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1.3 | 기획 [기획 연재]
나를 찾는 시간, 엄마의 방학
문화를 더하고 문화를 나누다 ③
김하람(2021-03-04 10:28:22)

기획 | 문화를 더하고 문화를 나누다 | 엄마의 방학



나를 찾는 시간, 엄마의 방학

김하람 기자 사진 윤정아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마스크, 언택트, 사회적 거리두기, 그리고 돌봄.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게 되면서 엄마들에게는 강도 높은 돌봄 노동이 주어졌다. 돌봄 노동. 그 속에서 우리는 ‘엄마’라는 이름을 되돌아보게 된다.


수많은 직업과 수많은 이름으로 살던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그동안 살아온 모든 길이 가려진 채 그저 엄마가 된다. 가정을 이루는 소중함 뒤에, 사랑과 봉사라는 말로 덮어진 ‘나’의 이야기들이 있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감춰온 엄마들. 1년 365일 내가 아닌 엄마로 사는 그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할 쉼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다음 학기를 준비하고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한 방학이 엄마에게도 필요하다. 이런 고민을 함께 안고 해결해가는 공동체가 있다. 완주군 고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공동체 <엄마의 방학>이다.





엄마도 방학이 필요해

‘엄마의 방학’ 리더 김지영 씨는 엄마의 방학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시작하게 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결혼을 한 뒤로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 자신의 이름을 잃고, 모든 것의 중심을 아이에 두며, 대부분의 대화에 남편과 아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경험 속에서 김 씨는 점점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깨닫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되찾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쉽게 갈 수 있는 복지관이나 문화 센터 같은 곳에 가봤지만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의 역할에 한정된 프로그램에 실망을 하고 좀 더 새로운 것을 찾던 중 완주문화도시지원센터의 컬처메이커스 수업을 듣게 됐다. 문화기획자를 양성하는 수업이었던 컬처메이커스에서 그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 만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볼 수 있다는 응원을 얻었다. 그는 당시 3년 전부터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탈출구를 삼아 아이들과 겨울마다 배낭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별것 하지 않고 그 곳의 동네를 돌아다니는 단순한 여행이었는데도 한국에 돌아오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됐다.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여행이 두 번, 세 번 늘어나면서 다른 엄마들에게도 이렇게 방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엄마의 방학’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게 됐다.


나를 찾아서, 라라랜드를 찾아서

‘엄마의 방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첫 번째 활동은 ‘라라랜드를 찾아서’다. 김 씨는 자신도 아이들과 함께 배낭여행을 할 수 있다고 깨닫게 해준 오소희 작가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했다. 오 작가는 세 돌 된 아이와 함께한 여행기를 책으로 펴낸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엄마의 20년> 등의 저자이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로컬 버스를 타고, 허름한 숙소에서 지내며, 지역 시장을 돌아다니고, 지역에서 외면 받는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재능기부를 한 이야기들을 통해 엄마들은 나도 아이들과 함께 여행 갈 수 있겠다는 힘을 얻게 된다.

스무 명의 엄마를 모집했던 ‘라라랜드를 찾아서’는 엄마의 방학에서 처음 시도한 프로그램인 만큼 인지도가 낮아 모집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 작가의 홍보로 전국에서 신청이 들어와 지역 주민 10명과 전국에서 찾아온 독자 10명으로 구성해 인생 선배인 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부터 엄마의 방학은 활동의 중심에 책을 뒀다. 


김 씨는 “책은 엄마로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여행을 데려다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 한 번, 심지어 카페 한 번 가기 힘든 엄마들에게 더 먼 곳으로, 넓은 세상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책’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책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책을 통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책을 통해 맺어진 인연은 끈끈하다. ‘라라랜드를 찾아서’를 통해 만난 사람들 역시 서울, 대구, 제주도, 전주 등 각지에서 살지만 책을 통해 이곳 엄마의 방학에서 꾸준한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엄마의 방학은 책모임 외에도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그 질문과 연결되는 활동들을 하고 있다. 그림일기를 써보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보기도 했으며, 자신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에니어그램, 타로카드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작년에는 특히 환경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 엄마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일주일 동안 집 밖에 버리는 쓰레기에 대해 자각해보는 실험을 진행하고, ‘엄마의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천연 샴푸나 비누를 만들어 보고, 쓰레기에 대해서도 새롭게 공부했다. 



안전한 공간에서 안전한 사람들과 안전한 활동을

작년 코로나로 인해 모이는 일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카페를 전전하지 않고도 모일 수 있는 아지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산에 작은 문구점을 연 소유진 씨 덕분이다. 전업주부가 된 그를 엄마의 방학으로 끌어들인 것이 김 씨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엄마의 방학에서 같이 책을 읽기를 권했던 것.


