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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 | 연재 [읽고 싶은 이 책]
질척질척 버무려진 시집 한 권
복효근 『운동장 편지』
(2016-06-16 14:54:27)




'운동장 편지'
시집의 제목이 불순하다.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재밌는 얘깃거리들을 숨겨놓고 범생이나(표준어는 아니지만 이 시집에서는 모범생이라는 표현보다는 더 어울릴 듯하다) 좋아할 법한 서정적 느낌이 가득한 그런 제목을 붙여 놓다니!
그랬다. 이왕 까발리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청소년 시집이 많은 주목을 받으며 나오고 있다. 시인들이 쓴 시집뿐만이 아니라 청소년 본인들이 쓴 시집들도 꽤 된다. 이러한 시집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들.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정말 청소년들이 이 정도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들이었다.
그리고 '운동장 편지'를 만났다. 이 편지 속에는 '가난'과 '닫힘', 그리고 '성'이 들어 있었다.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쉽게 죽음을 연상하고 마는 청소년들의 '닫힘'이라는 느낌이었다. 또한 요즘 출판되고 있는 대부분의 청소년 도서가 이런 슬픔을 마치 의무인 것처럼 담아내고 있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더 큰 슬픔의 덩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시인들은 지금 기성세대가 무엇인가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경고장을 시집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 고, 싶, 어, 진, 다.
(...)/ 우리 학교 하늘에도 새가 날고/이렇게 많은 바람이 와서 /놀고 가는 줄을 처음 알았다./(...)/ 내 안에서는 꿈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괜히 살,고,싶,어,졌다.                          

수록된 시 '열 여섯 야외 수업'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시를 거꾸로 읽어 보았다. 왜 살고 싶어졌을까? '괜히', 괜히 살고 싶어졌단다. '내 안에 꿈같은 것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리움 같이 살고 있고, 5월의 구름과 햇살, 새가 날고 바람이 놀고 가는 하늘.'을 보았다.
이것이 살고 싶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장소가 바로 '학교 운동장'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학교는 그렇다면 '살고 싶지 않았던 곳'이 되는 것일까? 어디에나 있는 하늘과 구름과 햇살과 새일 텐데, 그것을 학교에서 보니 살고 싶어지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정도의 풍경만으로 지금 청소년들은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실 속에, 학교 속에 가두어 두고 하늘 한 번 쳐다볼 틈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2008년, 한국 교육을 한마디로 정의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한국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에 15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알보 보면 시방 나 효도하고 있어예
그렇다고 이 시집이 이런 우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효도',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의 시에서 보여 지는 청소년들의 당당함과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읽다보면 청소년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여질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다.

'내가 춤 안 추고 울었으면 좋겠어예?/ 내가 도둑질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예?/창문을 모조리 다 뿌사 불면 좋겠어예?/알고 보면 시방 나 효도하고 있어예./ 안 그래예?'

 춤을 좋아하는 아이, 그래서 언제나 춤만 추고 싶은 아이. 하지만 춤만 춘다는 이유로 아버지(이 시에서는 '아부지'라고 나온다)로부터 구박만 받는 아이가 어른들에게 한 마디 던지고도 하고, 다음 시에서는 약간의 비아냥거림도 있다.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의 시에서는 우리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선생님들도 한번 논술을 작성해 보시란다.


그거?
맞다. 그거다. 청소년의 '성'과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위행위'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청소년의 자위행위에 대해서 당당하고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시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뿐만 아니다. 한자어 '자위'를 청소년의 은어인 딸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에게 보여 줄 시이면 청소년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이 시집이 언어를 미화시키고, 우아한 말만을 썼다면 흔히 말하는 영혼이 없는 시집이 되지 않았을까? 
십대면 누구나 홍역처럼 치르는 짝사랑, 그 짝사랑에 각도를 넣었다. 콧날의 각도 35도. 정면으로는 부끄러워 바라보지 못하는, 그래서 옆모습만 바라보는, 그러다 보게 되는 그 아이의 콧날. 그래서 짝사랑의 각도는 35도가 된다. 이 시를 읽은 아이들은 이제 빗금만 봐도, 아니 35라는 숫자만 봐도 짝사랑의 그녀를, 그 남자아이를 떠올릴 것이다. 빗금과 35라는 숫자만으로도 가슴이 덜덜덜 떨릴지도 모른다.
다음 시들 또한 이러한 청소년들의 심리를 '톡' 까놓았다.
'초승달'에서는 '누가 흘리고 갔을까. A컵 뽕브라 한 짝'이라고 툭 치더니
반달에서는 '저 달 보면 무엇이 생각나니?// 소올찍히 말하자면 딱 한 번만 만져 보고 싶은 네 앞가슴' 이라고 능청스럽게 얼굴 하나 빨개 지지 않고 '딱' 받아 친다.
이런 시를 접하게 될 아이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질척질척 버무려진
'운동장 편지'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십대들의 삶이 비빔밥처럼 고슬고슬 하지 못하다.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그 무엇인가에 질척질척 버무려져 있다. 이 때문일까? 시집의 마지막장을 넘기는 순간엔 '툭'하고 긴 호흡을 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직접 독자가 되어 느껴 보는 것이 그 궁금을 해결할 가장 큰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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