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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기획 [기획]
장인의 공방 ① 전주
전주-3
이동혁, 김하람(2020-07-07 11:51:38)

장인의 공방 ① 전주_3


서화를 더욱 아름답게 옷 입히다
배첩장 변경환 <기린산방>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배첩장 변경환 장인의 공방인 ‘기린산방’은 흔히 길에서 보는 표구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황문화재 연구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배첩은 서화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족자, 액자, 병풍 등을 만들어 작품을 더욱 아름답게 함과 동시에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 서화 처리법이다. 표구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말로 한국의 전통 용어는 ‘배첩’이다.


배첩장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도화서에 소속되어 궁중의 각종 서화를 처리했는데, 이를 장황이라고 한다. 장황 문화는 궁중의 아름다운 배첩 기술을 보여주는 만큼 그 역사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 몽골의 4개 국가가 참여한 동아문화유산보존학회에서 장황 문화의 아름다움을 맛보고 한국 장황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 계승하여 알리기 위해 ‘장황문화재연구원’을 열었다.


장인은 지류, 섬유, 전적의 모든 배첩 분야와 궁중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넓은 작업대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배접하고 꿰매는 일을 하고 있다. 배첩이란 자고로 작품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일. 그는 그림에 맞춰 도구도, 비단 색도 작품을 가장 빛낼 수 있도록 다 다르게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공방에는 곳곳에 배첩을 위한 도구와 형형색색의 비단과 한지, 마치 박물관에서 볼 법한 서화들이 가득하다.


이곳에서는 복원 작업이 주로 이뤄진다. 주문이 없을 경우에는 본인의 작업을 하는데, 몇 년 전부터 왕실 기와, 숭례문, 전주 풍남문, 무천당, 영릉 등의 우리의 옛 기와를 탁본 뜨는 일을 하고 있다. 기와는 사람 머리 위 높은 곳에 있어서 그 문양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내려서 보면 연꽃, 구름 속에서 놀고 있는 용 등 새겨진 문양이 얼마나 다채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서 복원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며 기와를 탁본해 배접해서 발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장인은 1964년 열일곱 살 되던 해에 표구에 입문했다. 그의 스승인 서재영 명장은 이름난 배첩장인으로, 전주 배첩 역사를 대표하는 김남도 장인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훼손된 고서화, 영정 등의 복원 과정을 10년간 전수받았다. 2002년 전주로 내려온 그는 표구방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한국금석문대계, 최치원의 영정, 황희정승 영정 등 문화재와 전주시 강암 서예관의 김홍조 화조도, 한석봉의 글씨 이배첩 작업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배첩 과정 전체를 전통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 장인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지금, 경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2018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43



시간을 재현하는 한복 공방
침선장인 신애자 <신애자 한복연구소>



한 번씩은 지폐 한쪽에 자리 잡은 세종대왕과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선생님이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인지 궁금한 적이 없는가? 36년째 한복을 만들고 있는 바느질쟁이, 신애자 장인은 그런 궁금증에서 전통복식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의 공방에 들어서면 벽마다 걸려 있는 장옷, 제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판매장은 근처에 따로 있고, 이곳에서는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주문이 없을 때는 전통 복식을 재현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복 만드는 것에 대해 배우기 위해 첫차 타고 갔다가 막차 타고 돌아오고,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배운 것을 복습한 그는 후학들은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도록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하고 있다. 수업에서는 시간과 원단 값 절약을 위해 실제 사이즈의 1/6정로도 축소해 가르치는 것이 특징.


처음 한복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저고리, 치마, 도포 등 생활 한복밖에 몰랐던 그가 전통복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즐겨 다니던 경기전과 향교에서 검고 빨간 희한한 옷을 본 다음부터다. 자신이 만들던 한복과는 쓰는 색도 모양도 다른 그 옷들을 보며 이름은 뭐고, 어떨 때 입는 것인지 궁금해져 알아보기 시작하던 것이 지금 유물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다니며 전통복식을 재현하는 길로 이끌었다. 새로운 옷의 이름을 알아가고 완성할 때마다 널을 뛰는 것 같이 기쁘다는 그의 공방 한편에는 그동안의 노력을 보여주는 듯 재현한 옷을 정리한 상자들이 가득하다.


