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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 | 기획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를 키운 튼실한 뿌리, 20년 역사는 허투루 쌓이지 않았다
jiff, 어제와 오늘을 본다
(2019-05-31 15:31:15)

지난 몇 년간 전주국제영화제는 외적 환경에 맞서 영화제 본연의 정신인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왔다. 그것이 비단 말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전주국제영화제가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가 세월호 참사 구조 과정을 담은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감행한 뒤 집행위원장 사퇴 권고, 예산 삭감 등 정치 보복을 당하던 와중에도 전주국제영화제는 당시 정권을 자극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을 제17회 영화제에서 상영했다.
좋은 영화제를 만들기 위한 전주국제영화제의 노력들이 어느새 20년의 깊이를 품게 됐다. 그저 한결같이 더 나은 영화제를 지향해 오며,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다른 '좋다'의 기준, 표현의 자유를 강제하려는 외압 속에서 전주국제영화제가 많은 부침의 세월을 보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매년 정해진 해답은 없었다. 다만 진심과 정성 어린 고민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전주국제영화제의 그 꿋꿋했던 20년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50~60년대 한국영화의 중심지, 전주
지역에서 무슨 국제영화제냐. 최초라 칭해지는 모든 도전들이 그렇듯 전주국제영화제도 첫발을 뗄 땐 비판과 우려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보라. 20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축제로 당당히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매 축제 때마다 수십만 명의 영화 팬들이 찾는 소문난 '맛집'이 됐다.
'대안', '독립', '디지털'을 기치로 내세우고 출발한 전주국제영화제. 하지만 이쯤에서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왜 전주였을까? 다른 도시들보다 유별나게 극장이 많은 것도, 특별히 전주 시민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50~6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찾을 수 있다. 전주 토박이들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시절 화려하게 꽃피었던 영화도시 전주의 모습을.
50~60년대 전주는 명실상부한 한국영화의 중심지였다. 전북 영화인들이 설립한 '우주영화사'는 이미 영화 제작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고, 한국영화사에서 전쟁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리랑>(감독 이강천, 1954), <피아골>(감독 이강천, 1955)이 전주를 비롯한 전북에서 촬영, 제작됐다. 그 밖에도 <애정산맥>(감독 이만흥, 1953), <애수의 남행열차>(감독 강중환, 1963),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 <선화공주>(감독 최성관, 1957)도 전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전쟁 이후 타 도시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전주는 독특한 문화 환경과 당대 내로라하는 영화인들의 도전 속에서 '영화 부흥'을 이뤄 냈고, 전북영화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런 배경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화인들의 활동 무대가 서울로 옮겨졌다는 이유로 전북영화는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이 미미했던 70~90년대를 거치면서 전북영화의 정통성도 함께 매몰되는 듯싶었지만, 바로 지난 2000년 잊혀진 정통성을 복원하고 계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발을 뗀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였다.


특별하고 새로운 기치, 전주국제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다
2000년 4월 8일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서 안성기와 김민의 사회로 두루마기 차림의 김완주 조직위원장이 개막을 선언했다. 기념비적인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시작이었다. 한국영화의 전설 신상옥, 유현목과 임권택, 당시 신예였던 김기덕, 김지운 감독과 최은희, 강수연, 장미희 등 스타들의 입장이 이어졌고, 홍상수 감독의 개막작 <오! 수정>이 상영되는 가운데 시민들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성공을 기원했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도시 전주를 알린 시작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영화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 깊은 축제였다. 초대 프로그래머였던 정성일과 김소영은 '대안영화', '독립영화', '디지털영화'를 내세우고 주류 영화들과는 미학이나 기술 면에서 전혀 다른, 특별하고 새로운 영화들을 선보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디지털의 의미가 무색해지긴 했지만, 두 프로그래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후 대안과 독립의 화두는 전주국제영화제만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됐다.
