는 얼어 죽기 꼭 알맞은 그런 날씨였다.
그는 여관, 해장국집, 근처의 다방 가볼만한 데는 다들러 보았다. 그러나 정남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부산으로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말았다. 혹시 어떤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객사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햇발이 벌기 시작했다. 객사 지붕위의 서리가 녹기 시작하면서 새까만 기와골이 반지르르한 윤기를 내고 있었다. 그 지붕 밑에 패기 있게 휘갈겨 쓴 현판이 눈 시리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豊沛之館!
객사 댓돌 위에 얼어 죽은 송장 같은 것이 길쭉하게 뻗쳐 있었다. 그는 등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면서 객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틀림없는 정남형이었다. 넓은 천지 죽을 데가 없어서, 부산서 전주까지 기어 올라와 얼어 죽을 게 뭐란 말인가. 그는 일단 달려들었다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정남형은 묘하게도 백담이라는 호를 쓰고 있었다.  
"어이, 백담, 어이 백담!"
송장처럼 누워 있던 정남형이 몸을 뒤쳐 팔을 고쳐 베고 누었다. 그는 잔뜩 긴장했던 것을 풀고 숨부터 후유 내쉬었다. 웃저고리 틈바귀로 한지를 접은 것이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일어나라구, 전주에 와서 얼어 죽으려고 그래?" 
그는 정남형의 몸뚱이를 마구 굴리듯이 흔들어댔다.  
"지금 몇 시가 더 잘란다. 바쁘면 가뿌리그라, 그마."
또 몸을 뒤쳐 돌아눕는 바람에 한지 접은 것이 빠져나와 층계를 미끄러졌다. 그는 그것을 집어 펴 보았다. 웅건한 힘이 솟아나면서도 운필이 춘란처럼 곱게 다듬어져 거칠지 않은 필치였다.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정신 나간 친구 같으니, 이런 것은 도대체 어디 가서 얻어온 것인가.
"일어나, 여기가 어디라구 잠을 자는 거야?"
"어디긴 어디고, 객사지. 잠자락하는 데가 객사 아이가."
정남형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코까지 가볍게 골면서 깊은 잠으로 떨어져 들어갔다. 그는 정남형의 옆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출근시간인데도 그렇게 부산스럽거나 서두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요즈음처럼 팽팽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저렇게 느긋한 것은 가장이나 위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전주에 와서 부산 친구한테 곤욕을 치루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따져 보아도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맥락이었다.
그가 한참 속을 끓이고 있는데 정남형이 부시시 일어났다. 목젖이 다드러나보이도록 입을 한껏 벌려 하품을 해 재켰다. 잘 갔으니 이제 슬슬 아·침이나 먹고 산보를 나서려는 그러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남달리 기행을 하고 다닌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니 이해가 되는 터이지만 그렇게 느긋한 정남형은 본적이 없었다.
"뭘 믿고 남의 동네에 와서 이래?"
"전주 객사는 돌층계까지 뜨뜻하더라카이." 
돈 들여 잡아주는 여관 마다하고 한데 잠을 잔 친구의 얘기라, 그야말로 문학적인 말장난 같이만 여겨졌다. 웃기는 소리 말라 하고는 객사 돌바닥이 뜨뭇하면 더 자라고 내질러 주고는 곧장 출근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는 연락이 없었다.
서예가 지송(j職)은 그의 사무실을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
"송무백열이라구, 구순구순 살아야제."
"예, 혜분난비란 말도 기억합니다."
"암마 그러제. 이제 전주 사람이 다됐고마."
객사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널찍한 바탕의 기와골이 사람을 푸근히 감싸는 듯했다. 거기 걸린 현판을-혹시 저양반이 쓴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정남형이 부산으로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비로소 정남형이 그날 밤지송이라는 이를 만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전주,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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