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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 | 기획 [기획]
장인의 공방 ② 전라북도 서부권
부안, 정읍, 고창
이동혁, 김하람(2020-08-10 19:52:38)

장인의 공방 ② 전라북도 서부권_부안, 정읍, 고창


공방, 예술촌으로의 첫발을 떼다
청자장인 김문식 <도화자기소>



일찍부터 생기가 돋는다 하여 ‘생깃골’이라고도 불리었던 부안의 향교마을. 그러나 현대의 많은 농촌 마을들이 그렇듯 이곳 역시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면서 생깃골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 이름에 걸맞는 생기를 다시 피워 낼 순 없을까. 청자장인 김문식 씨는 자신의 개인 작업실 ‘도화자기소’를 중심으로 이곳 향교마을에 부안 예술인들이 마음 놓고 창작 활동을 이어 갈 수 있는 문화예술촌 설립을 꿈꾸고 있다.


부안청자박물관 소속 도예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장인은 이곳에서 고려청자의 미감에 현대적인 쓰임을 더한 작품들을 만드는 데 매진하고 있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의 작업과 작품들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기와 지붕의 운치가 더해진 청자기와수저받침, 나무의 질감과 청자의 유려한 비색이 결합된 화병 등 실용성과 예술성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작품들이 공방을 둘러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한다.


향교마을에 공방을 두고 마을 주민들과 부대껴 온 세월이 어느새 10년째라는 장인. 이곳에 오게 된 사연도 무척 훈훈한데, 당시 부안경찰서 인근에서 작업을 하다 부득이 공방을 옮기게 됐을 때 마을회관 신축으로 비게 된 구 회관 건물을 향교마을 이장님이 평생 써도 괜찮다며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임대료로 흔쾌히 내어 주었다고 한다. 그가 향교마을에 더욱 애착을 갖는 이유다.


과거 장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며 수공예품을 생산했던 ‘소(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목공소, 제재소 등 유독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다는 향교마을의 역사처럼 그는 자신의 공방을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이곳에 모여 하나의 예술촌을 형성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한 준비로 현재 마을 내에 새로운 공방을 건립 중에 있으며, 그동안 사용했던 공방은 마을 주민들은 물론 부족한 노동력을 대신하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함께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라고 한다.


“예술촌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우리 전통의 멋을 알리고, 나아가서는 주민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는 모두가 윈윈하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작은 걸음이라도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안군 부안읍 서문로 23-4



시대를 넘어 만나는 고려의 비색
사기장 이은규 <유천도요>



흙과 불, 사람의 손이 삼박자를 이뤄 만들어 낸 천년의 신비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중국 송나라의 영향으로 탄생했지만, 우리 도공들의 손을 통해 더욱 발전하며 송나라 귀족들조차 고려청자의 비색을 더 높게 평가했을 정도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완성시켰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상감 기법은 고려청자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으로, 부안 유천리는 상감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였다.

고려 도공들의 피와 땀이 서린 이곳 유천리에 고려청자의 영롱한 비색을 지켜 가고 있는 공방이 있다. 2003년 고려 비색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9호 사기장 이은규 씨의 공방 ‘유천도요’다.


 “제대로 빚은 청자의 빛깔을 알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청자에는 눈길조차 주기 힘들다”는 장인의 말처럼 입구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맑고 깊은 비색의 향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관념적인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빚은 청자를 현미경을 통해 살펴보면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일반 청자기의 표면은 꽉 막히고 단조로운 푸른색만 보이는 반면, 재현 청자는 투명한 유리질 속에 공기 방울이 알알이 맺혀 있다. 이 차이는 자기의 표면에 바르는 유약에서 나오는데, 일반 청자기는 가공의 편리성을 위해 태토와 유약에 화학유약을 사용한다고 한다. 장인이 재현하는 청자는 유천리의 태토만을 사용하고 떡갈나무와 느릅나무 재를 사용한 천연유약을 발라 고려청자 특유의 유리질 비취색이 형성된다.


