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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1 | 문화현장 [문화저널]
지리산과 문학
김은정(2004-01-27 14:06:25)


 지리산을 앞세운 길은 항상 가슴 설레여야 하는가 쏟아지는 봄볕 맑은 날, 제7회 백제기행이 .지리산을 찾던 날도 그 설레임은 예외없이 가슴 벅차게 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소중함에 대한 새로운 인식, 차오르는 감동으로 국도 양옆, 들판을 내다보는 낭만적 감상이 한순간농민들의 긴 한숨으로 되돌아 왔을 때 지리산 기행버스는 어느새 남원시내를 접어들고 있었다. 〈백제기행〉의 지리산행은 처음이 아니다. 작년 7월 제2회 백제기행은 이미 4차로 기획하고 있었던 중에서 첫 번째 주제인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고 지리산을 찾았었고, 그때는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찾아 돌며 산의 밑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있어 지리산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리산의 생생한 역사가 이 시대, 그 산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선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행을 가졌었다. 그리고 1년만에 다시 찾는 지리산 문학 속에 담겨진 지리산의 역사적 의미, 그 비극의 상징을 1박2일의 여정 속에서 얼마만한 부분으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문학적 상상력 속에 용해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감동으로 지리산을 보게 하는 자 이번 기행엔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했다. 그중 상당수가 백제기행은 처음이라 했고, 이번 참가도 기행의 의미보다는 ‘지리산’이라는 장소에 마음이 끌려 쫓아왔다는( ? ) 회원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번 기행이 단순히 박물지적안 지리산의 자연경관을 새겨 넣기 위한 데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우리 역사를 통한 우리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음을 버스 인에서 가진 길지 않은 자기소개 시간으로 붙잡아낼 수 있었다. 문학은 역사탐구이다. 문학으로 오늘의 역사를 감당하며 역사에 우리문학을 올바른 이정표로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참으로 옳다. 그렇다면 「지리산과 문학」을 주제로 한 이번 기행에서도 우련 문학을 통해 역사를 깨우치고, 문학과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얻어내야 하며, 그 역사적 자각으로 또다시 문학으로 실천해내야 할 큰 작업을 일으켜 세워야한다. 오후 5시 30분쯤 기행팀은 하룻밤을 머무를 달궁 〈용궁휴게소〉에 도착했다. 민박을 겸한 이 가게의 주인인 김태곤씨는 4대째 달궁을 지켜온 땅 불이로 우리에게 지리산에서의 삶을 생생한 체험으로 들려주기로 되어있는 연사중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계곡의 물소리, 이미 깊어진 지리산의 여름 속에서 우린 산채나물과 동동주로 행복에 겨운 저녁식사를 했다. 먹을 수 있다는 기쁨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기쁨이, 참으로 감사함으로 와닿는 시간이었다.“지금부터 자유시간합시다. 지리산에 안겨있는데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겠어요? ” 지리산의 빼어난 경관과 자연에의 경이로움에 벌써부터 취해버린 한 회원이 짖꽃게 기행일정을 꼬집었다. 그러나 회원 모두는 그 말이 더 철저한 지리산의 역사학 의미와 더불어 오늘의 주제를 더욱 밀착시켜 다뤄보고자 하는 강조에 다름 아님을 알았다. “집행부 측에서 염려하는 것이기도 한데 지리산에 오면 그것의 주제가 지리산과 문학이든지, 자연환경이든지, 또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언제나 결부되는 것이 6·25뿔이라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만, 설사 그것이 우리 한계라 할지라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죠” 저녁 8시를 즈음해 2층방에 모인 회원들은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조국분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사회를 맡은 이병천씨는 자연스럽게 〈지리산과 문학〉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 분단세대들이 이곳 지리산에 6·25의 민족적 비극을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더욱이 6·25의 시간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민족의 비극적 벽리는 더욱 처참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절감해야하는 고통이 이 세대에서 마감될 수 있는 희망조차 불투명한 시점에선 더욱 그렇지 않은가 처음부터 ‘분단’의 의미에 깊게 고착되었던 토론 분위기는 쉽게 풀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개개인마다 인식하고 있는 남북한 분단의 골은 너무도 깊었고, 그것은 개인적 의식의 편차에 따라 이념상의 문제로, 흑백의 논리규정처럼 집착돼있어‘민족동질성 회복’이 이 세대에서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절감케 했다.