그는 많은 전통복식 중 특히 제복과 조복을 재현하는데 힘쓰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생지로 역사가 깊은 곳이지만 조복과 제복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이 없다 보니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장인. 다른 곳에서 제복을 재현한 것을 보면 간소화하고 약식으로 만든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전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가끔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서럽고 답답해서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하고 있어요. 우리가 안 하면 사라지는 것이거든.”


그는 한옥마을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거나, 결혼식 때 젊은 사람들이 한복을 바르게 입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개량 한복을 입거나, 색을 맞춰 입지 않더라도 전통 한복에 대한 것은 알고 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는 한복 문화가 변질된 것도 이해가 된다고 한다. 바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 그는 원광디지털대학교를 제외하고 전문으로 가르치는 대학이 없는 것을 지적하며 사립에서는 힘들다면 국립대학에서라도 과를 신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르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후대에 전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법.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복을 알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진안 백운면에 있는 신씨집성촌에서 자란 장인의 주변 어른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생활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수 옷을 지어주시는 어머니를 도우며 바느질을 시작하게 됐다. 이후 학원에서 좀 더 기술을 배운 뒤 남부시장에서 한복집을 하게 된 그는 경기전과 향교에서 본 전통복식에 궁금증이 생겨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침선장 고 박혜순 장인을 찾아가 전통복식에 대해 배웠다. 박혜순 장인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전국의 한복을 잘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배우러 다녔다. 지금은 전통복식을 재현하거나 자신의 공방과 교대평생교육원에서 전통 한복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치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 4길 21



대물림의 공간, 합죽선이 춤을 춘다
선자장 엄재수 <미선공예사>



선비들이 죽을 때 함께 묻는다고 할 정도로 사계절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부채. 흔히 흰 종이에 수묵화가 그려지고, 마른 나무의 색을 띠는 살로 이뤄진 접부채을 상상할 것이다. 그런 부채를 현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선비들이 쓰는, 그래서 약간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조들이 사용한 부채는 훨씬 더 다양했다. 그중 파랑, 빨강, 초록, 노랑, 검정 다양한 색으로 옻칠한 칠접선의 아름다움은 다른 접선과는 또 다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그 고운 부채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선자장 엄재수 장인의 손에서 다시 살아났다.


한옥마을의 골목길 한편에 자리 잡은 ‘미선 공예사’는 장인이 운영하고 있는 전시장으로 공방을 겸하고 있다. 그의 부채가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는 전시장을 지나 방문을 열면 선자장만의 작업실이 나타난다.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방안에 작업을 하는 원목 책상이 놓여 있고, 벽면에는 다양한 도구들이 걸려있다. 책상 너머에는 재료들을 다듬는 기계실이 있으며, 위로 놓인 다락에서는 옻칠 작업을 한다. 지금은 근처에 따로 자택을 마련했지만 이전에는 자택으로 이용했던 공간인 만큼 주방도 갖추고 있어 간단히 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공방이다.


그는 매년 새로운 주제를 정해 그에 맞는 재료를 사용하여 부채를 만들고 있다. 그가 만드는 부채는 한마디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부채를 만들되 합죽선, 반죽선, 칠접선, 우각선, 어피선 등 크기와 종류를 다양하게, 적은 수량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번 부채를 만들 때 다양하게 만들기 때문에 부채 애호가들은 그의 부채를 찾아 다시 방문하곤 한다.


