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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문화저널]
영화감상 「분명히」보여주는 극적이고 예술적인 영화 깐느, 그리고『패왕별희』
김옥희 자유기고가(2003-09-23 10:49:24)
1. 영화는 본래 제작자들의 손을 떠나면 그것은 관객의 것이다. 보고난 뒤의 느낌도 그럴 테지만 해석 또한 그럴 것이다. 굳이 그런 의미에서만은 아니지만 영화『패왕별희』를 이야기하면서 우선 이렇게 권하고 싶다. 중국영화나 극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가서 보시라는 말인데 다소 어설프지만 틀림없는 말이다. 2. 이 시대에 이름 있는 영화제는 상당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 나름대로 모두들 특징과 내거는 개성이 있으니 어느 것이 권위적인가 하는 문제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 나름대로 또 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가장 권위 있다는 영화제를 꼽자면 아마도 아카데미와 칸느영화제인 것 같다. 금세기에 있어서 자본주의 문명의 기린아 미국, 아카데미와 역사와 전통의 자존심으로 감겨있는 프랑스적 깐느의 기묘하고 다소 작위적인 대결은 사실인 즉 이 시간까지 끝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와 같은 2분법 이라면 사실 승리자는 아무래도 헐리웃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에 들어서 유럽영화계에 마치 노르망디 상륙처럼 밀려간 스티븐 스필버그 사단이 주목되지 않을까 싶다. 보도에 따르면 유럽의 영화를 필두로 이른바 유럽적 교양계층의 자존심을 몹시 상해보린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가 프랑스가 내건 몇몇 간판 영화제를 석권해버리는 헐리웃의 쾌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더 나아가서 유럽적 문화풍토에 일격을 가하고 미국의 영화가 우루과이 라운드가 아니더라도 유럽에 파고든다니 유럽영화계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뒤돌아보면 본래 상황은 그러지를 못했다. 어느 해인가 신문보도를 보았더니 극영화, 즉 흥행을 떠나서 예술영화에 깊은 콤플렉스에 괴로운 헐리웃이 유럽진출의 전진기지로 깐느를 노리고 영화『지옥의 묵시록』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상대는 독일계열의 『양철북』.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대비였겠는가. 월남전의 쓰라린 아메리카니즘의 정신적 허무를 극화해서 우리 미국의 정신도 이제는 너희들이 보는 것처럼 천박하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확립되었음을 선포하겠다는 『지옥의 묵시록』의 상대는 동구라파의 전통적 문화가치의 또 다른 허무를 극화시킨 양철북이었다. 그러나 깐느는 예비심사과정에서 양철북을 선택해버렸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인데 헐리웃의 어떤 건맨이 그만 깐느의 심사위원을 상대로 거액의 로비를 벌여 결정을 뒤엎고 『지옥의 묵시록』을 올린 모양이다. 더 가관인 것은 그다음. 일본의 어떤 연예기자가 이 정보를 입수 발표해 버리는 코미디 같은 해프닝이 연출되고 깐느의 일부 양심들이 항의하고 결국은 『양철북』이 그랑프리가 됐다. 이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상당히 흥행이 되었던 것 같다. 아마 『지옥의 묵시록』쪽이 나았겠지만. 3. 언제부터인가 깐느는 물론 영화제라는 것이 그렇겠지만, 대단히 우회적이다. 영화주제의 개성이랄까 평범한 주제의 영화를 통한 감동적인 영상이 아니라, 특별한 테마 다소 특이한 영상미를 통한 자극적 태도로 그들의 전통과 자부심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건강성은 있다. 『피아노』의 '인간 내면의 열정'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주제『패왕별희』에서 보여주는 서사시 같은 영혼의 문제(LA타임즈의 평)는 여전히 건강하고 그것은 깐느의 명맥이다. 『패왕별희』를 동성연애를 다루는 영화라고 본다면 그것은 『피아노』를 사랑을 위해서 헌신하는 여성의 애정심리에 관한 영화라는 이야기보다 더 넌센스다. 영화예술의 사회주의를 극복하는 화려한 데뷔로 이 영화는 중국의 현대사에서 경극배우들이 벌이는 인생의 유전이며 첸캉커라는 중국의 뉴씨네마 기수가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표현이다. 그가 보여주는 영상미는 비록 우문이어서 진수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아름답다. 영화 『붉은 수수밭』하고는 다르다. 보다 극적이고 예술적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유전의 표현방법과 색체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 아마 중국의 대단함을 보여준다. 이른바 군벌들이 중국을 분할하여 거점을 이루고 있을 때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경극배우와 삶의 경극의 변천을 다루는 중국문화의 소개라면 우선은 대충 맞는 이야기기 된다. 한 배우의 경극에 대한 헌신. 정체적일 위험에도 불구하고 조직 속에서 개인의 삶을 개척하기도 하고 마무리 짓는 중국적 정서, 그것의 예술적 승화를 '보여주는'영화인 것이다. 다큐멘터리식의 시나리오는 이영화의 흠이다. 장면과 장면을 잇는 비약, 그리고 화면처리의 변화에서 오는 약간의 무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주인공이 보여주는 연기의 과장과 다분히 작위적인 무리 속에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이야기의 흥미는 대부분 남자주인공(배역은 여자이다, 혹 깐느의 어떤 논객이 있어 남자를 여자로 만들어서 그것을 예술로 말하는 비인간적인 작품이다라는 반론이 일지는 않았을까)의 연기에 의존한다. 그이 다소 딱딱한 표정과 연기적 행동은 어색하지만 영환의 문제를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아주면 좋을 듯 하다. 아니다. 경극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고전적 예술정신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우리들 중의 일부는 늘 외국영화만 보고 이야기하는 식상함이 있다. 그것의 이유야 여러 가지인 것이고 지금 무슨 골목 안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사실 예술정신 그 자체만으로 볼 때 무슨 민족적 이데올로기가 있겠는가?)남의 나라 영화를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많이 보아서 서당개 삼년이니 풍월을 읊는 건데 그래도 보긴 많이 보아야 한다. 지적소유권이 잇는데 지적제국주의가 있다면 아이러니 일 테지만 그런 걸 따지는 건 좀 진부하다. 그 이유는 우리 말 하지말자. 이쯤에서 우리영화 서편제가 떠오른 건 좀 엉뚱한 생각일까. 국제화시대에 갈등을 느낄 수도 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내시를 만들어 없애고 전족을 풀었던 선구자들이 중국문화의 새로운 장을 모색한다면 우리도 해답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뉴 시네마 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쩌면 다 부질 없지 않을까?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영화 관람의 재미, 삶의 작은 행복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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