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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 | 기획 [도시의 유산 | 간이역]
켜켜이 쌓인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2
(2021-12-09 12:57:13)



수탈의 역사 품은 나주,

익산 춘포역  


춘포는 우리말로봄개 나루라는 뜻이다. 현재는 음이 변해봉개 변했다. 춘포역의 맞은편 높은 산의 이름이 봉개산인 이유다. 하지만 춘포는 1996년에 들어 변경된 지명으로 그리 오래된 이름은 아니다. 지역의 본래 지명은 대장촌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지은오오바역(おおばえき/大場驛)’ 이라는 이름에서 한자음을 따와 대장촌이라 부른 것이다.


1914년에 지어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춘포역은 일제의 미곡수탈의 현장이었다. 때문에 국철이 아닌 사철을 이용해 미곡을 수송했다. 춘포역의 미곡은 군산항을 거쳐 오사카로 향했다.  춘포역 아래로 내려가 보면 대장도정공장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현미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도정을 했던 정미소이다.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조차 과거 수탈의 아픔을 겪었던 역사의 현장이었단 것에 서글픔이 느껴진다. 


춘포역은 기관차가 작고 궤도가 좁은 협궤철도였다. 건설비용이 저렴한 협궤철도는 전주와 익산, 군산을 잇는 근거리 운행에 적합했다. 열차는 승객들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만큼 작아서꼬마열차라고도 불렸다. 좁고 불편한 공간이지만 전주와 익산을 통학하는 청춘남녀들의 풋풋한 로맨스 현장이기도 했다. 매일 통근할 때마다 사랑하는 이를 눈에 담기위해 의식적으로 같은 칸에 타며 사랑을 키웠다. 소설 <1938 춘포> 이를 배경으로 애틋한 사랑을 그려내기도 했다.


사랑이 싹트는 열차 한편에는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에 보따리 장사를 하던 사람들부터 철도청의 허가를 받아 열차 내에서 장사를 했던 홍익회 사람들까지. 홍익회가 아닌 개인적으로 장사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열차 내에서당고~모찌~” 이런 호객행위와 함께 당고, 모찌를 팔았다고 한다. 이제는 추억 이야기가 돼버렸지만 당시 그들에게 춘포역은 삶의 터전이자 생활공간이었다.  


춘포역은 2011 5 13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폐역 되었다. 그래도 폐역 전까지 전주와 익산을 이어주는 곳으로 분주한 장소였다. 광복 후에는 만경강이 모래찜질로 유명세를 얻으며 하루에 수백 명이 춘포역을 드나들었다. 1970년대엔 어린 여공들이 춘포역을 이용해 익산의 섬유공장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로가 발달하면서 춘포역은 점점 사람들의 필요에서 멀어졌다. 1996 대장역에서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97 간이역으로 격하되어 삼례역에서 관리했다. 보통역에서 간이역으로 격하된 춘포역은 2004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 무배치 간이역이 됐다. 이후 소규모 철도 역사의 모습을 간직한 춘포역은 역사적,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2005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1 춘포

역사 안쪽으로 들어가 철로가 있던 자리로 나오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철로는 전라선의 공사에 방해가 되어 제거되었다. 그렇게 지어진 전라선은 춘포역과 불과 십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낡은 춘포역 간판 위로 쌩쌩히 달리는 고속열차를 보니 오묘하다. 철로는 없어졌지만 추억을 간직하고자 역사 내에 과거의 사진과 기록 등을 전시해 두었다. 또한 지난 100 년의 세월을 느낄 있도록 실제 사용했던 옷가지와 소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춘포역 입구에는 해방둥이로 짐작되는 향나무가 관객들을 맞이해 주고 있다. 


현재는 도보 트래킹 나무심기, 7080추억여행(2016), 춘포역배경 사진 공모전(2020)등의 다양한 문화 행사들을 추진하여 춘포역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방문 전화예약을 하면 실내구경과 함께 명예역장의 해설 관람 안내를 받을 있다. 






기차가 서는 마을, 이야기를 품다

남원 서도역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조용한 산골 마을 자리 잡은 서도역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역사로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유의 고아한 정취에 여러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도역은 1930년대 남원의 유서 깊은 문중의 며느리 3대와 상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최명희 소설혼불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올 기차에서 내리던 , 강모가 전주로 유학할 이용하던 , 서도역에 들어서본다.


가운데 철도가 들어서다

1914 전라선이 준공되고 1931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며 이듬해 1932 서도역이 세워졌다.


