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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 기획 [다시 그리는 선미촌]
모순과 부조화의 공간에서 기억과 성찰의 시간을 갖다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 Ⅱ 여성인권 비엔날레
이동혁(2018-10-31 12:21:08)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 Ⅱ 여성인권 비엔날레'의 오프닝 행사가 펼쳐졌던 시티가든 기억의 공간에는 커다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 공원을 조성할 때 일부러 심은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심겨져 있던 나무라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딸이 태어나면 마당 한편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시집가는 딸에게 가구를 짜주기 위해서다. 그런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이곳 선미촌 여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순과 부조화의 공간 선미촌에서 의미 있는 전시가 열렸다. 성매매집결지 선미촌을 여성 인권 침해의 공간에서 예술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자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기억과 성찰의 공간을 꿈꾸며 마련된 이번 전시. 감추어져 있던 선미촌의 민낯이 바로 거기 있었다.



시가 매입한 선미촌 성매매업소 건물 다섯 곳에서 음울한 홍등 대신 생생한 예술의 등이 밝혀졌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린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다. 9월 13일부터 21일까지 펼쳐진 이번 전시에는 이칸도, 민경박(미디어), 김하진(음악), 장근범(사진), 정하영(설치미술), 최은우(회화), 하태훈(조형), 황수연(가변설치) 등 총 여덟 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활동가들이 도슨트(전문 안내원)를 맡아 그 의미를 더했다.


현장시청 바로 옆에 마련된 전시공간1에서는 장근범, 하태훈 작가의 전시가 진행됐다. 장 작가는 지난해 'M의 연대기'에 이어 올해에는 'W의 연대기'를 준비하고, 같은 상황 남녀의 대비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공포와 불평등, 폭력, 일상 등을 표현했다. 그는 ”남성인 내가 주변 여성들을 만나며 들었던 이야기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고 싶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며,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한 누구에게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의 풍경”이라고 말했다.


하 작가는 실제 성매매업소에서 사용됐던 '돈통' 위에 권총 모양의 머리가 붙은 네 발 짐승을 올려놓음으로써 그 돈통을 관리했을 누군가의 탐욕과 경계심, 야만성 등을 표현했다. 그는 ”선미촌이 존재하던 시점부터 같이 존재했던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라며 '미지 동물 관찰 보고서'에 자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전시공간2에서는 최은우 작가가 건물 전체를 활용해 전시를 펼쳤다. 그는 어두운 복도 안에 작은 빛으로 볼 수 있는 연애, 주사 이모, 만세 등의 흔적(은어)들을 그려 놓고, 관람객들이 그 흔적을 쫓아올 수 있도록 유도하며 공간이 지닌 아픔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다다른 흔적의 끝에서 관람객들은 웃자란 넝쿨이 비치는 창과 마주했다. 작가는 ”열 평 남짓한 방에는 심지어 창문도 없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유조차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며, ”방 안에 걸린 그림은 마치 건물의 창처럼, 이곳을 에워싼 넝쿨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여 준다. 물론 저 창은 실재가 아닌 허구지만,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뻗어 나가는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 번째 전시는 오프닝이 펼쳐졌던 기억의 공간 바로 옆 폐건물에서 이뤄졌다. 'over and over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미디어아트를 선보인 민경박 작가는 공간의 이중성에 초점을 맞추고 시각의 전환을 강조했다. 그는 ”과거 성매매가 이뤄졌던 이곳은 언뜻 남성들의 전유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여성들의 공간이기도 했다”며, ”선미촌이란 공간 역시 좋지 않은 기억을 품고 있는 장소지만, 반대로 착취의 공간에서 성평등과 문화의 다양성, 소수자의 인권을 인정하고 지키는 상징적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네 번째 공간에선 페미니스트 작가 정하영의 전시가 펼쳐졌다. '타인의, 삶'을 주제로 그는 인간의 생명을 초록의 식물에 빗대어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을 드러낸 녹색등의 방과 이름을 잊고 지낸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나아가 연대할 것을 표현한 황색등의 방, 누울 수 없는 해먹을 통해 편히 잠들지 못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 준 적색등의 방 등을 소개했다. 작가는 ”흔히 나의 일은 중요하고 남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타인의 삶이라고 간과할 수 없는 그런 이끌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곧 사회혁신센터가 들어설 마지막 전시공간에서는 이칸도, 황수연 작가의 전시가 진행됐다. 이 작가는 하얀 가면을 모티브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만으로 대상을 쉽게 판단하고 정형화하는 시선과 선입견 문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누군가 나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잠시 스치듯이 본 모습만으로 평가받거나 '내가 아닌 나'로 포장되는 경우가 있다”며, ”단순히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때때로 선입견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그 대상은 누군가, 그리고 '누구나'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길거리에 쓰레기처럼 뿌려지는 전단지를 사용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뒤에 감추어진 어두운 욕망을 표현했다. 생각 없이 받아 들었다가 무심결에 버려지는 전단지처럼 너무나도 쉽게 소비되는 성에 대해 그는 ”성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내 주변의 흔하디 흔한 사람들”이었다며, ”그들에겐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겐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전시공간1, 2, 5에는 김하진 작가의 음악이 배치되기도 했다. 첼로를 위한 독주곡 '잔상(殘傷)에 의한 잔상(殘像)', 해금을 위한 독주곡 '끝나지 않는', '오래된 미래' 등 애절한 선율의 곡이 전시의 몰입도를 높였다.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에는 성구매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성매매의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도 전했다.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오수연 사무국장은 ”성매매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역 작가들과 결합해 보여 주고, 이를 통해 선미촌 주민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연대감을 갖길 바란다”며, ”평소에는 좀처럼 발을 들이기 어려운, 모두가 꺼리는 장소지만, 이러한 전시를 통해 사람들이 선미촌을 찾고, 선미촌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도슨트로 참여한 정은솔 활동가는 ”전에는 이곳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릴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어떻게 전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술을 통해 이렇게 전달할 수도 있는 거구나, 느꼈던 전시”라는 감상도 들려주었다.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모여 지역 예술가들의 교류의 장으로써도 의미 있었다고 말한 장 작가는 ”도시재생의 도구로써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써도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작업실을 뛰쳐나온 용기 있는 작가들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도 응원해 주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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