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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8 | 문화현장 [문화저널]
<문화가이드>명작속의 역사이야기나폴레옹 대관식쟈크 루이 다비드 작
유휴열·서양화가(2003-12-18 15:07:31)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후, 다비드는 7개월 동안 뤼상브르 궁에 구금 되었다가 몇 년 후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화가 다비드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나폴레옹은 1803년에 영예훈장을수여하고 황제 제일수석화가란 직책을 주었으며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라는 공식 선포는 1804년 5월20일 이루어졌다. 그는 대관식의예를 갖추겠다는 생각으로 4점의 대작을 다비드에게 부탁한 것이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2일 파리의 노틀담대성당에서 거행 되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가장좋은좌석을 주게 하였고 그 좌석은 제단 좌측 윗층에 자리하여 대관식의 여러 진행 절차를 관찰하기에 가장 알맞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대성당의 건축도면과 예식안내장을 갖고 예식과정과 안내장에 기입된 인사들의 이름에 따라 그들의 모든 동작과 자세를 살펴 그렸다 한다.
즉위식은 법을 상징한다 하였고 황제와 황후의 시청 순방은 시민을 상정하고 군기 수여는 군을, 대관식은 군립을 상정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보나파르트에 의해 재의된 4개의 작품 가운데서, 마지막 두 작품만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대관식에 참석하였을 때 다비드는그의 눈아래로 교황, 황제 황후 등 주요한 고위관리들이 있었던 까닭에 뜻하지 않은 상황을 목격하였다.
제단위에는 황제관의 임금의 홀(笏)과 검, 그리고 외관등이 놓여 있었다. 교황은 황제의 이마와 양팔 양손에 성수를 발라주고 나서 검을 채워주고 홀을 손에 쥐어준다음 관을 들고 대관하려 할때 나폴레옹은 관을 교황손에서 빼앗아 자기자신이 직접 써 버렸던 것이다. 그곳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던 이 장면은 결국 나폴레옹 자신의 황제위치는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한 권좌라는 시위를 보인 것이다.
자신이 대관을 한 후 그는 죠세핀(Jo-sephine)에게 가까이 다가가 관을 씌워주었다.
화가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작품 구성은 전경과 그룹별로 참석자들을 그려 맞추었다 한다. 이 작품의 제작기간은 3년이 걸렸으며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삼파니(Champagny)의 주선으로 클뤼니(Cluny)라는 옛 성당에서 제작하게 되었으며 그후에도 그곳에서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나폴레옹 자신이 대관하던 장면이 극적인 사건이었음을 목격한 다비드는 그대로 역사적 순간을 그렸다.
황제는 자신의 모친이 예식을 불참했지만 그림 속에서는 참석케 하였고 또 시종들까지도 그려넣게 하였다. 더욱 중요한 점은 예식을 주례하던 교황 비오7세의 자세 변경이었다. 다비드의 밑그림에 교황의 자세는 양손을 무릎 위에 놓고 방관하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나폴레옹은 이 모습이 못마땅하여 말하기를 「교황이 멀리서 여기까지 온 젓은 가만히 앉아 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이에 다비드는 교황의 자세를 바꾸어 황제 뒤에서 황후 대관을 오른 손으로 강복하는 장면으로 고쳐 놓고 말았다.」
이와 같은 중요한 수정이 있었고 또 많은 어려움을 제작과정에서 거쳐야만 되었다. 작가는 참석자들의 모습을 확실히 알기 위하여 고위관리 및 귀부인들을 각기 대면해야만 하였고 또한 예복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되었다. 따라서 예복을 빌려모델에게 걸치게 하는 번거로움을 치뤄야만 하였다.
1805년 2월에 우선 교황의 모습을 그렸다하며 1808년에 이 역작은 루브르미술관에 전시 되었는데, 여기에서 황제 나폴레옹의 만족은 대단하였다고 전한다. 이 작품이 유명한이유는크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참고자료로서의 기록적인 데에 있고 하나는 미술적 가치에 있다고 하겠다. 직접 목격한장면으로서의 역사적인 예식과 의례양식이 정확하게 초상화로 묘사되어 한 그림 속에 모여져 있다는 점이다. 후세에 미술사학자들이 이 그림을 두고 초상회화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타난 많은 인사들의 자세와 그용모는그들의 성품과 인격을 알려주고 있다고하며 또한 회화적 가치는묘사력과 관찰, 화면구성 등에 있으며 여기서 다비드의 실력이 높이 명가될 수 있다고 하겠다.
나폴레옹천하에서 다비드의 활약은 위대하였고 또 많은 작품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과 동시에 다비드는 왕정 복구체제하에서 이탈하여 브뤼셀로 망명, 1825년 일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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