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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기획 [전주, 사대문 안 풍경 ②]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도심 속 동네
이경진(2016-08-16 09:59:17)




"그러는 동안" 나는, 아니 그때 나는 어떤 벗이었을까. 숨이 제법 차오른다. 완산도서관은 완산칠봉(完山七峰) 사이에 오래된 절집처럼 숨어있다. 완산칠봉은 전주천 건너에 옛 전주부성 남문을 마주보고 13개의 봉우리가 그만그만하게 모여 있는 산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 산자락이 전주부성 쪽으로 흘러나가다 전주천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선 게 바로 초록바위다. 초록바위는 조선왕조의 시조가 묻힌 건지산(乾止山)과 호응하는, 곤지산(坤止山)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건(乾)과 곤(坤)이 각각 하늘과 땅을 의미하므로 참 어마어마한 이름이다. 이 작은 봉우리가 왜 이렇게 대단한 이름을 얻게 됐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초록바위가 조선시대 때 죄인을 효수(梟首)하던 곳이고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인 김개남이 처형된 곳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묵직한 이름이 어느 정도 수긍된다. 그래서일까. 유독 초록바위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공수내길 근처부터 용머리고개까지 이르는 완산동 일대에, 수많은 점집이 몰려있다. 곳곳에 신대가 꽂혀있으며 백두대간에서 웬만큼 유명한 산의 이름은 다 찾아볼 수 있다. 씻김굿이 필요한 넋이 많아서인지, 땅값이 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무당들에게는 완산동 일대가 특별한 장소인 것 같다. 초록바위에는 이팝나무 군락이 있어서 이런 핏빛 역사를 무색케 하는 흰 꽃이 봄마다 절경을 이룬다.
초록바위 옆은 원래 흑석골에서 내려오는 물길, 즉 '공수내'가 있던 자리이다. 그 물길이 전주천으로 합류되기 직전에 곤지산에 부딪치는 모습이 마치 물로 공격하는 모습 같다고 해서 공수내(攻水川)라고 했다. 또한 공수내가 뿜어내는 습기 때문에 곤지산 바위가 항상 이끼로 가득하여 초록바위로 불렀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복개해서 아스팔트길을 깔았지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록바위 옆에는 완산동과 서학동을 잇는 공수내다리와 시원한 물길이 있었다. 이 초록바위를 왼쪽으로 끼고 전주천변 도로를 조금만 걸으면 골목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완산공원 쪽으로 오르면 완산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으로 가는 언덕길을 따라 오래된 집들이 늘어 서 있는데, 몇몇 집 담벼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 중 특히 낡아 보이는 집 앞에 잠시 멈춘다. 평상이 두 개 펼쳐있고 한쪽 평상에는 진홍빛 홍시가 서너 개 놓여있지만 누구도 집어가지 않는다.
이십여 년 전 나는, 시(詩)에 미쳐 '전북청년문학회'에서 문학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만 하다가 93년 즈음 대학을 나오고 보니, 살길이 막막했다. 故박배엽 시인이 전북대학교 앞에서 운영하던 <새날서점>에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았다. 서점에서 많은 작가 선배들을 알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꿈꿔왔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배엽 시인이 소개해준 전북청년문학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대학을 다닌 최은희도 만났다. 『쑥고개 편지』라는 시집으로 학생운동진영에서는 유명한 시인이었다. 문학회 사무실이 풍남동 동학기념관에 있었던, 어느 해 초겨울인가 그랬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최은희가 갑자기 홍시가 먹고 싶다고 했다. 다행히 동부시장 좌판에 홍시가 남아 있었고, 나는 선배가 내 주머니에 찔러 준 택시비로 홍시를 사줬다. 얼마 후 최은희는 결혼을 했고, 결혼한 지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딸을 낳았다. 그 아기가 지금은 대학생이라고 한다.





그 때 그 시인은 '임시사서'였다
벽에 '매화 향기 가득한 동네'라고 써 붙인, 매곡경로회관이 나온다. '동네'라는 말이 새롭다.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이 사용했던 말인데, 요즘은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어느덧 '우리 동네'보다 '우리 아파트'란 말이 더 익숙해져버렸다. 드디어 완산도서관이다. 흔히 완산도서관이라 부르는 전주시립도서관은 원래 경원동, 지금의 KT전주지사 자리에 있었다. 그 경원동 시절 도서관에서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선생이 임시사서로 일했다.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박봉우 시인은 등단 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표현한 참여시를 많이 썼다. 그런 박 시인이 정권에게 눈엣가시로 보인 건 당연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항상 시인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결국 박 시인은 1975년 「서울하야식(下野式)」란 시를 발표하고 전주로 '하야'한다.
