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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 | 기획 [소극장 고군분투기 ②]
소극장에 전북연극의 역사가 있다
최기우(2017-06-30 15:25:19)

소극장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진 땅이다. 잘 마르고 다져진 땅은 걷기에 좋지만, 그 길에서는 생명이 자라기 어렵다. 땅이 질어야 이삭이 돋고, 꽃이 핀다.
평생 질척질척한 논밭에서 땀을 흘리는 농부처럼, 배우들도 어둡고 좁고 낮은 무대에서 절벅거리고 질퍽거리며 삶을 일군다. 관객은 같은 눈높이에서 그 삶을 지켜보며 숨을 죽인다. 배우들의 떨림을 보고 숨소리를 듣고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 관객의 표정과 몸짓을 세심하게 살피며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곳, 배우와 관객의 진심(眞心)과 진심(盡心)이 더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는 곳…, 소극장은 진심을 틔우는 질고 진 땅이다.


개·폐관의 반복 속에서 정체성을 탐색한 소극장들
소극장은 단순히 규모가 작은 극장을 일컫지 않는다. 이 단어에는 공연장의 넓고 좁은 것만을 기준으로 분류할 수는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 대극장의 상업성을 지양하고,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 20세기 초, 연극의 상업주의를 배격하고, 작은 극장에서 여러 실험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연극을 시도한 ‘소극장운동’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소극장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에 처음 등장했지만, 1931년 극예술연구회가 소극장운동을 벌이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소극장운동이 시작됐으며, 소극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1980년대 이후 실험적인 형식의 공연들이 무대에 올랐다. 소극장은 연극에서 시작됐지만, 무용·오페라 등 다른 공연에도 영향을 미쳤고, 연극이 아닌 다른 장르를 위한 소극장이 생기기도 했다.
전북에서 연극을 전문으로 했던 첫 소극장은 1983년 전주 다가동 어느 건물 지하에 들어선 ‘전북문예소극장’이다. 극단 갈채가 운영한 이곳은 면적 60평, 객석 170석 규모로, <그 여자 사람 잡네>, <홍당무> 등을 올렸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재정 압박이 심해지면서 전북연극협회가 소극장을 인수했다. 협회는 ‘소극장 운영규정’을 제정하고 명칭도 ‘전북연극회관’으로 바꾸는 등 의욕을 높였지만, 만성 적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일 년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문화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소극장은 해마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부분 재정난 때문에 기약 없이 문을 닫았다. 극단 창작극회가 1985년에 개관한 ‘월이(워리)소극장’이 이듬해 폐관된 것도 모두 같은 이유였다.
극단 황토가 1986년 전주 동부시장 근처에 60석 규모로 개관한 ‘황토예술극장’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문을 닫았지만, 소극장 연극과 극장 운영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변방에 우짖는 새>, <칠수와 만수>, <오장군의 발톱>, <자전거> 등 20여 편의 공연을 올렸고, 초·중·고 연극지도교사와 연극동호인을 대상으로 여름연극캠프를 개최했다. 재정의 빈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정 관객을 확보하고, 후원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 소극장 연극의 충실도를 한층 높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는 여러 장르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공간이 늘어나면서 소극장은 다양한 문화의 생산지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택의 <똥바다>, 서울민요연구회의 <어디로 갈거나> 등을 초청한 ‘녹두골’은 진보적인 문화 운동의 현장이었다. 1984년에 문을 연 이후 2년 동안 놀이마당과 풍물강습 등 다채로운 문화 활동을 펼쳤다. 1987년 문을 연 ‘소극장 예루’는 서양음악이 주를 이루는 공간이었고, 매월 시 낭송회를 열었던 문화공간 아사달소극장은 8년 동안 카페연극과 팬터마임 공연으로 차별성을 높였다. 음악을 전문으로 한 바리톤소극장은 1992년부터 200여 회가 넘는 공연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뮤지컬 전문극단인 디딤예술단이 1994년부터 운영한 소극장 ‘무대위의 얼굴’은 <신의 아그네스>,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풍금소리>, <산국>, <X> 등의 공연을 통해 소극장 연극의 활성화를 기했다. 고전음악 감상실인 ‘필하모니’와 커피숍 ‘모던 라이프’, 민촌아트센터, 아트홀오페라, 익산의 뿌리소극장·미다소극장, 군산의 동인아트홀·원우아트홀·갯터소극장, 남원의 둥지아트홀 등도 전북 연극사에 남은 소극장이다.


