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2.4 | 기획 [도시의 유산 | 전주사고]
빛나는 기록유산을 지켜내다
김하람 기자(2022-04-11 13:10:08)


빛나는 기록유산을 지켜내다


흘러간 시간은 붙잡을 없다. 되돌아 수도 없다. 기록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아는 조선왕조실록은 472년이라는 시간동안 단일왕조의 역사를 정치·외교·사회·경제·학술·종교·천문·지리·음악 다양한 분야의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한 책으로 1997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기록을 통해 우리는 조선의 정치부터 생활사까지 상세히 있게 되었고, 다양한 연구와 문화 콘텐츠의 개발이 가능했다.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를 가장 상세히 배우는 이유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사극들이 만들어질 있는 이유도 당시의 기록이 보존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이 무엇보다 가치있는 이유는 단일왕조 어떤 대의 기록도 빠짐없이 남아있다는 것이며, 가치가 손상되지 않을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전주사고에 있다. 경기전 동쪽에 복원된 전주사고에 보관됐던 실록(태조~명조대) 임진왜란 동안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고 지켜졌으며, 현존하는 실록의 원본이 됐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를 지킨 장소이며, 실록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무수한 노력을 기리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왜란과 호란, 수차례의 민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까지 많은 혼란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조선왕조실록 1,893 888책을 보존할 있었다. 3,000 넘게 역사를 기록해도 그것을 보존하지 않으면 기록을 했다는 기록만 남을 ,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기록이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보존되어야만 한다. 


조선의 역사를 지켜낸 전주사고는 전주의 자랑스러운 유산 하나다. 전주사고를 통해 기록 속의 역사뿐만 아니라 기록을 보존한 역사도 함께 빛을 받기를 바란다.



비로소 살려낸 조선의 역사


역사서는 왕실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간으로 활용됐다. 조선 역시 건국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고려사를 정리하고 조선 왕대의 역사와 문화, 정치, 경제, 사회 국정운영을 정리한 실록을 편찬했다.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되어 있는 실록이기에 편찬부터 보관까지 철저한 관리 속에서 이뤄졌다.


실록의 보관을 위해 만들어진 사고는 중앙의 내사고와 지방의 외사고로 운영됐다. 현대로 치자면 이중 백업 시스템이다. 고려시대 전란으로 실록을 소실한 외사고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이후 내사고인 개경 춘추관에 더해 충주 개천사에 외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했다. 


조선 역시 초기에는 고려시대 사고운영을 따라 중앙에 내사고인 춘추관을 운영, 충주에 외사고를 설치했다. 이후 세종 사헌부의 요청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외사고를 신설하게 됐다. 이중 백업으로도 모자라 삼중, 사중 백업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결정은 후에 임진왜란을 통해 곳의 실록은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본만은 유지되며 가치가 증명됐다.


민과 관의 힘으로 지켜낸 조선왕조실록 전주사고본

임진왜란 전주사고본을 지킬 있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일본군 주력 부대의 침입 경로에서 전라도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빠르게 조선의 머리, 왕인 선조를 죽이고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기 위해 부산에서 한양까지의 최단 거리로 진격했고, 전라도는 주력 부대의 진격로에서 벗어나 전쟁 초기에 피해를 입지 않을 있었다. 반면에 충주, 성주 서울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사고는 왜군의 진격로와 일치해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일본이 전라도를 그대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 6진이 성주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전주사고본마저 소실될지 모르는 상황.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를 지켜내는 동안 실록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관리와 민간인이 협력해 전주사고본을 지켜냈다. 


전주사고는 경기전 동편에 있었기 때문에 전라감사 이광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 등과 함께 경기전 안에 모셔져 있는 태조 어진과 전주사고본 실록을 지킬 방도를 논의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땅에 묻으려 했으나 성주에서 이미 시도된 방법으로 일본군에게 발각돼 훼손된 소식이 전해져 일본군의 손에 닿지 않을 깊은 속으로 옮겨 지키기로 했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에서 명종 대까지 13 실록 806 576책에 고려사, 고려사절요 기타 주요서적을 길도 닦이지 않은 험한 산중으로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때 선비 손홍록과 안의가 사재를 털어 실록 운반에 자원했다. 당시 안의는 64, 손홍록은 56세의 노선비였다. 태조어진과 유일하게 남은 실록인 전주사고본은 정읍 내장산의 은적암(은봉암)으로 옮겨졌으며 그곳도 안심할 없어 용굴암을 거쳐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피신시켰다. 내장산에서 실록과 어진의 책임을 맡은 참봉 오희길은 손홍록, 안의, 승려와 의병 100 명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초를 서며 실록과 어진을 지켰다.