박 시인과 남다른 교류를 했던 백학기 시인에 따르면, 시인이 고향인 광주로 가지 않고 전주로 내려온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술 한 잔 먹고 갈라고 왔어야. 또 (신)석정 선생도 계시고, 전주가 좋잖냐?" 그냥 술 한 잔이나 먹으려고 들렀던 박 시인은 그대로 전주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박 시인이 임시사서로 번 수입으로는 세 자녀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서 항시 술값이 부족했고 집에 쌀이 떨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낮술을 마시고 경원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지인들에게, 몇 백 원씩 술값을 '걸립(乞粒)'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내가 아는 선배 작가들 대부분이 박봉우 시인에게 술값을 대준 추억을 가지고 있다. 전주문단에 수많은 기행(奇行)을 남긴 박봉우 시인은 1990년에 작고하여 전주효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세 자녀의 이름마저도 하나, 나라, 겨레로 지었던 민족시인 박봉우는 그렇게, 광주사람으로 태어나 전주사람으로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전주시립도서관 하면, 박 시인을 먼저 떠올린다.
도서관과 매곡경로회관 사이에 난 길, 완산공원꽃동산으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집들이 산기슭에서 산등성이까지 어깨를 맞대며 만든 골목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날맹이에 이르게 되고, 초록바위와 완산칠봉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만약 봄에 이곳에 왔다면 그대로 이정표를 따라 완산칠봉 숲길로 들어서는 게 좋다. 연산홍과 철쭉, 왕벚나무와 사과나무 등이 수백만 개의 꽃망울을 터트려 보여주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시민 한 분이 선친의 묘가 있는 그곳에 40여 년 동안 꽃나무를 심어 만든 꽃동산이다. 갈수록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발길이 많아지자, 최근 전주시에서 매입하여 정자와 휴식공간, 산책로를 만들고 시민에게 개방했다. 외지인은 잘 모르는 숨은 명소다.





신동엽처럼, 그 시절 치열했던 '선생'들이 있었다
나는 어느 길로도 가지 않고 두 길 사이에 난 좁은 언덕길로 내려간다. 공수내길로 나가는 길이다. 곳곳에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블록으로 쌓은 담이 보인다. 어느 집은 마당이 직접 길로 연결되고 어느 집은 길옆이 바로 옥상이다. 요즘 뜨고 있는 자만동 벽화마을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그대로 재현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곳은 아직도 원주민이 살고 있는 동네라는 점뿐이다. 공수내길로 내려오니 배가 고파온다. 오랜만에 '소문난집'에 가보기로 한다. 서서학동사무소 쪽으로 조금 올라가 큰길로 나가면 길가에 있는 콩나물해장국집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역시 외지인들은 잘 모르는 맛집이다. 뜨거운 국밥과 시원한 깍두기와 신건지를 반찬으로 이 집은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 '착해서' 전주음식의 장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내가 생각하는 전주음식의 가장 큰 장점은 싸면서도 맛있는 것이다.
뱃속이 따뜻해졌다. 큰길을 건너 교대부속초등학교를 지나서 전주교육대학교 쪽으로 걷는다. 전주교육대학 인근에도 은근히 맛집이 많은데, 대표적인 곳이 교대입구 사거리에 있는 '미리내 포차'다. 원래 실내포장마차였지만 장사가 잘되어 지금은 어엿한 음식점으로 확장됐다. 막회와 소바가 전문인데 겨울에는 포항에서 직접 공수한 과메기도 판다. 전주교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설립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국립대학교이다. 예전에는 정문에 담이 있었고 그 담 너머로 아름드리 버즘나무가 많았다. 빨리 자라기 때문에 삼사십 년 전만 해도 버즘나무를 많이 심었지만 꽃가루가 심하게 날릴뿐더러 목재로서 쓸모도 적어서 요즘은 거의 심지 않는다. 그 나무들을 다 베고 담까지 없애서 전주교육대학교는 탁 트인 경관을 갖게 되었다.
전주교대 교정에는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시인, 신동엽의 시비(詩碑)가 있다. 시인은 전주교대의 전신인 전주사범학교를 나왔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교육대학교는 가난한 수재들이 즐겨 가는 학교였다. 국립이어서 등록금이 쌀 뿐 아니라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충남 부여 출신인 신동엽 시인이 전주사범학교로 진학한 이유도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일제강점기 말에 전주사범을 다녔던 시인은, 항상 문학, 종교, 사상서에 파묻혀 살았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극작가 최기우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나이 지긋한 토박이들은 시인이 흑석골에서 야학을 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백면서생처럼 보였지만 실은 암담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실천가였던 것이다. 시인의 미망인인 인병선 여사는 전주교대에 시비를 제막하게 된 이유를 전주사범시절이 "시인의 시정신이 형성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정적인 언어로 민족정서와 역사의식을 담았던 시인, 신동엽을 키운 건 팔할(八割)이 전주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래된 동네에 들어온 '거슬리지 않는' 예술
발길을 돌려 서학동 예술마을을 돌아본다. 이 마을은 전주교대와 전주a교대부속초등학교 사이에 예술인들이 작업실과 공방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첫 삽을 뜬 이는 음악가 이형로와 소설가 김저운 부부다. 원래 이들은 강 건너 교동에 살았다. 하지만 전주한옥마을에 관광객이 늘어나고 급격히 상업화되자 2010년에 서학동으로 이사했다. 마을에 있던 한옥을 고쳐서 '벼리채'라는 작업공간을 열었다. 그 이후로 화가, 행위예술가, 사진가, 연주가 등 수십 명의 예술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대부분 이전에 전주한옥마을에서 거처했던 예술인들이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원주민들이 아직도 많이 살고, 그들이 이용하는 동네쌀집이나 마트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좋다. 더욱 좋은 것은, 이곳에 있는 문화공간들이 생활공간의 원형을 유지한 채 예술인의 창의력을 덧대어 만든 곳이어서 이주민의 문화공간과 원주민의 생활공간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이것이 독특한 장식물과 색깔로 꾸며진 새 공간들이 오래된 동네경관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이다. 골목을 따라 듬성듬성 박혀있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기웃거리기만 해도 한나절이 그냥 지나갈 것 같다.