엄마의 방학 활동 중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 때 소 씨는 가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글을 썼다. 엄마의 방학은 이에 대해 열렬한 응원을 보냈으며,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문구를 좋아한 그는 작년 고산 읍내에 작은 독립 책방 겸 문구점인 ‘베르’를 열게 됐다.


베르에는 소 씨가 직접 골라온 아기자기한 문구류로 가득하다. 이 중에는 그가 직접 디자인 한 제품들도 있다. 


“제가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것도 아닌데, 응원을 해주셔서 꿈이 점점 커지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 꿈을 찾고, 생업을 찾을 수 있게 됐죠. 제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문구를 좋아한다는 프레임 안에서 조금씩 넓혀가려고 해요. 제가 들여오는 것들을 예쁘다고 해주시고, 구매해 주실 때 오는 기쁨이 있어요.”


문구점의 한쪽에는 책모임 ‘라라랜드를 찾아서’에 참석하는 엄마들이 추천하는 책들로 꾸며진 작은 책방 ‘엄마의 신비한 책장’이 자리하고 있다. 여섯 명의 책방 지기 엄마들은 먼저 엄마가 됐고, 먼저 그 길을 걸은 선배로서 책을 통해서 무언가 변화를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추천하고 있다. 


“신기한 점은 여섯 명의 엄마들의 책이 별로 겹치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다르지도 않아요.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요. 다른 책방보다 책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인생 책들이었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담았어요.”


처음 베르라는 공간을 구상할 때부터 책방을 고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 씨가 이 공간으로 꿈을 이뤘듯, 다른 엄마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엄마들 스스로 자신의 재능에 대해 약간의 손재주,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머뭇거림이 있었다. 엄마의 방학은 그동안 해온 것, 계속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활동의 출발이었던 ‘책’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김 씨는 엄마들의 재능을 그냥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엄마의 소풍’이다. 베르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엄마의 소풍에는 뜨개, 재봉, 손바느질 실력을 발휘한 엄마들의 작품이 판매되고 있다. 물건을 만들어 판매해 본 경험이 없는 엄마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 작은 공간에 담았다.


소 씨는 이 공간이 그냥 누구든 들어와 놀다 가고,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면 엄마들이 와서 이 공간에서 쉬어가고, 하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와서 시끌벅적 이 공간을 채우며 추억을 쌓아가기를. 또 엄마의 방학 활동을 알리고, 재능 있는 엄마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성장해 가기를 바란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늘 혼자, 늘 집에서 아이와 있을 뿐, 누구에게 이름이 불리지도, 누군가 만나자고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지만, 엄마의 방학을 통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도 생기고, 만나자는 사람도 생기고, 오고 싶은 공간도 생겼다. 엄마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엄마의 방학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잘하는 것을 찾게 되고,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김 씨는 엄마의 방학 활동이 엄마들에게 만만한 사례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 역시 엄마의 방학 활동을 하기 전에는 많은 문화 활동들이 문턱이 높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엄마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에서 찾는다.


“저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디 가도 할 수 없었거든요. 엄마라도 내가 누군지 알아도 괜찮은 거잖아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엄마가 엄마나 아내, 며느리를 벗어나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엄마의 방학에서는 엄마의 어떤 역할이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 대한 질문들이 계속 이루어져요. 그것들이 다른 엄마들에게 ‘어 내 이야기를 이렇게 해도 괜찮네?’하며 만만해지고 사소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런 이야기들이 자꾸 쌓여서 누구든지 와서 그 이야기들을 함께 공감하고 서로 응원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엄마의 방학은 올해도 다양한 활동을 구상하고 있다. 우선은 계속해서 ‘엄마의 소풍’을 통해 조금 더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굴하고 재발견하고자 한다. ‘엄마의 방학 스테이’도 꿈꾸고 있다. 김 씨는 엄마들이 좀 더 잘 쉬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쉽지 않겠지만 엄마들이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주변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주변을 바꿔나가고 있다. 작년의 제로 웨이스트 캠페인에 이어, 올해는 화장품 용기에 주목했다. 우리가 매번 쉽게 사용하는 화장품이지만, 화장품 용기의 90% 이상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엄마의 방학은 다 쓴 화장품 용기를 화장품 제조사에 다시 보내는 소비자 행동 ‘화장품 어택’에 참여하기 위해 화장품 용기를 모으고 있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작은 경험이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변화시킨다. 엄마의 방학의 시작은 김지영이라는 개인의 경험에 바탕을 두었으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위로하며 한층 더 성숙해져가는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엄마의 방학은 오늘도 엄마들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