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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4 | 연재 [특별기획]
전북의 실학자 연재를 시작하며
하우봉 한국사, 전북대 교수(2003-09-08 17:09:17)

1. 실학의 개념
우선 '실학'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쓰여져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간단한 개념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본래 '실학'이란 용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유교문화권의 국가에서 통시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 실학은 일반적으로 '실정·실용·실증의 학문'으로 '허학'에 대응하는 일종의 정신적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여말선초에는 불교나 도교에 대응하여 유학을 실학이라 하였고, 때로는 유학 내에서도 사장학에 대해 성리학을 자칭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서는 초현실적 관념주의로 빠져들어가던 당시의 성리학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을 주창하면서 실학을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실학이란 한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경향이 말폐화하거나 공허해지는 현상에 대하여 그것의 극복을 위한 대안제도로서의 학풍이나 사상체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실학을 이와 같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의할 경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용어가 될 수는 없다. 즉 조선후기의 실학이 지니는 역사적 기능과 특성이 희석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에서 말하는 역사적인 용어로서의 실학은 조선후기라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형성 발전된 사상체계 내지 학풍을 가리킨다. 이 경우 실학은 양란 후의 민족적 반성과 17,8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주자학의 초현실적 관념론에서 탈피하여 강렬한 현실비판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개혁의식으로 충만해 있다. 또 학문의 대상으로는 철학뿐만 아니라 경제를 비롯한 사회정책론, 역사·지리·언어학을 중심으로 한 국학, 자연과학, 농학 등을 포괄하는 백과전서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본란에서도 물론 이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 조선후기의 사상하면 실학을 떠올리지만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이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여전히 정통성리학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학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학사상은 실학자들이 제창한 사회개혁론이 바로 정책화되지 못하였다는 점, 동시에 대중들에게 일반화되어 밑으로부터의 개혁(혁명)을 추진하는 기능도 충분히 하지 못하였다는 점 등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학은 그것이 가지는 근대지향성과 민족지향성으로 하여 후대에 올수록 더욱 평가를 받았고 개화사상으로 그 정신이 계승됨으로써 질적인 면 내지 방향성 면에서 조선후기 사상사의 주류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 조선시대의 전라도
전북지방의 실학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 지역이 가진 제 조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사상이라는 것도 당연히 사회경제적 조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서거나 혹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지적 고민의 산물이 바로 사상인 것이다. 전북의 실학은 당연히 조선후기 사회에서 전북이 처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 속에 배태된 것이고, 그러한 특징을 자연히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전라도 혹은 전북지역이 지니고 있었던 당시의 제 조건은 어떠하였을까?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마한시대와 백제초기에는 가야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백제가 남하하면서 백제후기에 이르러 백제문화권의 본류에 합류하게 되었고, 후백제시대에 이르러 견훤이 전주에 도읍지를 정하면서 핵심지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후삼국시대를 고려 태고 왕건이 통일한 후 왕건은 신라에 대해서는 화해정책을 취한 반면, 후백제 세력과는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고전한 끝에 배척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의 사람은 배역의 기운이 있으니 등용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의 사람들은 고려시대 전반을 통해 중앙의 핵심적인 자리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그러한 결정적인 배척사유는 없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 전주였던 관계로 하여 상당히 활발한 진출을 하였다. 세종대 18년간 영의정을 지내면서 세종대의 정치를 이끌어간 황회가 장수인이고, 세조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양성지도 남원인이었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래 벌영정치가 시작되면서 지배계층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선조 22년(1589) 중요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여립의 난'이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역모자체의 사실여부와는 별도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호남지방은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난의 주모자인 정여립은 호남의 수도인 전주 출신이었고, 대동계에 소속되어 있었던 인물들 중에는 호남지역의 사람이 많았다. 이 역모사건으로 1,000여명이 죽거나 귀양 가는 등 숙청당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호남인이었다고 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호남을 '반역한'으로 지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쟁의 가열화에 따른 지배계층의 배타적 독점화 경향은 조선전기 함경도 평안도인에 대한 차별에 이어 호남인에 대해서도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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