하지만 방향성이 너무나 뚜렷했던 나머지 그것이 고민으로 다가왔던 시기도 있었다. 주류에 대한 대안 제시를 꿈꾸며 출범한 전주국제영화제였지만, 3회까지는 정체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소수의 영화 마니아로부터는 진지하고 독창적인 영화제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난해하고 불친절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정체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전주국제영화제는 4회째에 이르러 많은 변화들을 겪게 된다. 대안이나 디지털의 개념이 어렵다는 의견에 따라 새롭게 '자유', '독립', '소통'이라는 주제를 설정했고, 집행위원장 체제를 도입하여 당시 동국대학교 민병록 교수를 집행위원장으로 합류시켰다. 그러한 변화의 바람 속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 마니아만을 위한 영화제라는 지적을 수용하고 전주만의 특색이 담긴 거리 행사와 부대 행사를 통해 시민들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영화제 기간도 열흘로 늘려 원활하고 짜임새 있는 운영을 기했으며, 일반 시민들을 끌어들이려는 다양한 노력들 덕분에 이전보다 관객 참여가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듬해에도 눈에 띄는 변화들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두드러진 변화는 메인 섹션의 변화로, 경쟁 부문인 '아시아 독립영화포럼'이 '인디비전'으로 변경됐고, 아시아로 한정돼 있던 독립영화의 저변이 전 세계로 확대됐다. 하지만 이전 해보다 22%나 하락한 객석 점유율, 상영 취소를 비롯한 홍보 전략의 부재, 운영상의 미숙함 등 문제점 역시 많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원활한 운영은 이후 영화제의 과제로 남게 됐다.
부진했던 2004년 성적에 설욕이라도 하듯 6회 영화제 때는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이끌어 냈다. 첫 영화제 때부터 줄곧 따라다닌 마니아만을 위한 영화제라는 수식어로 인해 정체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이때부터 행사 공간을 전부 영화의 거리로 일원화해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간뿐 아니라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대중성을 강화했다. 일반 관객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영화궁전' 프로그램을 새롭게 구성했고, 이전 영화제들보다 '관객과의 대화'를 대폭 늘렸으며, 전문 진행자가 함께하는 '씨네 토크' 역시 일반 관객들이 영화에 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됐다. 그러한 변화에 힘입어 언론에서도 정체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비로소 결실을 맺은 전북영화
영화제가 7년째에 접어든 2006년부터는 전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마니아층은 더욱 확대됐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늘어나게 됐다. '영화보다 낯선' 섹션은 유명 감독의 작품을 선정하고 심도 있는 강연을 마련함으로써 실험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데 큰 일조를 했으며, 전주국제영화제가 1회 때부터 직접 제작하고 배급해 온 '디지털 삼인삼색'도 세계 5대 영화제 중 하나인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청되고 회고전이 마련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영화에 대한 지원도 눈에 띄게 증가하여 독립영화 감독들을 지원하는 '디지털 숏숏숏'이 2007년 신설됐고, 전주에서의 촬영을 유도하는 동시에 전주국제영화제의 생산적 성격도 함께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8회 개막작으로 선정된 한승룡 감독의 <오프로드>는 100% 전라북도에서 제작된 장편영화로, 영화제를 통한 지역영화산업 활성화의 좋은 예시를 제시했다. 그 밖에도 비경쟁 부문이었던 '한국영화의 흐름', '한국단편의 선택'을 부분경쟁 부문으로 전환시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노력하기도 했다.
주류 영화에 익숙해진 시민들에게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은 분명 낯선 것이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지향점 속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차츰 늘어나게 됐다. 특히,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쿠바, 남미 등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제3세계 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들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얻어 전주국제영화제만의 특징 있는 색깔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됐다.