일본군은 턱밑까지 진격해오고, 다른 지역이 쑥대밭이 됐다는 상황을 전달받으며 두려움에 도망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왕명 없이 함부로 사고를 여는 것은 중책사항에 해당했다. 그러나 처벌을 두려워하기보다 실록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전라감사 이광과 경기전 참봉 오희길의 빠른 대처가 있었기 때문에 태조 대부터 명종 대까지의 역사를 지키고 단일왕조 역사서로 가장 규모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유산이 보존될 있었다.


전라에서 강화까지

1년여 동안 내장산 비래암에 있던 실록과 태조어진은 아산과 강화도, 안주를 거쳐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으며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됐다. 왜란 이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새로 인쇄하고, 서울의 춘추관과 강화의 마니산, 경북 태백산, 평북 묘향산, 강원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해 보관했다. 


묘향산사고본은 인조 명과의 관계악화 이후 전북 무주군 적상산사고로 이전됐으며, 마니산사고본은 병자호란 훼손되어 현종때 보수, 옆의 정족산성에 사고를 새로 지어 이전했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5 사고로 운영됐으며, 철종실록까지 보관됐다.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 사고에 보관됐으며, 이후 정족산 사고로 이전되어 보관됐다. 현재 정족산사고본은 1,187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고의 유구를 찾아서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이 보존되어 현재까지 전해지지만, 실록을 보관했던 사고는 대부분 소실되어 원형을 확인할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조선 전기

조선 전기의 사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부 문헌을 바탕으로 외사고가 있었던 위치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교통이 편리한 성내, 또는 관아 부근에 세워졌음을 있다. 


외방의 3사고(史庫) 서적(書籍) 수장하는 곳인데 모두 관사(官舍) 붙어 있어서 매우 엄밀(嚴密)하지 못하니, 다만 화재(火災) 염려될 아니라 후일(後日) 외구(外寇) 염려도 있습니다. 빌건대 관원을 보내어 자세히 살피게 하고 인구(人口) 서로 떨어진 곳을 가려서 이를 옮기도록 하소서. 혹은 전주(全州) 사고(史庫) 남원(南原) 지리산(智異山) 옮기고 성주(星州) 사고(史庫) 선산(善山) 금오산(金鰲山) 옮기며 충주(忠州) 사고(史庫) 청풍(淸風) 월악산(月岳山) 옮기게 하되, 모두 사찰(寺刹) 의하게 하며 이에 위전(位田)400) 주고 가까운 마을의 민호(民戶)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명산(名山) 수장하는 뜻이 것입니다.”

(세조실록 40, 세조 12 11 17 문적의 관리에 관한 대사헌 양성지의 상소문)


1446 대사헌 양성지가 올린 상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0 전에 그는 이미 사고가 성내 관사와 붙어 있어 외적의 침입을 받을 훼손되기 쉬움을 지적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산속에 보관하여 사찰을 통해 지킬 것을 건의했다. 결국 그의 염려는 현실이 됐다. 사고는 왜란을 통해 크게 손실됐으며, 왜란 이후에는 외적으로부터 사고를 보호하기 위해 깊숙한 속에 설치하고 수호사찰을 통해 수비를 담당하게 했다. 역사에만약이란 없지만 그래도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게 된다. 전주를 제외한 다른 사고의 실록도 보존되고 건축물도 보존될 있지 않았을까.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세워진 5 사고(춘추관사고,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정족산사고, 적상산사고) 이괄의 (1624) 소실된 춘추관을 제외하고 구한말까지 존재했다. 외사고는 외적의 침입을 피해 모두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으며, 석축 담장을 쌓고 안에 실록각과 선원각을 유사한 형태로 전후 또는 좌우에 나란히 지은 것이 공통점이다. 현재 대부분 건축물은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초석과 촬영한 사진을 통해 형태를 추측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복원이 가능했다. 


조선 후기 5 사고의 건축적 특징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국의 사고지 실태를 조사하고 발간한사고지조사보고서’(1986) 따르면 사진과 초석을 통해 분석한 사고의 건축 유형은 가지로 나눌 있다. 첫째 중층 건물, 둘째 누각식 건물, 셋째 일반 목조 건물 유형이다. 


중층 건물 유형은 건물 구조가 상층과 하층으로 완전히 나누어지는 2 건물에 ·하층 모두 지붕을 설치해 건물의 권위를 나타내는 양식이다. 하층은 모두 개방되는 것이 보통이나 필요에 따라 판벽으로 벽을 설치하기도 했다.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 오대산사고와 태백산사고다. 오대산사고와 태백산사고 모두 건축물은 소실됐지만 사진과 초석이 남아있으며, 이를 토대로 1992 오대산사고가 복원됐다.