전주교육대학교 정문에서 승암산(치명자산)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국립무형유산원이 나온다. 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유산을 전승보전하기 위해 문화재청에서 설립한 기관이다. 2014년에 정식개원을 해서 아직은 전주시민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무형유산원의 후문에 다다르면 남고산에서 내려온 작은 냇물이 나오고 서학파출소가 보인다. 파출소부터 물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 서학동 산성벽화마을이다. 옆 마을이 예술인들이 모이면서 들썩거리기 시작하더니 이곳까지 그 바람이 불었다.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고 옛 가게들이 꽃단장을 했다. 남고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새로 난 큰길이 앞을 막는다. 길이 끊기면 유대관계도 끊기는 법. 그래선지 산성경로회관을 기점으로 나뉘는, 길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곳으로 바뀌었다.






곳곳, 사이사이 여전한 동네가 있다
큰길을 건넌다. 간판만 남아있는 '산성세탁소'에 이어 '산성방앗간'과 '산성쌀상회'가 나오고 '동네수퍼'가 보인다. 동네수퍼 옆으로 들어서니 실핏줄 같은 골목길들이 산등성이까지 퍼져있다. '좁은목 약수터'로 넘어가는 등산길을 찾다가 '백학야학'을 운영하는 백학교회를 발견한다. 백학야학은 내가 대학 다닐 때도 들어봤을 정도로 상당히 오래된 야학이다. 이 동네의 골목길은 자만동이나 완산동의 골목길보다도 훨씬 더 좁고 복잡하다. 길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가보면 신기루처럼 길이 있다. 산과 동네의 경계도 모호하다. 많은 집이 크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다. 등산길을 찾다가 만난 동네사람에게 이것저것을 묻는다.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어느 집에 자취방이 났는지 손금 보듯 훤하다.
사전적으로 보면 동네는 '내가 사는 집의 근처'를 의미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네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일상생활을 통해 신뢰관계를 맺는 물리적 공간이자, 자신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장소성(場所性)'이 확장된 정서적 공간이다. 그러므로 동네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가 '곳곳'에, 주거지 '사이사이'에 존재해야 된다. 장소란 개인의 경험이 투영돼 의미화 된 공간을 말한다. 예컨대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네점방, 동네쌀집, 동네빵집, 동네술집과 같은 곳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윗동네는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동네의 모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막상 동네사람들은 이런 동네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불편하고 땅값이 싼 산동네일 뿐이다. 도시에 살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온 동네 김장김치의 맛을 볼 수 있었고 장례도 동네에서 치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첫 회에 나왔던 장면, 초저녁에 온 동네아이들이 대접을 들고 음식을 나누러 다니는 모습이 낯선 게 아니었다. 단 한 세대도 안 되어 우리 삶의 형태가 너무 많이 변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일까.
등산길에 오르니 서학동과 전주천, 한옥마을 일대가 훤히 보인다. 예전부터 전주는 무엇을 만드는 곳이라기보다는 무엇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조화로운 맛으로 섞일 때까지, 풀어놓은 듯 조이고 조이는 듯 풀어주는 산조(散調)의 가락처럼, 기다려주는 게 전주의 문화였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소리꾼이 전라감영으로 모였고 쌀과 음식이 모였던 것이다. 또 그래서 전주에서 신동엽 시인이 학교를 다녔고, 신석정 시인이 시를 썼으며, 박봉우 시인이 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급하게, 또 쉽게 무언가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닐까. 제법 짱짱했던 햇살이 벌써 힘이 떨어졌나보다. 갑자기 한기가 돋고 숨이 가쁘다. 이 등산길을 따라 남고사를 거쳐 흑석골까지 넘어가려했지만 그냥 큰길로 내려가기로 한다. 어둠이 들이닥치기 전에 벌써 불을 밝히고 있는, 저 도시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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