본디 이곳은 무슨 이름을 따로 붙일 일이 없었던 가운데였다. 그러던 것이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이곳에 정거장이 생긴 것이다”(최명희 『혼불』중에서)


남원시내에서 30km 떨어진 , 남원의 동북부 끝에 위치한 산골 마을. 조용하고 논뿐인 이곳에 생긴 서도역은 1980년대 버스 노선이 생기기 전까지 사매면 사람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하루 지나가는 기차였지만, 남원에 오일장이 열리면 매번 걸어서 산을 넘어야 했던 남원 사매면과 근방의 임실 상계면 등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발이 되어 주었다. 혼불에서장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정거장에서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그만 저절로 물건을 바꾸고 사고파는 일들이 이루어져 자연히 장날이면 정거장 마당에 작은 장의 시늉이 서게 되었다 이야기처럼 역으로 인해 사람이 모이고 작은 마을에 활기가 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다. 곳에서부터 달려온 기차 역시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했다. 작지만 활기찼던 서도역이 2002, 전라선 개량사업으로 건너편에 역사를 새로 짓고(신서도역) 이전하면서 철거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구서도역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보존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어 영상촬영장으로 꾸미고 근방에 위치한 혼불문학관과 연계해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간의 흐름을 간직한 , 추억을 되짚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역사 내부는 깔끔하게 단장했지만, 외부 목조 구조물은 물론 철로에 관사까지 모두 1930년대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그곳만 시간이 멈춘 듯하다. 지나던 기차도 사라지고, 서도역을 이용하던 마을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졌지만, 기쁨, 슬픔, 그리움, 서도역을 지나던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들을 보듬어 안고 서도역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추억을 쌓아간다. 유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말이면 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서도역을 찾아온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시대의 유산을 붙잡아 놓은 ,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혼불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를 있게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윗대로 이어지는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캐고 싶었다 최명희 작가는 1930-40년대 우리나라의 생활사를 그대로 담은 혼신의 역작을 탄생시켰다. 우리는 혼불을 통해 어머니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시대를 회상하고 떠올려본다. 서도역과 혼불은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서로 맞닿아 있다. 


서도역은 살아있다

서도역의 앞쪽으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뒤쪽으로는 철길을 따라 벚나무가 있다. 역사를 만들고 그즈음 심었을까. 100 넘은 수령 깊은 벚나무와 은행나무에서 서도역 역사(歷史) 깊이를 느낄 있다. 반대쪽에 이어지는 메타세콰이어 길과 등나무 길은 최근 구서도역을 관광지로 조성하며 새로이 만들었다. 역무원 관사는 서도역 공동체 센터로 꾸몄다. 대합실 옆에 위치한 창고는 서도역 역사관으로 조성해 서도역에 기차가 다니던 시절의 모습을 있는 사진, 혼불과 여러 책들로 채웠다. 서도역에 하나 새로운 역사가 더해졌다. 2014년부터 매년 혼불문학관부터 서도역까지 2km 구간을 걸어가며 효원이 서도역에서 내려 시집오는 신행길을 재현하는혼불문학 신행길축제 열린다. 신행길 축제에서 우리는 사라져가는 전통혼례의 모습을 찾을 있다.


사라져가는 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고 생명으로 다시 살아 숨쉬는 . 모습은 번화한 관광지의 모습이 아니라 고즈넉하고 평온한 시골 마을에서도 이루어질 있음을 서도역에서 확인하게 된다. 


끊긴 서도역은 살아 있었다

컷의 시간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박명용의서도역 중에서







아물지 않는 과거,

군산 임피역



일제강점기 시절 유난히 고통을 많이 겪었던 도시 군산. 수많은 미곡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군산의 임피역 역시 이러한 수탈현장으로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상처를 감추듯 철길을 드러내고 공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간이역 건물은 여전하다. 빛바랜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로 승객이 아닌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임피역. 역사 내부에 들어서면 군산대표 작가 채만식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조형물들이 과거를 연기하는 배우마냥 서있다. 소설 주인공이 느낌이다. 


임피역 입구에는옥구농민항일항쟁비 세워져 있다. 옥구는 임피와 익산의 함열 고군산 일부 등을 통합하여 부르던 지명이다. 당시 옥구지역 대규모 농장이었던 이엽사 농장이 소작농에게 불합리한 조건을 들이밀며 이득을 취하려했다.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시위운동이 후에 항일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치열한 항일운동의 현장이었던 임피역은 드넓은 평야를 끼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근처에는 수탈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무궁화들이 늘어섰다.


1910년대에 지어져 1920년대에 열차 운행을 시작한 임피역은 사실 임피면 읍내리에 만들어져야 했지만 유림들이 풍수지리적 이유로 반대하여 술산리에 역사가 들어섰다. 이후 1936년경 군산선의 철도 역사로 개축되어 일제강점기에 전라도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수탈의 아픔을 지닌 임피역은 광복 후에야 주민들의 공간이 되었다. 90년대 후반에 들어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군산선의 이용객이 줄게 되었고 2008 5 열차 운행이 완전 중단되었다. 임피역은 소규모 간이역사의 건축기법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 208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장항선을 달리는 기차가 때때로 임피역 앞을 지날 뿐이다. 


폐역 이후 방치되었던 임피역은 2013년부터일제 수탈의 역사공간으로 재정비하여 문화전시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는데 간이역 건물에서 여전히 당시의 아픔이 느껴지는 듯하다. 임피역 주변을 둘러보면 당시에 사용했을법한 시설들도 찾을 있다. 오래된 우물과 식수펌프, 정오마다 사이렌을 울려 시간을 알려주는 붉은 철탑 오포대가 그것이다. 한편에 있는 객차전시실도 흥미로운 볼거리다. 새마을호 동을 연결해 지은 객차전시실에서 당시의 흔적들을 구경할 있다. 임피역 앞의 시실리(時失里) 광장 한쪽에는 유럽풍의 시계탑이 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특이한 시계탑은 임피역에 들어선 관광객들을 순식간에 과거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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