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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 | 기획 [전주 대사습놀이, 위기에서 길을 찾다]
전주대사습이 지켜온 판소리의 역사
최동현(2017-04-28 09:55:02)



『전주대사습사』에 의하면, 대사습은 영조 때를 전후하여 아전들과 한량들에 의해 시작된 판소리 축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사습이 판소리 등용문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가진 하나의 제도로 확립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던 것 같다. 『조선창극사』를 보면, 19세기 초반에 활동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기팔명창들이 대사습에서 활동한 기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기, 그러니까 후기팔명창들이 주로 대사습을 통해서 활동했던 것 같고, 근세 오명창들은 대사습을 어린 나이에 참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증언에 의하면, 송만갑은 머리를 땋고 대사습에 참여하였다고 하며, 김창룡은 아버지인 김정근을 따라서 대사습에 다녔다고 하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고장인 전주에서는 명절이나 잔치 등에서 판소리를 듣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동짓날 팥죽과 음식을 먹고 광대를 초청하여 통인청(通人廳. 통인들이 집무를 보던 곳)에서 판소리를 하고 놀았던 것이 전통이 되어 대사습이 되었다고 한다. 통인은 관청에 딸려 심부름을 하는 노비인데, 대체로 10여 세부터 30여 세까지 재직하였다. 전주에는 관찰사가 근무하는 영문이 있었고, 전주부사가 근무하는 본부가 있었다. 영문에 근무하는 통인을 영문통인이라고 하고, 본부에서 근무하는 통인을 본부통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동짓날에 통인 총회 겸 친목회를 하는데, 이때의 여흥을 위하여 판소리 광대들을 초청하여 판소리를 듣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전주 통인들의 판소리 감식력이 높아서 여기에 출연하는 소리꾼들의 수준이 높았다.
이 때의 대사습은 경연대회가 아니라 순수한 민간 주도의 축제였기 때문에, 상을 따로 준다든지, 등수를 매긴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명창들은 해마다 같은 곳에 초대받아 갈 수 있었다. 본부에 초청받아 가는 광대를 본부광대, 영문에 초청받아 가는 광대를 영문광대라고 하였는데, 본부광대들이 대체로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문 통인들은 동짓날의 잔치뿐만 아니라, 7월 ‘연(宴)날(고종 황제의 생일 축하 행사를 하는 날)'의 행사에 더 주력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판소리가 융성하던 시절 판소리 창자들은 대사습에서 인정을 받아야 명창으로 대접받았으며, 여기서 기량이 출중하다고 인정된 사람들은 중앙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자연히 판소리 광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정창업은 대사습에 나갔다가 소리를 실수하는 바람에 도중에 쫓겨난 후 절치부심하여 나중에 명창이 되었다고 하며, 유공렬은 30세 경에 대사습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세간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대 다른 명창들의 대사습에 관한 이야기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소리만을 다룬 최초의 저서인 <<조선창극사>>에 간략하게나마 전주대사습에 관한 언급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전주대사습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언제부터 대사습의 전통이 끊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조 말 혼란기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5년 마침내 전주대사습이 부활되었다. 전주대사습의 부활은 사멸지경에 이르렀던 판소리에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이 지역 판소리 애호가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대사습을 복원할 때 경연대회 형식을 취한 것은 과거 대사습이 경연대회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본래 대사습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축제 형식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스러져 가는 판소리에 대한 관심을 다시 고조시키고, 실의에 빠진 판소리 창자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경연대회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어느 정도 정확하였다. 그 동안 전주대사습이 누려온 권위가 이를 증명한다. 1983년 전대미문의 종일 중계방송을 문화방송과 제휴하여 실시하게 된 것, 그리고 2회부터 장원에게 대통령상을 시상하기 시작한 것도 판소리 창자나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초기의 희망은 대체로 적중하였다. 물론 중간에 1980년 제6회부터 1983년 제7회까지는 일시적으로 국무총리상으로 상격이 낮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때 대통령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생긴 대회에 다시 나가 대통령상을 받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였으나, 오래 동안 대사습은 판소리 창자의 최고의 등용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으며, 판소리 부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대사습의 권위는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나온다. 전주가 대사습의 고장이었다는 것, 그리고 명창들은 이 대사습을 통해서 자신의 소리 기량을 선보이고 평가받은 후에 활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대사습의 권위를 높여주었다.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은 1975년 대사습이 복원될 당시에는 판소리명창들이 모여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고 경쟁할 만한 제도가 이것 외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대사습은 독점적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초창기 전주대사습의 권위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아예 경쟁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43회째가 된 대사습의 초창기에 출전했던 사람들은 40대가 대부분이었다. 