장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으로 상감을 새기는 일 역시 빠뜨릴 수 없다. 학, 모란, 매화, 대나무 등의 문양을 도자기 하나하나에 새기는 데만도 무려 한 달이 걸린다. 이렇게 조각한 문양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 유약을 발라 재벌하는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하나의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이렇듯 아름다운 고려 비색을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해 냈지만, 장인은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는다. 전문가들의 의견들을 듣고, 또 청자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깨우쳐 가는 과정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그는 더욱 완벽한 청자의 색을 복원해 내기 위해 오늘도 이곳 유천도요에서 흙을 빚으며 가마에 불을 지핀다.
부안군 보안면 청자로 1594-10



하늘을 울리고 사람을 울리는 장구 소리
악기장 서인석 <제인청, 전승명가 체험공방>



풍물놀이에서 가장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장구 연주자는 언제나 눈길을 끈다. 그들이 신명나게 두 손을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리듬은 듣는 이의 어깨를 절로 들썩이게 한다. 하나의 타악기에서 서로 다른 두 음이 나는 독특한 악기, 장구. 요즘은 기계로 하루에 수십 개씩 깎아내지만,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악기장 서인석 씨는 여전히 전통 방식인 수작업으로 장구를 만들고 있다.


한적한 시골, 천변을 따라 놓인 길 끝에 자리 잡은 장인의 공방. 작업하는 공간, 가죽 말리는 공간, 마당, 간단히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 그의 공방에서 수많은 나무가 악기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통로를 따라 좌측에는 곰삭히는 통나무들이, 우측에는 여러 시대의 장구들이 놓여있다. 수북이 쌓인 나무 톱밥 위에 놓인 작은 의자가 그가 작업하는 곳이다.


그의 공방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장구를 만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운데 목 부분에 굴곡이 있는 형태는 기술이 발전하기 전, 통을 나눠 깎아 붙이는 과정에서 결합을 단단하게 하는 용도로 생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도 모른 채, 이전에 만든 장구가 그런 형태였다는 이유로 또는 미관상의 이유로 중간 목에 굴곡을 만들고 있다.


원래 고구려나 고려 시대 때 사용하던 장구의 중간 목에는 굴곡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와 명칭이 변해온 장구는 각각의 형태에 따라 소리도 천차만별이다. 중간목이 없는 장구의 소리는 파장이 끊어지지 않고 반대편으로 뻗어나가 맑고 청아하게 울리지만, 중간목이 있는 장구는 목 부분에서 반대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막힌 듯한 소리가 난다.


이렇듯 옛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 역사가 이어지도록 옛것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이 문화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장인.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발전하지 못하고 도태돼요.” 그는 국악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오늘도 시간 속에서 잠든 악기를 깨우고 있다.
정읍시 칠정1길 13-6



윤도, 우주의 이치를 품다
윤도장 김종대 <윤도장전수관>



‘윤도’. 이름만 들어서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한자로는 바퀴 윤 자에 그림 도 자를 쓴다. 윤도는 24방위를 원으로 그려 넣은 풍수지남침, 즉 일종의 나침반이다. 음양, 오행, 팔괘, 십간, 십이지, 24절후가 조합을 이루며 배치돼 있어 풍수를 통해 집터나 묏자리를 살피던 지관들에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도구였고, 군사, 천문, 여행 분야에서도 두루 사용됐던 중요한 물품이었다.


그러나 동양 자연 철학의 진수인 풍수가 옛것 내지는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지관에게 묏자리를 자문하지 않게 된 요즘 찾는 이들이 사라지자 윤도도 덩달아 그 아름다운 빛을 잃었다. 이런 가운데 흔들림 없이 한국 전통 윤도 제작 기술을 지켜 가고 있는 곳이 있어 큰 빚을 진 기분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0호 윤도장 김종대 씨는 세상의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윤도장전수관’에서 우리 전통 윤도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윤도장전수관’에 대해 소개하려면 먼저 공방이 위치한 낙산마을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마을에서 윤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400여 년 전부터다. 이 마을 뒷산에는 거북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동서로 놓여 있는 바위 위에 윤도를 놓으면 자침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윤도 자체의 아름다움도 빼어났지만,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는 윤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정교한 방위 덕분에 조선 시대에는 이 마을에서 만들어지는 윤도를 최상품으로 여겼다. 당시에는 마을이 흥덕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흥덕패철’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윤도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져 사랑방에는 언제나 윤도를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장인은 윤도를 만들 때 수백 년 묵은 대추나무를 쓰는데, 재질이 단단하고 말려 놓으면 잘 틀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오래 사용할수록 붉은색이 고와져 윤도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재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3,000자 가까이 들어가는 한자를 예리한 칼 한 자루에 혼을 담아 새기는 과정도 거의 신기에 가깝다. 단 한 자가 들어갈 공간만 밀려도 그간의 수고가 허사가 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고, 한 달에 고작 한 개 정도가 장인의 손끝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 아득한 시간과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창군 성내면 은낙길 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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