“지리산이 우리민족 문학사에서 전면적으로 떠오른 시기는6·25입니다. 물론 50년대에선 그것이 파묻혀 있었지만 50년대 말부터 서서히 지리산을 형상화하는 문학작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특히 박영준이란 소설가가 52년 〈빨치산〉이란 단편을 발표하면서 우리 현대문학 속에서 지리산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빨치산〉은 역시 전향한 사람이면서 회의주의자인 혹은 허무주의자가 주인공입니다. 젊은 시절의 치기로 지리산에 갔다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돌아왔다고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차범석의 〈산불〉이나 반공법으로 구속 지리산과 연관된 최초의 필화사건인 구상의 회곡 〈수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상의 〈수치〉는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는데 내용 자체는 지극히 반공적이고 회의하는 것인데도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는 딱 한 장면이 나오는 이유로 구상 시인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입니다.”이번 기행에 초청된 젊은 소설이 정도상씨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정확한 현실에 대한 검증없이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지도 않고 개념 정리하는 데에 강한 비판의식을 보였다. 지리산을 형상화한 문학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첨예하고 분명한 논리의 문학관을 정리해냈던 그는 이 시대의 젊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가슴 뜨겁게 안고있는 분단민족의 젊은 세대로써 우리 모두에게 운동가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실록이나 수기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55년 김석영의 〈지리산야화〉, 나인주의 〈누가 반역자냐〉, 검영필의 〈등불을 찾아서〉 동의 수기들은 남녀 상열지사가 중심적 고리로 등장하는데 비트나 동굴속에서 남녀간에 난잡한 정사를 한다거나, 여성전사와 사량을 하는데 고위간부가 그 여성을 윤간한다는 등 성관계 중심으로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왜곡시켜나가는 내용들입니다. 60년대 중반, 또 하나의 수기가 팔로군 출신의 인민군대 좌가 쓴 「나는 남침의 선봉장이었다」는 작품이 나오고, 그 뒤를 이어〈남부군〉에 나오는 김영이란 시인이 65년 신동아 논픽션에 〈벽과 인간〉이라는 수기가 당선되는데 이때부터 수기의 질이 높아지는, 조금이나마 진실에 접근해 가려는 노력들을 보였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70년대에는 박경리가 쓴 〈시장과전장〉, 김원일의 〈노을〉, 〈미망〉, 오찬식의 〈마뜰〉, 재일작가 김석범의〈화산도〉 〈까마귀의 죽음〉이 등장한다. 정씨는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같은 경우 중심적 인물 등이 방황하는 지식인들이었고 검원일의 소설에서 드디어 민중이 동장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지리산의 참된 모습을 밝혀내기에는, 그리고 산자락 속에서 피땀 흘리고 죽어간 사람들의 진실을 밝히기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고 평가했다. “4 ·3을 주제로 한 <순이삼촌>이나 〈한라산〉 등이 이어 나오는데, 오히려 소설쪽보다는 시쪽에서 우리 한국전쟁에 대한 전면적 문제해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시쪽에서 이산하의 〈한라산〉은4 ·3 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우리 민족사의 은폐된 진실을 꼬집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시도 발전하면서 김영수씨가 쓴 〈지리산〉이란 서사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대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입니다.”정씨는 지리산을 다룬 문학작품을 이야기할 때 전제되는 몇 가지 평가 기준을 주관적 견해로 정리했다. 그것은 첫번째, 역사적 전형성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이 우리 변혁운동에 어느 정도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 세 번째로-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주체가 민중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네번째로 기록적 형상화가 잘돼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 등이었다. 이 기준을 바탕으로 정씨는 이병주의 〈지리산〉이 일제시대 때 학병을 거부하고 들어갔던 사람들과 함께 지리산의 역사성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등장인물이 비관적 인물이거나 철저한 회의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지리산의 참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라고 명가했다. 