오정숙, 성우향, 성창순, 이일주, 최난수, 최승희 이일주, 김일구, 성준숙, 박계향, 은희진, 김수연, 최영길 등이 40대였고, 남자 명창인 조상현과 조통달은 30대 후반이었다. 여자 명창인 김영자도 36세에 대사습 장원을 차지하였다. 초기 20년 정도는 40대가 대사습 장원자의 대부분이었다. 당시 무형문화재 급에 드는 사람들은 대사습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심사를 맡았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들은 국가에서 이미 그 기량을 인정했기 때문에 경연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방문화재이든, 국가지정문화재이든 일단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들은 심사를 할 뿐 경연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초기 대사습 장원자가 40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 데는 이때쯤이 판소리 명창 소리를 들을 만큼 기량이 원숙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의 예술이 아니다. 판소리는 나이 들어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알 정도가 되어야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만큼의 수련을 해야만 마침내 제대로 할 수 있는 예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늙으면 안 된다. 판소리는 장시간에 걸쳐 노래를 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더 나이가 들면 힘이 달려서 하기 힘든 예술인 것이다.
초창기 대사습 장원자들의 소리 기량은 이들이 대부분 이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리꾼이 되어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의 경우에는 대사습에서 장원을 하면 쉽게 지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일주, 최난수, 최승희, 성준숙, 이순단, 왕기석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또 초창기 대사습 장원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독자적인 소리로 많은 제자를 두어 독자적인 계보를 이룩하였다.
후기 대사습 장원자는 30대가 대부분이다. 조영자, 전인삼, 윤진철, 모보경, 박영순, 허은선, 조정희, 강경아, 조희정, 김나영, 정수인 김도현 등이 그들이다. 장문희는 28세에, 염경애는 29세에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물론 간간히 40대와 50대가 장원을 하기도 했다. 이임례(52), 송순섭(55), 주운숙(43), 이순단(51), 왕기철(51), 송재영(42), 왕기석(43), 고향임(49), 김금미(42), 박정선(48) 같은 사람들이다. 일단 일찍이 20대나 30대에 대사습 장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판소리 명창으로 성숙하는 시기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량도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20대에 장원에 올랐던 염경애와 장문희는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출중한 기량의 소유자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일찍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최근 20년 내에 장원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는 자신의 독자적인 계보를 이룰 만큼 많은 제자를 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판소리 세계도 개척하지 못하고 스승한테 배운 소리를 충실하게 따라 부르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대사습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다른 지역에서도 전주대사습을 따라 하게 되었다. 경연대회라는 형식과 방송사와 제휴를 통한 텔레비전 중계방송은 이후 모든 판소리 경연대회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생긴 판소리 대회는 모두 대사습과 똑같은 형태가 되었다. 내용이 같다 보니 대회의 권위는 텔레비전 중계의 유무, 최고상의 상격, 상금에 의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대사습만 텔레비전 중계가 되었으나 점점 중계되는 대회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처음에는 대사습에서만 대통령상을 주었으나, 나중에는 여기저기서 대통령상을 주게 되어, 이제는 한 해에 7-8명이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상금의 액수를 가지고 경쟁을 하는 추세에 있다. 역사와 전통에서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고, 대회 수상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지는 상금이 대회의 권위를 대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상금이 많다고 해서 꼭 판소리 명창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또 한 해에 다수의 대통령상 수상자가 나오고, 상금은 수천만 원에 이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량이 그만큼 향상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량 부족이라는 평을 듣는다. 대회가 많다 보니 대회 주최 측이 대회 참여자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누가 대통령상을 받았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대사습은 이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대사습이 생긴 지도 4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우리 사회 환경은 많이 변하였다. 이제 달라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대사습을 건설해야 한다.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대사습의 불미스런 일들은 과거의 낡은 제도와 관행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명백한 징표 아닌가? 대사습이 진정으로 과거와 같이 우리 판소리를 앞장서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려 하면 변화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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