그는 “접부채는 장인의 손에서 80%를 완성하고 나머지 20%는 애용자가 완성한다”고 말한다. 부채를 제대로 사용하면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는 고가의 희귀한 재료를 사용해서 부채를 만드는 만큼 처음 온 손님에게는 부채를 추천해 주지 않는다. 일단 부채를 2~3년 사용하고 다시 가지고 오면 그때 부채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 성향을 파악하고 알맞은 부채를 추천해 준다. 단순히 더울 때 부치는 용도를 뛰어넘은 애장품으로서의 부채. 손에 꼭 맞는 부채를 만나게 되면 단연 자신의 보물 1호가 될 것이다.


엄재수 장인의 아버지는 근대부채 역사에 있어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고 엄주원 장인.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어깨너머로 부채 일을 배웠다. 그가 만드는 부채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장인이 제작한 부채를 사용했으며, 이탈리아 피렌체 시장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경남 양산시가 해외 각국 대사 열네 명에게 보낸 합죽선 선물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옛 선자장들의 유품 하나하나, 옛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채에 관한 연구를 거쳐 대륜선, 칠부채, 백접선, 대모선, 우각선, 금반죽선 등 수많은 우리 부채를 복원해냈다.


전주시 완산구 은행로 67



되살아난 전통, 비꽃에서 피어나다
우산장 윤규상 <비꽃공방>



1960년대 전주는 한지우산 제작의 중심지였다. 특히 전주는 좋은 한지가 생산되는 곳이자 가까운 전남 담양에서 살의 재료인 대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어 명품 지우산이 생산됐다. 마을에 35군데 정도의 우산 공장이 있었다. 하지만 70년대에 값싼 비닐우산이 나오면서 지우산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80년대에는 천우산이, 90년대부터는 중국 수입우산이 들어오면서 장인들은 떠나고 결국 지우산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됐다.


그렇게 한 번 지우산의 명맥은 끊기고 말았지만, 2005년 윤규상 장인은 우연히 한지장인 유배근 씨를 만나 전통공예의 맥을 이어보기로 했다. 우산 꼭지를 만드는 칼과 살대가 끼워질 홈대를 파는 홈칼, 살대 깎는 칼 등을 새로 제작해야 했다. 3년에 걸쳐 옛날 방식의 제작 도구들을 복원하고 자택 2층에 공방을 만들어 사라졌던 지우산의 명맥을 다시 되살렸다.


지우산은 완성까지 80여 차례의 손길이 간다. 각각의 재료들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자리에서 역할을 해 줘야 우산이 펴지는데, 이런 모든 작업이 그의 공방에서 이뤄진다.


작업 과정을 살펴 보면, 살들이 갈려 나가는 꼭지는 때죽나무나 물푸레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써야 한다. 상통 꼭지에서 살이 갈라져 나가는 홈을 파고 여기에 담양산 맹죽이나 손죽을 사용한 살대를 깎아 넣는다. 살대와 같은 수의 받침살 또는 펴짐살이 모이는 중통도 그 간격이 일정해야 한다. 36개에서 72개의 살대가 펴지는데 정확하기가 이를 데 없다. 지름 2센티 이상의 손대로는 곧은 청죽을 사용한다. 손대나 손대의 손잡이에 장식을 넣는다.


골산이 완성되면 실로 살들을 묶어 낸다. 마지막으로 전주산 한지를 삼합으로 배접해 사용하고 그 위에 들기름을 먹인다. 기름을 먹인 한지 덕분에 우산은 비에 젖어들지 않는다.


종이우산을 일본 문화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 장인은 지우산의 전통성 알리기에도 힘을 쏟고 있다. 종이우산을 현대화하고 작품성을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천우산의 기능성과 편리성을 대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명용품, 디자인용품, 장식용품, 비가림과 해가림 휴식용품 등으로 변신되는 지우산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1943년 완주에서 목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장인은 1960년 우산공장 견습공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우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비닐우산이 등장하면서 지우산은 자취를 감추게 됐고, 그도 한동안은 지우산 대신 대나무 뜨개바늘을 만들며 생계를 이었다. 2005년부터 독자적인 노력을 쏟아 전통 지우산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그는 80여 차례의 손길이 가는 제작 공정을 고집스럽게 직접 해낸다. 그의 지우산은 전통예술 공연이나 사극 영화 등에서 널리 활용될 뿐만 아니라 2010년에 열린 G20정상회의 기념 특별전에서 전통 지우산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기도 했다.