둘째 누각식 건물 유형은 일종의 창고 건물의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전부터 존재했다. 2 구조에 상층에만 지붕이 설치돼있다. 하층은 개방되고 상층은 벽으로 막아 서고로 이용했으며, 적상산사고가 여기에 속한다. 적상산사고의 실록각은 소실되었지만 선원각만큼은 남아 있다. 이는 5 사고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경우다. 다만 1937 수호사찰이었던 안국사로 이전, 개조되어 사찰건물(천불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원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적상산사고의 선원각과 실록각은 각각 1997년과 1998 복원됐다.


셋째 일반 목조 건물 유형은 단층 형태로 정족산사고가 여기에 해당한다. 벽을 반화반벽(화재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중인방 높이까지 바깥벽을 돌이나 벽돌로 쌓아 만든 )으로 만든 것이 특색으로 화재에 대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998 전해지는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됐다.


전주사고의 소실과 복원

성종 4(1473) 완공된 전주사고는 120년간 실록과 기타 전적을 보관하다 정유재란 이후로 소실됐으며, 아쉽게도 건축양식이나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관해서는 확인할 있는 흔적이나 기록이 없다. 현재 복원한 전주사고는 무주 적상산사고의 형태와 동일한 누각식 건물이다. 누각식 건물은 당시 일반적인 창고의 형태인  데다, 전주사고가 사고들 중에 가장 먼저 복원된 만큼(1991) 당시 원형을 확인할 있었던 무주 적상산사고를 본떠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위치만큼은 정확하게 확인할 있다. 이는 조선 전기 외사고 중에서도 유일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경기전 동편에 사고의 자리를 정하고 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경기전동원내」라는 서적에 따르면 경기전 동쪽 안에 실록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경기전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을 통해 실록각의 위치를 확인할 있었으며, 유구 없이도 동일한 위치에 실록각을 복원할 있었다.




유산 제대로 보기, 제대로 잇기


포쇄형지안, 사고를 기록하다

실록 806 576.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의 양이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인할 있었을까. 급하게 피신하던 중에 기록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전주사고포쇄형지안덕분이다. 종이는 습기에 약해 곰팡이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사고에서는포쇄 실시해 실록 보존에 힘썼다. 포쇄는 서적에 바람을 쐬어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앙에서 외사고에 3년마다 관리를 파견해 포쇄를 실시하고 기록한 것이실록포쇄형지안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기록된 포쇄형지안은 전주사고의 것이 유일하다. 특히 선조 24(1591) 기록된 포쇄형지안은 임란 직전의 기록으로 이를 바탕으로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과 기타 전적의 내용을 확인할 있었다. 


왕명을 받아야만 있었던 사고의 문을 활짝 열고 서적들을 꺼내 펼쳐가며 습기를 말리는 포쇄는 사고 내에서도 중요한 행사였다. 전주시는 사고를 복원한 활용에 대해 고민하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포쇄 재현 행사를 마련했다. 이후 매년 행사를 진행하며 어진 봉안 행렬과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행사 하나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 19이후 행사는 중단된 상태다.



과거의 유산에서 오늘의 유산으로

사고를 활용한 행사는 전주의 포쇄 행사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 무주 적상산 사고에서는 지난 2019 조선왕조실록 봉안 행렬 봉안식 재현 행사가 열렸다. 역시 코로나 19 인해 현재는 중단된 상태. 전주사고와 오대산사고는 전시관을 통해 사고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오대산사고는 오대산사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실록과 의궤의 귀환을 맞아 새로이 전시관을 지었다(왕조실록·의궤박물관). 전주사고는 실록각 내부를 전시관으로 조성해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사고의 가치를 시민 관광객들에게 알리는 통로로 작용했다. 최근 전주시는 실록각내 전시실을 새롭게 개편해 더욱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계획 중에 있다.


현재 사고의 가치는실록의 보관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을 사고에서 보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고의 가치는 조선왕조실록의 가치와 함께 간다. 조선왕조실록의 실물을 직접 보기는 어려워도 우리는 언제든 복원된 사고를 방문할 있다.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걸어보며 과거를 경험한다. 사고를 보관하던 장소는 이제 사고의 역사부터 실록의 역사까지 품고 있는 역사 재현의 현장이 된다. 


재현은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다. 과거의 유산을 오늘의 유산으로 삼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있다. 보존과 발전을 통해 더욱 풍성한 우리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토대가 마련된다. 사고 역시 보존을 위한 복원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유산으로 발전해야 한다.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포쇄나 봉안식 등의 행사를 온라인 콘텐츠로 제작하는 방식도 있을 것이다. ‘공간 의미는 이제 오프라인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온라인으로 확장된다. 사고라는 공간이 가지는 가치 역시 확대되어야 때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