그는 지리산의 〈박태영〉이나 〈하준규〉가 방황하는 지식인으로서 전향하게 되는 사람들이 중심인물이기 때문에 지리산의 진실파는 한계가 있고, 많은 우려를 갖게 한다고 말했다. 핵문제를 다룬 〈겨울꽃〉을 비롯 〈친구는3 멀리 갔어도〉 등의 작품을 통해 현실문제에 강한 주제의식을 밀착시킨 젊은 소설이 정도상에게 〈지리산〉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심어주는 작품으로 해석돼 있었다. 또 그는 〈지리산〉이 머지않아TV드라마로 제작, 방송된다는 사실과 반공이데올로기관점에서 쓰여진 작품과의 상관성을( ? ) 통해 이 시대의 언론의 한계, 그리고 민중운동이 지닌 역량의 한계라는 명가까지 여지없이 들춰냈다. 그는 베스트셀러로 부각된 〈남부군〉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적 안목을 제시했다. 〈남부군〉이 적어도 지리산 빨치산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것이 사실이지만 엄밀히 보자면 작자 자신이 과연 〈남부군〉 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부정적이다고 밝힌 그는 빨치산이라 불리는 지리산유격대, 즉 투쟁주체와〈이태〉라는 기록자주체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의견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는 적어도 빨치산 〈납부군〉을 기록하는 주체는 적어도 전향은 했지만 오랜동안 징역을 살았거나 비전향해서 아직도 청송감 호소에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가 주체가 되어야하는가’하는 문제는 이 시대가 바로 잡아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 주체들의 왜곡된 자리잡음으로 우리 역사는 얼마나 뒤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당대의 진실에 가깝게 가기 위해선〉, 진정한 주체를 찾아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이 대답을 확인하는 거듭된 노력의 시도로 〈백제기행〉을 꾸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리산을 형상화한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객관적 현실이 진실에 얼마만큼 접근해 있는가, 지리산의 실체, 즉 지리산이 민족해방운동의 측면에서 주효하게 떠맡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에 대해 얼마만큼 천착해 들어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깊이 인식해 봐야할 문제로 다가왔다. 결국 지리산은 반공교육의 현장으로 오늘에 보여지고 있고 대부분의 문학작품들도 반공의 연장선상에서 쓰여지고 있다면 오늘의 지리산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보게 하는가 4대째 달궁의 땅붙이로 살아온 김태곤씨의 생생한 체험은 여기에 대한 대답에 다름 아니었다. 6·25이후 이 마을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고난과 그 비극이, 분단의 의미7h 또는 이념의 대립이 수십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이 민족의 모습을 얼마나 처참하게 찢어 놓았는가를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때론 숨죽여가며 들려주었고, 대부분이 6·25이후 세대들인 회원들은 민족적 비극을 가슴아픈 상상력으로 떠올려야 했다. 이튿날 여정은 산행이었다. 술잔기울이며, 토론으로 꼬박 밤을 세웠던 회원들은 지리산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주저없이 일어서야 했으며 정령치~만복대~성삼재에 이르는 고되지 않은 산행으로 지리산의 한켠이라도 바로 보고자했다.
철쭉꽃 만발한 만복대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자락들, 농선과 농선, 골짜기들, 저 험준한 봉우리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승리도 패배도 없이 처참한 민족적 비극을 몰고온 6·25의 분단은 이 시대, 이 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안겨져 있는가 문학은, 역사는 지리산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번 기행에서 이 물음들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얻지 못했다. 그런 막연한 기대는 실상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문학은 역사탐구이며, 따라서 오늘의 문학은 올바른 이정표로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인식을 확인했고, 그것만으로도 기행의 소중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을 뿐이다. 문학은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분단문학은 새로운 도엘 시도해야 하며, 그리하여 〈지리산〉을 우린 꼭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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