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6.9 | 기획 [전주, 사대문 안 풍경③]
수 천 번의 약속, 우리는 거리에서 만났다
전주 경원동, 다가동, 중앙동
김희경(2016-09-19 09:23:57)




그때 우리는 눈부신 젊음이었다. 눈물겨운 젊음이었다.
젊음의 추억은 거리를 부유하는 풍경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이 기억(memory)에 있음에도, 우리가 온전히 다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지나온 시간들을 이 거리는 분명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는 '나'의 다른 모습이고, 자아를 더듬어가는 길잡이다.
우리는 거리 위에 약속을 부려놓고, 거리 위에서 만났다. 그때 우리는 '관통로 네거리'에서 만나자는 말을 수천 번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툴고 들뜬 연애를 하며 설렜고, 흥청거렸고, 미울 것도 없는 이별도 맞았다.




그 자체로 바로 '나'였던 거리
수많은 젊음의 각기 다른 자아들이 이 관통로 네거리에서 한 시절을 맞았다. 이곳에서 술에 취해 비틀대기도 했고,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주의 대표적인 대형 서점 '민중서관'에서 책을 고르기도 했다. 민중서관이 약속장소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늦는 사람이 미안할 일도, 기다리는 사람이 부아가 날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 하릴없이 들락거리는 동안, 우리의 지성은 조용히 깨어나 함초롬 꽃을 피웠으리라.  
20년 전만 해도 이 관통로와 충경로는 세련된 옷집과 호프집, 서점, 약국, 커피숍 등이 밀집해 있었는데, 젊음은 이 거리를 쫓고,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시장경제'는 젊음의 소비를 쫓아 서로 시너지를 내며 번성해나갔다. 
대체로 병무청 네거리에서 다가교 사이의 직선도로를 관통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관통로와 충경로로 구분해 불렀다. 병무청 네거리에서 관통로 네거리까지는 미술학원가로 유명했고, 전주에서 그림 좀 한다는 친구들이 이곳에 왁자하게 모여들었다. 그래서 당시 성업 중인 미술학원이 꽤 많았다. 풍문에 의하면, 당시 미술학원을 운영했던 원장들 몇몇은 전주의 신흥부자 대열에 낄 수 있을 만큼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잘 나가는 미술학원과 화랑, 미술용품점 등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관통로 네거리에서 충경로까지는 백화점과 커피숍, 패션몰, 술집, 치킨이나 피자,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점으로 북적였고, 이 거리 골목에는 막걸리집부터 세련된 카페까지 유흥문화의 메카로 각광받았다. 지금은 백화점은 없어지고 패션몰도 이름과 사업자를 바꿔가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전의 영화를 잃은 안타까운 몸부림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전주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사통팔달의 중심이 '팔달로'라면, 그 길을 끼고 번화가의 흥망성쇠를 가장 극적으로 겪었던 곳이 바로 관통로 네거리, 충경로 부근이다. 지금은 구도심으로 밀려나 번화가로서의 화려함은 사라졌지만, 한옥마을의 부흥, 전라감영으로 복원될 옛 도청사,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거리 등과 인접해 있어 조용히 옛 명성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전주의 손맛이 키운 화려한 가맥문화
우리가 즐겨 말하던 '시내', '다운타운' 중에서도, 경원동의 랜드마크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경원파출소 뒤편 가맥(가게 맥주)집 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전주 가맥집의 전설로 여전히 건재한 전일수퍼(현 전일갑오)는 매일 불야성을 이루며 가게 밖으로까지 꾸역꾸역 손님을 토해냈다. 이곳의 명물 갑오징어나 황태를 굽던 연탄가스 속으로 애주가들의 소란한 웃음과 고성이 뒤섞여 흩어질 때, 전일수퍼는 자신도 모르게 가게 안팎으로 일대 장관을 연출하곤 했다. 가게 안팎으로 그득그득한 손님들 때문에 한 번 놀라고, 길바닥까지 점령한 테이블에 한 번 더 놀라며, 바삭하고 고소한 황태와 갑오징어, 그리고 최고의 명물인 양념장맛에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라기 때문이다. 갑오징어는 방망이로 슬슬 두드려 보드랍게 만들어 연탄불에 노릇하게 구워내고, 비법이 든 간장에 마요네즈,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내놓은 양념장에 찍어먹으면,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해 반드시 다시 찾게 되는 곳이 바로 전주의 가맥집이다.  
