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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9 | 기획 [임실 필봉농악]
농악 대중화와 세계화 함께 이룬 마을 굿의 힘
신동하, 성륜지(2022-09-14 11:01:17)

기획 | 도시의 유산 | 임실 필봉농악

농악 대중화와 세계화

함께 이룬 마을굿의 힘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살아남아 농악의 세계화를 이끌어낸 곳이 있다. 바로 임실이다. 임실은 연중행사로 각 읍, 면의 농악단이 참여하는 농악경연대회가 있고, 임실 문화원과 임실국악협회에서 실시하는 문화 강좌 또는 지역 문화활동에 각 지역 상쇠와 대표들이 연합체를 구성하여 참여한다. 각 마을 농악단은 정월대보름굿이나 면민의 날, 체육대회 등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공동체 문화의 뿌리깊은 유대를 자랑한다. 


임실의 농악은 필봉농악이 뿌리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임실농악은 이제 임실만의 고유한 자산이 되었다. 농악의 대중화, 나아가 세계화를 이끈 필봉농악은 어떻게 오늘날 한 도시의 자랑스러운 자산이 될 수 있었을까. 이번 호에서는 농악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필봉 농악의 과거와 오늘을 만났다.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말세 

-필봉농악이 펼치는 굿


굿, 매구, 풍장 등 여러 이름을 가진 농악은 민중의 예술이었다. 전통적으로 농악은 근대 이전의 풍속과 민간신앙을 토대로 연행되었고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알음알음 전승되었다. 민중들의 현실 인식과 비판의식을 공연의 형태에 고스란히 담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북의 농악은 크게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진다. 좌도 농악은 동부 산간지대에서 전승되는 것을, 우도 농악은 서부 평야지대에서 전승되는 것을 말한다. 좌도 농악은 마을 구성원의 축원을 비는 마을굿의 성격이, 우도 농악은 전문 연희패를 중심으로 한 풍물굿의 성격이 짙다는 차이가 있다.


임실의 필봉농악은 호남 좌도농악의 대표 격이다. 1987년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상쇠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필봉농악은 여전히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전통을 잘 보존해 굿의 절차와 내용을 살펴보기 좋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필봉마을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정월 초사흘부터 대보름 사이에는 마을의 집집을 돌며 집안의 안녕을 비는 마당밟이가, 정월 초아흐렛날에는 마을 당산에 제를 올리는 당산제가, 정월 대보름날에는 마을 앞 징검다리를 보수하며 노디고사굿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매굿


매해의 마지막 날에는 매굿이 벌어진다. 매굿은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악귀를 몰아내고 마을을 신성하게 만들기 위한 제의다. 밤이 오고 주변이 억해지면 나발수나 징수가 신호를 세 번 울린다. 풍물패는 이에 맞춰 동청마당에 모이고 횃불을 잡고 당산나무로 가서 당산께 굿이 시작함을 아뢴다. 이후 매굿은 공동샘굿과 집돌이를 거친 후 마무리된다.



 마당밟이 굿


신년을 맞이하여 풍물굿을 치면서 나쁜 액을 물리치고 좋은 복을 불러들여 집안의 평화를 기원하는 굿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신밟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격적인 시작 전 당산과 공동 샘에 굿을 올려 당해 풍년이 들 수 있도록 빌고, 마을의 모든 집에 들어가 문, 부엌, 뒷마당, 우물, 곳간, 앞마당 순으로 돌며 가신들을 놀린다. 



당산제와 당산굿


당산제 날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들은 모여 제물을 장만하고 당산나무 주위에 금줄을 칠 제주를 정했다. 제주는 보통 궂은 일이 없고 부정이 끼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당산제는 할머니 당산을 모시는 윗당산제로 시작한다. 간소하게 윗당산제를 마치고 밑집에 다다르면 제대로 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영기를 앞세우고 아랫당산인 할아버지 당산으로 이동한다.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유교식 제례가 끝나면 굿패와 주민은 술과 음식을 음복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판굿을 벌인다. 판굿을 마치면 다시 마을로 돌아와 다시 한번 굿을 치룬 후 당산제를 마친다.



