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6.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일상과 범죄의 경계를 지워내는 절대 권력의 가부장
<클랜>
김경태(2016-06-16 14:46:55)




198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군사 정권의 독재가 종식하고 민주 정부가 출범하는 격동의 시기가 '푸치오' 일가족이 연루된 희대의 범죄와 맞물린다. 가장인 '아르키메데스'와 그의 아내이자 교사인 '에피파냐'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있다. 애초에 아르키메데스는 군부의 청탁을 받아 반정부적 인사나 민간인들을 납치하고 감금하며 심지어 살해하는 범죄 집단의 수장이었다. 이제 그 동일한 행위는 부유층의 돈을 뜯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온 가족의 암묵적인 동참 속에서 반복된다.


푸치오 일가는 서로를 살갑게 대하는 화목한 여느 가족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행복은 가부장의 규범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는 조건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 가족은 깊이 곪아 있는 상처를 가린 채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반민주적인 대통령의 나라와 닮아 있다. 국가가 저지른 거대한 범죄는 가족의 일상 속으로 슬그머니 스며들어왔다. 범죄에 익숙해지고 둔감해져버린 푸치오 가족은 독재 국가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다. 정치적 관계의 그릇된 양상이 친밀한 관계와 뒤얽혀버리면서 가부장을 향한 복종과 충성의 맹세는 더욱 강화된다.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그릇된 감정의 구조가 가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가부장 중심의 억압적인 사회를 작동시키는 정서적인 원리로서, 공적인 정치에서부터 내밀한 가정까지 만연해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다.

에르키메데스는 자신의 가족을 위한 것이라며 그의 모든 범죄 행위를 정당화한다. 촉망받는 럭비 선수인 장남 '알렉스'는 그렇게 설득당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의 범행을 돕고, 부당하게 취득한 거액을 나눠 갖는다. 사실 가족들이 눈앞에 펼쳐진 범죄에 협조하고 그것을 은닉하는 행동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에 대한 죄책감의 결여라는 감정적 층위에서 발생한다. 가부장의 진정으로 강력한 힘은 가족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그 불법 행위에 뒤따르는 그들의 두렵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태도에서 발휘된다. 가부장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범죄에 대한 가족들의 감각을 마비시켜버린다.

감독은 범죄가 가족의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는 비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하는데 주력한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와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는 다정한 남편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시퀀스는 각자의 평온한 오후를 보내는 자식들을 지나, 마침내 욕조 안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남자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카메라는 아르키메데스를 따라가며 이 일련의 장면들을 롱테이크로 담아내면서, 일상 공간과 범죄 공간의 경계를 담담하게 지워낸다. 또한 감독은 아르키메데스가 감금된 이에게 자필 편지를 강요하는 장면과 알렉스가 애인과 자동차에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유괴된 자의 울음 섞인 신음 소리와 섹스의 교성은 조금씩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일순간 섬뜩하게 뭉뚱그려진다.  


끝내 아버지와 함께 경찰에 붙잡힌 알렉스는 그제야 자신의 삶을 망친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뉘우치는 기색 없이 범죄를 무마할 궁리만 한다. 이제 그는 그 강력한 가부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안을 강구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줬지만 그 아버지가 망쳐버린 삶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다. 재판 날, 알렉스는 수갑을 찬 채 경찰의 통제 하에 법원 복도를 걷는다.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서 뒤따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끔 본 뒤, 경찰을 밀쳐 내고 재빨리 난간 위에 올라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5층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의 자살 시도는 속죄의 몸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이 납치하고 살해한 사람들의 가족이 느꼈을 그 끔찍한 상실의 고통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되돌려주는 의도일지 모른다. 가족, 그리고 국가는 무감각했던 그 타인의 고통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