다채로운 문화운동의 거점 소극장
한국소극장협회에 따르면 전국 소극장 숫자는 191개(2015년 기준)이며, 그중 119개가 서울에 있다. 전북에는 7개의 소극장이 있다. 전주에 소극장 판(99석), 아하아트홀(130석),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204석), 창작소극장(80석), 한옥마을아트홀(80석)이 있고, 군산에 사람세상소극장(70석), 익산에 소극장 아르케(90석)가 있다. 강원도 2개, 경상남도 5개, 전라남도 3개, 제주도 3개, 충청남도 1개, 충청북도 3개와 비교하면 전북 연극의 자존과 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전주의 소극장 중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은 연극전용 소극장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온 창작소극장이다. 1990년 개관한 창작소극장은 만만치 않은 유지비에 꾸준히 작품을 올려야 하는 부담으로 개관 이후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했는데, 창작극회 출신 시립극단 단원들이 매달 월급을 모아 재개관하기도 했다. 1997년 화재로 극장이 다 타버렸을 때는 전북의 문학인과 문화계 인사, 관객들이 모은 성금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소극장 판과 우진문화공간의 예술극장은 기업의 문화 참여라는 메세나 정신에 따라 만들어진 소극장이다. 판은 옥성종합건설이 건물의 공익적인 활용 방안을 고민한 끝에 만들어졌다. 우진문화공간의 예술극장은 기업메세나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꼽힌다. 메세나운동의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던 1991년부터 기업 활동 수익의 일부를 문화예술에 조건 없이 기부해온 우진건설의 메세나 정신으로 설립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소극장이 양적으로 팽창하고 무한경쟁 체제로 돌입하면서 예술성 확립이나 새로운 연극을 위한 실험, 상업주의 연극에 대한 도전 등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만, 소극장이 주는 매력은 여전하다. 소극장은 연극인의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소극장은 무대이며, 연습실이며, 아지트다. 개관과 폐관을 반복한 전북의 소극장들은 다양한 연극 양식을 실험하며 이 땅 연극의 지형을 바꿨다. 무대와 객석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관객의 저변을 확대했다. 또한, 소극장은 연극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학습의 장소였고, 예술경영의 필요성도 부각시킨 공론의 장소이기도 했다.
소극장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전북소극장연극제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 연극제는 시상제도가 없는 축제 형식이기에 공연의 내용과 형식은 자유롭고, 작은 극장 덕분에 관객과의 거리는 한껏 가까워졌다. 연극제의 취지 역시 ‘소재 빈곤과 형식주의에의 경도로 얼룩진 지역 연극의 한계를 예리한 실험정신으로 극복하는 무대 변혁의 장’을 추구하며, ‘연극인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확인하며 나가서 예술성의 탐구를 위해 서로 돕고 아껴주는 화합의 장’이 되고자 했다. 소극장 연극제는 저마다의 빛깔과 소리를 선보이는 연극잔치마당이며, 무대의 유혹에 끼로 뭉친 연극인들의 대화합 마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연극제를 통해 매년 탄탄한 신인 배우들이 탄생했고, 창작 희곡의 저변이 넓어졌다. 무엇보다 공연형식의 다변화를 이뤘으며, 사실주의나 심리주의에 기조를 둔 극에서 부조리극, 다매체 활용 형식의 실험극, 소리극, 음악극, 코미디, 마당극, 아동극, 인형극, 마임극 등 형식의 다양성이 연극제 무대를 채웠다. 이는 두꺼운 관객층 확보로 이어졌다.
전북의 소극장들은 대부분 연극 극단을 모태로 하고 있다. 한때 음악인이나 시인이 운영하거나 음악·무용 등 연극이 아닌 다른 장르를 위한 소극장이 문을 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운영되는 곳은 없다. 그래서 이 땅에서 피고 진 소극장들과 전북의 연극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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