전주시 덕진구 반태산3길 29



불 속에서 부채의 아름다움을 피워 내다
낙죽장 이신입 <영진공예>



우리 선인들의 풍류와 멋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전주 대성동의 민속공예단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1호 전주낙죽장 이신입 장인이 지금은 별세한 아버지 이기동 장인과 함께 이곳에 자리를 잡고 합죽선을 만들어 온 지도 어느새 30년을 훌쩍 넘겼다. 당시 부채, 목공, 완초 등 10여 가구에 이르는 장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었지만, 값싼 중국산 제품과의 경쟁에 밀려 대부분 문을 닫거나 떠나고 현재 남은 공방은 그가 운영하는 ‘영진공예’가 유일하다.


아버지에게 직접 전수받은 합죽선 제작 기술에 본인의 노력으로 터득한 낙죽 기술까지 그의 공방에선 전주 합죽선 제작의 처음과 끝을 전부 엿볼 수 있다. 그가 낙죽 기술을 배우기 전에는 선자장과 낙죽장이 따로 있어 부채가 만들어지면 낙죽 장인에게 보내 완성해야 했다. 그나마도 낙죽 장인이 한 사람뿐이어서 완성돼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1979년 부친의 권유로 낙죽 기법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매운 연기와 씨름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자신만의 기법을 탄생시켰다. 전기 인두를 사용해 낙죽을 넣는 곳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화로에 숯을 피워 인두를 달구는 전통 기법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오직 그의 공방에서만 만나 볼 수 있는 전통 기법인 것이다.


“숯에 달궈진 인두의 온도에 따라 그림의 농담이 전부 달라져요. 볼에 가까이 대 보고 적당히 달궈졌는지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감을 익히는 데만도 최소 3년은 걸립니다. 거기다 일반 나무와 달리 미끄러운 대나무 위에 하는 낙죽은 난이도가 훨씬 높습니다. 쉽게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죠.”


그의 공방에서 시현되는 기술 중 또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낙화다. 낙화란 달궈진 인두로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일컫는다. 합죽선과 낙죽 제작이 두루 가능한 그는 부챗살과 변죽에 그림을 새기는 데 그치지 않고 부채 선면에까지 이를 적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했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종이에 구멍이 뚫릴 수 있기 때문에 낙죽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섬세한 온도 조절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전주 한지의 높은 내구성 덕분에 작업은 수월한 편이라고 한다.


공방은 자택 안에 마련돼 있지만, 문이 열려 있을 땐 누구나 편하게 찾아 그의 작품과 작업을 볼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찾는 날에는 그의 섬세한 작업과 작품을 보며 감탄 어린 탄성이 오래도록 울려 퍼지기도 한단다. 과거 부채를 찾는 이들이 많을 때, 다른 부채 제작자들이 생산량을 늘리려 질을 낮추는 와중에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부친의 장인 정신을 이제는 그가 대를 이어 지켜 가고 있다.


고 이기동 선자장의 아들로 부친에게 부채 만드는 기법을 전수받은 그는 부친의 권유로 낙죽 기법을 배우기 시작, 밀양 박씨 계보로 이어 오다 단절됐던 낙죽 기술을 새로이 개척했다. 현재도 화로를 이용해 전통 낙죽 기법을 재현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1호 낙죽장에 선정돼 우리 지역 최초로 ‘낙죽장 문화재’ 칭호를 얻었다. 대한민국공예품대전 국무총리상, 전북공예품대전, 대한민국 황실공예대전 명장, 전주전통공예대전 특별상 특선, 전국공예품경진대회 특선 및 입선 등에서 수상했다.


전주시 완산구 객원길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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