걸궁굿


걸궁이란 정월보름이 지나서 다른 마을에 초청되어 하는 굿이다. 그렇기에 그 마을의 예의와 풍물법도 또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굿패가 영기를 앞세워 걸궁갈 마을에 당도하면 나발수가 ‘뿌우’하고 나발을 길게 분다. 그러면 마을에서도 나발수를 보내 화답하게 한다. 이렇게 시작된 걸궁굿은 문굿–들당산굿–마당밟이굿–판굿–날당산굿으로 진행되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닭으로 쑨 죽과 찰밥으로 빚은 술을 나눠 먹으며 논다. 이때 마련된 경비는 농악패의 살림에 보태거나 다른 큰 굿을 위해 쓰인다.



판굿


이들 굿판의 마지막 순서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다. 바로 판굿. 앞서 살펴본 큰 굿들은 세시풍속에 따른 규범과 시기가 정해져 있고, 지켜야 할 엄숙한 원칙이 존재하지만 판굿은 그렇지 않다. 판굿은 풍물굿 자체를 즐기고 노는 것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간단하게 치는 마당 판굿과 굿패가 지니고 있는 모든 기량을 다 보여주는 큰 판굿이 있다. 큰 굿이 끝나고 치는 판굿은 전자의 경우에, 농악경연대회에 나가서 치는 판굿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마을의 기능이 줄어든 현대에는 판굿 위주로 전수되고 있다.




60년 세월 이어온 명인들의 의지와 열정

-필봉농악을 지켜온 사람들


1대 상쇠 박학삼과 2대 상쇠 송주호


1920년대, 놀거리가 없던 시절 필봉마을 사람들은 근처 강진면에 살고 있던 상쇠 ‘박학삼’ 명인을 초청한다. 그는 필봉마을에서 논과 주막을 받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풍물을 가르쳤고, 점차 규모 있는 마을굿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는 굿판의 흐름을 잘 읽기로 유명하여 섣달이나 정월에 굿을 치러 나가면 한두 달이 지나서야 집에 올 수 있을 정도였다. 


박학삼은 이화춘 명인으로부터 농악을 배웠다. 이화춘 명인의 내력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임실군 강진면에서 지내며 진안, 장수, 순창, 남원 인근에서 활동했다는 구술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는 큰 굿이 벌어질 때면 장구 명인이었던 장두만과 함께 농악을 치던 무속인 출신의 농악 잽이었다.


박학삼으로부터 필봉굿의 상쇠를 이어받은 이는 부쇠를 치던 송주호 선생이다. 박학삼과는  동서지간으로 그에게 직접 쇠를 배웠다. 가락을 잘 치고 상모놀음 중 전조시를 잘하기로 유명했으나 마을에 상주하지 않았고 나이가 연로했기 때문에 3년여 만에 상쇠 자리를 내려놓았다.


3대 상쇠 양순용


양순용 명인은 필봉 풍물굿의 현재 모습을 만든 장본인이다. 박학삼 아래에서 끝쇠를 치기 시작하여 18세의 나이로 필봉농악의 상쇠가 됐다. 어린 나이에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사람들로부터 ‘애기 상쇠’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그는 연행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뛰어난 상쇠들을 찾아다니며 풍물굿의 다양한 가락을 배웠고, 당시 걸궁굿 연합 상쇠를 맡았던 김문식에게 부포놀음을 전수받기도 했다. 24살부터는 걸궁패에서 활약하며 풍물굿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 농악의 인기가 올라가며 각종 농악경연대회가 많이 생겨났다. 이 무렵 양순용은 마을의 10대 젊은이들에게 농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필봉마을 사람들로만 구성된 농악패가 구성되었는데 그 수가 60명이 넘었다. 다른 지역의 대학생들도 입소문을 듣고 하나둘 굿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양순용은 본격적으로 다른 지역의 명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78년 양순용 선생이 이끄는 필봉농악은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입상을, 이듬해에는 장원을 차지했다. 1984년에는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는 등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학생들과 동호인들이 풍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필봉농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여러 사정으로 남원의 호동마을로 이사하게 된 이후 필봉농악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방학철만 되면 작은 마을이 가득 차서, 결국 폐교 하나를 인수하여 그곳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양순용 명인이 5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장남인 양진성 보존회장이 뒤를 이어 필봉농악 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굿은 푸지게 치고 우리네 삶도 푸져야 한다