영화 생산의 주체로 우뚝 서다
국제영화제의 본질은 생산된 영화를 소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산업의 생산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서는 일일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도 그러한 흐름에 발맞춰 한국영화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양한 제작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10돌을 맞아 배급 영역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관객들과의 만남을 준비했다. 나아가 2014년에는 더욱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배급을 위해 단편 제작 프로젝트였던 '디지털 숏숏숏'과 '디지털 삼인삼색'을 장편 제작 프로젝트로 통합, 전주국제영화제의 이름으로 작품이 유통, 배급되는 활로를 모색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산업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영화 제작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전주 프로젝트 마켓'도 신설한다. 재능 있는 감독들의 참신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투자자와 업계 관계자들에게 피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우수 아이디어들이 실제 영화 제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든든한 기틀을 마련한다. 신설된 해부터 꾸준히 관심을 받기 시작해 6회째에 이르러서는 235개 영화 관계사, 841명이 참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토론토 릴 아시안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 영화상을 수상한 박찬경 감독의 <만신>, 비전 뒤 릴 국제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몬트리올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된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 등 지원작들의 수상 소식과 초청 소식들이 이어지며 전주 프로젝트 마켓의 가치를 입증했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영화진흥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인더스트리 스크리닝'은 한국영화의 해외 배급에 크나큰 역할을 했다. 영화제와 영화산업 간 유통 활로를 제공하기 위해 전주국제영화제가 진행해 온 인더스트리 스크리닝 사업은 영화제를 찾은 해외 프로그래머들에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우수 신작들을 소개하고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을 도와 왔으며, 그런 노력에 힘입어 2014년에는 신연식 감독의 <조류인간>을 제36회 모스크바영화제에 진출시키고, 남기웅 감독의 <미조>를 일본에서 개봉시키기도 했다.


한결같은 신념, 표현의 자유를 외치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흔들리지 않는 표현의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공고히 했다. 당대의 정치, 사회 이슈들을 쟁점화한 작품들을 모아 '프론트라인' 섹션을 신설했고, 정치, 경제, 미학에 있어서 표현의 한계를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기치에 걸맞게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는 상영작들이 다수 내걸렸다.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N프로젝트'는 <노무현입니다>라는 정식 제목으로 공개돼 큰 주목을 받았고, 성주 사드반대 투쟁을 조명한 <파란나비효과> 역시 사드반대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 공개돼 이목을 집중시켰다. 백승우 감독의 <국정교과서>와 박근혜 정권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김재환 감독의 <미스 프레지던트>, 부동산 투기 문제를 다룬 마민지 감독의 <버블 패밀리>까지 전주국제영화제는 작품성과 완성도를 고루 갖춘 작품들을 줄줄이 선보이며 다시금 전주국제영화제만의 색깔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표현의 자유는 강조하고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던 김승수 조직위원장의 다짐 역시 의미 있는 영화들을 전주로 초대할 수 있었던 동력이 됐다. 든든한 지지와 후원 속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 주며 독립성을 확보한 내실 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취임 후 네 번째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이충직 집행위원장은 수년간 내부적으로 불안정했던 영화제를 안정시키며 성장의 발판을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로그래머 역시 15회 영화제를 기점으로 김영진, 이상용, 장병원 3인 체제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지금의 체제가 완성되기까지 전주국제영화제가 내부적으로 많은 내홍을 앓았던 것도 사실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2회 영화제를 불과 3개월여 앞두고 초대 프로그래머 두 사람의 사퇴를 겪으며 불안한 출발을 보이기도 했고, 13회 영화제를 치른 직후인 2012년 6월에는 유운성 프로그래머를 부당 해임시켰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후 고석만 집행위원장이 선임되자 사무처장과 프로그래머 등 주요 실무진이 집단 사퇴하는 도미노 사퇴가 벌어졌고, 그 뒤로도 사무처장 사임만 세 번에 이를 만큼 전주국제영화제 내부 문제는 심각했다.
영화도시 전주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미국 영화 전문 잡지 '무비메이커'에서 '세계에서 가장 멋진 영화제 25개' 중 하나로 꼽히며 '잊을 수 없는 영화제'라는 찬사를 받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이제 스무 살 성인이 됐다. 성숙해진 영화제, 우리 모두의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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