-필봉마을굿축제





임실필봉농악보존회는 농악을 보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 문화거점 및 생활문화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봉문화촌’은 지난 2001년 ‘임실필봉농악보존회’가 400여 년간 전승되어 온 임실 필봉굿을 보존•활용하기 위해 조성했다. 다양한 공연 및 체험 행사와 전수 교육을 통해 필봉굿 확산을 이어내기 위한 공간이다. 27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통의 맥을 이어온 필봉마을굿축제는 코로나19로 전국의 축제들이 중단되는 비상상황 속에서도 비대면으로 연속성을 확보했다. 전통을 계승하려는 노력과, 현대에 발맞춰 걸어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국가무형문화재 6대 농악에서 빛나는 필봉농악의 가치


올해 필봉마을굿축제는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필봉문화촌에서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객들과 전통예술인들로 축제는 성황을 이루었다. 11일에는 필봉 산신당에서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산신제가 열렸다. 필봉마을굿축제는 필봉문화촌 야외공연장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6대 농악 중 5개의 농악이 모이는 자리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았다. 축제 둘째 날인 12일부터 14일까지 진주삼천포농악, 이리농악, 강릉농악, 평택농악, 임실필봉농악이 차례로 공연을 선보였다. 각 농악은 지역적 특색이 짙어 장단도 복색도 과장도 천차만별이다. 영남농악의 ‘진주삼천포농악’은 전원이 전립을 쓰고 채상이나 부포를 돌리는 것이 다른 지역의 농악과 대조적이며 빠른 쇠가락과 활발하고 씩씩한 동작이 특징이다. 호남우도농악의 대표인 ‘이리농악’은 상쇠의 부표놀이가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발달 됐다. 비교적 느린 가락을 쓰고 리듬이 다채롭다. ‘강릉농악’은 영동지역의 험준한 지리적 영향과 함께 발전해 향토색을 잘 보존하고 있다. 논 갈고 씨 뿌려 추수할 때까지의 동작을 춤으로 표현하는 농사풀이과장은 강릉농악에서만 볼 수 있다.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일부를 일컫는 웃다리 지방의 대표 농악인 ‘평택농악’은 힘 있고 빠른 가락의 분명한 맺고 끊음이 특징이다.


호남좌도농악의 대표인 ‘임실필봉농악’은 개인의 기교보다는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요히 여긴다. 마을 공동체의 협력을 목적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굿, 잡색놀음과 노래굿, 수박치기굿, 도둑잽이굿 같은 공동체 놀이 중심의 뒷굿이 발달했다. 13일에 선보인 도둑잽이굿은 잠시 그 맥이 끊어졌지만 1999년 양진성 보존회장의 노력으로 복원된 것이다. 도둑잽이굿은 공동체적 생활에서 독단적 이탈을 방지하고 투전(노름)이 개인의 불행이 아닌 군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한 가정의 파탄을 가져온다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도둑잽이굿에는 농악의 배우인 잡색이 등장해 소란스럽게 옮겨 다니며 놀이판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노름판을 벌여 처형당했던 대포수가 살아나자 잡색들은 관중을 놀이판으로 이끌어 공연자와 관람객을 나누지 않고 함께 신명 나게 놀 판을 만들었다. 농악을 잘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함께 즐기고 어울리며 화합을 도모하는 현장이었다. 양진성 보존회장은 “도둑잽이굿은 필봉마을의 잡색놀이로 전승되어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적다 보니 잡색놀이를 잠깐 잊고 살았다”며 “코로나라는 도둑을 우리가 물리쳐볼 필요가 있다”고 도둑잽이굿을 준비한 이유를 밝혔다. 


13일에는 산대마당에서 전수교육체험인 ‘나도 전승자 상쇠뽑기’가 진행됐다. 전수생과 일반인 모두 참여 가능하며 4명의 후보 중 손주영 씨가 상쇠로 뽑혔다. 손주영 씨를 상쇠로 한 판굿 체험이 이어졌는데 앳된 얼굴의 학생부터 연세 지긋한 노인까지 풍물로 공동체 화합과 단결이 이루어졌다. 소고잽이 중에서는 열심히 장단을 맞추며 행렬을 따 라가는 외국인도 보였다. 필봉문화촌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매년 1,000여 명이 오간다는 말이 허황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전국전통연희 개인놀이 경연대회는 전통예술분야중 개인놀이로 일반인 및 전문가 구분 없이 참가했으며, 제9회 전국 양순용배 풍물굿 경연대회는 풍물굿을 중심으로 대학생, 일반인 등 전통마을굿을 보전•전승하는 단체가 참가했다.


12일 취락원에서 펼쳐지는 전통연희극 ‘어화 벗님’은 고향을 떠날 것인가 마을굿을 지킬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하는 봉필의 이야기를 그렸다. 13일에는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판소리, 가야금, 진도북춤, 설장구 등 무형유산 명인들과 풍류를 즐기는 ‘한옥풍류’도 볼 수 있었다. 12일부터 14일까지 밤 9시 30분에 진행한 ‘필봉야류 달굿’은 ‘흥이夜 문화놀이방’, ‘놀이夜 청춘놀이방’, ‘굿이夜 광대놀이방’ 세 가지 주제로 다양한 공연이 봉삐르마당에서 펼쳐졌다.



필봉농악보존회와 필봉문화촌


임실필봉농악보존회는 필봉굿의 보전과 활용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들이다. 2001년에 조성된 필봉문화촌에서는 필봉농악을 전국적 규모로 확산 및 전승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생 및 일반인 풍물동아리 회원을 대상으로 매년 필봉농악 동•하계 전수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필봉문화촌은 크게 교육시설, 숙박시설, 공연 및 편의시설, 취락원, 필봉문화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옥체험과 전통문화체험이 가능한 필봉문화촌 취락원에서는 2인실부터 단체실까지 인원에 따라 숙박이 가능하며 5월~9월 매주 토요일마다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 <웰컴 투 중벵이골>을 연다. 필봉마을 사람들의 푸진굿•푸진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만든 작품이다. 필봉농악보존회는 1995년부터 오랜 세월 동안 전통예술의 계승과 풍물의 저변확대, 전통예술인들의 사기 증진을 목적으로 필봉마을굿축제를 열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출중한 기량과 실력을 갖춘 전통예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기예를 겨루고 전통문화의 발전에 작은 힘이 되길 바라며 매년 전국단위의 경연대회도 진행했다. 농악경연대회, 문과관광상설공연 등 전통문화가 옛것으로만 치부되지 않고 계승하고 현대에 발맞춰 삶 속 문화로 녹아들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필봉농악,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서


필봉 농악은 현재 여러 가지 이유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전문가들이 모였다. 한참 굿축제가 진행되고 있던 8월 12일 금요일 오후 2시. 필봉문화촌의 필봉문화관 회의실에서는 ‘풍물굿과 몸’을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필봉농악보존회와 한국풍물굿학회가 공동 개최한 세미나에는 양진성 필봉농악보존회장, 김원민 한국풍물굿학회장을 필두로 많은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양진성 보존회장은 기조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이기도 한 양순용 선생은 풍물을 어떠한 체계 안에서 가르치진 않으셨습니다. 다만 ‘선생님 풍물을 왜 하십니까’하고 여쭤보면 매번 ‘협력하고 화합해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풍물의 기능성이나 기호적 해석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풍물의 층을 넓히기 위해서는 그런 면을 인정하면서도 생활굿을 늘려야 합니다. 연희자들의 수가 많아지기보다는 연희자들이 새로운 놀잇감을 제공해 주는 미래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필봉농악보존회는 실외악을 창극으로 개편하여 무대 위로 올리고, ‘마을굿축제’를 매년 개최하여 필봉농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공연예술이 하나의 상품이 된 현대사회에서 반드시 시도되어야 할 작업이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바로 현대에 맞는 쓰임을 획득하는 것. 이웃 나라 일본의 사자춤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일본의 사자춤은 우리나라의 농악처럼 전국에서 연행되는 세시풍속 놀이다. 전승되는 범위와 정도가 굉장해서 ‘사자춤은 일본 민속예능의 7할을 차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2011년 일어난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지역 커뮤니티가 와해되면서 많은 곳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자춤’이 살아남아 마을을 살린 경우도 있었다. 바로 미아기현의 다케노우라 지역. 쓰나미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불안감을 사자춤으로 승화시켰다. 호텔의 어메니티로 받은 방석과 슬리퍼 등으로 사자를 만들어 모두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6-7년간 이어진 임시주택의 생활에서도 마을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필봉굿도 이미 이러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굿은 1920년대 마을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판이 되었고, 1970년대에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만나 꽃을 피웠다. 그동안 보존회가 잘 닦아온 것처럼 현재의 공연 문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것과 동행하며 ‘민중성’이라는 전통적 맥락을 회복하는 일이 필봉농악보존회의 과제다. 필봉농악이 다시 한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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