전일수퍼와 쌍벽을 이루며 '전주가맥'의 신화를 이룩한 곳이 한 블록 떨어진 영동수퍼였다. 애초에 영동수퍼부터 전주가맥의 원류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튀긴 닭발로 술꾼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곳이다. 지금은 가맥집의 바이블인 황태와 갑오징어를 주 메뉴로 삼고 있지만, 영동수퍼 닭발을 더 쳐(?)주며 그리워하는 술꾼들도 꽤 많다. 가맥집 안주의 갑은 갑오징어지만, 황태는 갑을 뛰어넘는 을이요, 계란말이는 을을 뛰어넘는 병이라. 전주가맥의 핵심은 술보다는 안주에 있음을, 그것은 결국 '손맛'이었음을 타지 사람들도 금세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주 전역에서 가맥집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가맥집의 원조는 바로 이곳 경원동이라 할 수 있다. 전일갑오, 영동가맥, 경원상회, 초원가맥, 슬기네가맥, 전운가맥, 방가방가가맥, 삼천광장, 진부령가맥, 준호네가맥, 은성슈퍼, 세움가맥 등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가맥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부흥기를 맞고 있지만, 경원동에서 발원한 영동수퍼, 전일수퍼, 초원수퍼 등 가맥집의 존재들이 뿌리를 내렸기에 전주만의 독특한 가맥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경원동은 가맥집 부근에 한국전통문화의전당, 한지산업지원센터 등 전주의 정책사업으로 대형 문화시설들이 둥지를 틀고 한지문화축제나 전주비빔밥축제 등의 주요 사이트로 활용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 대한민국 관광의 1번지로 부상하면서 자연스레 사람들 품을 찾아 몰려들던 축제들은 2~3년 전부터 한국전통문화의전당과 한지산업지원센터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한옥마을이 점차 혼잡해지면서 과연 축제 운영에 적합한 장소인지 재검토가 필요해졌고, 무엇보다 이 축제들이 구도심 활력의 촉매가 되길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감동이 있으면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관계'가 세상과의 소통을 잇는 '전부'인 것 마냥, 우리는 폭주하던 또래문화의 정점을 바로 이곳에서 찍었다. 지금은 '차이나거리'라고 명명되었으나, 그때는 그저 거나하게 낮술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중국집 골방을 찾아 들어 하릴없이 어울려 다녔다. 우리가 보기엔 분명 한국 사람인데, 주문이 들어가면 갑자기 뭐라 뭐라 긴급하게 주고받던 중국말이 하도 신기하여, 그 연유를 따지며 우리들끼리 설왕설래하기도 했다. 개중에 정보통이었던 아무개가 이곳이 '화교'들이 많은 곳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온갖 상상들이 길을 잃고 헤매었을 것이다. 어느 학교 누구누구도 이곳 화교출신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증언되면서, 나와는 관계가 없을 것만 같은 그 '역사'라는 것이 현재와 이처럼 어엿하게 조우하고 있음을 어렴풋 느끼던 찰나였다.

현재의 '차이나거리'는 중국인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중국문화의 상징으로 예부터 중국인들이 마을의 대문으로 입구에 세웠던 '패루'가 이 거리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물로 조성되었다. 패루가 세워진 차이나거리는 충경로 대로변 입구부터 새 전주보건소까지 500m의 직선거리를 칭하는데, 화교들의 집성촌으로 시작해 지금은 전주시가 구도심 활성화 정책의 하나로 밀고 있는 형국이다. 2003년 일찌감치 중국 소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바닥은 전주시의 부채무늬를, 가로등은 소주시를 상징하는 용(龍)의 움직임을 형상화해 거리를 꾸몄다. 차이나 거리 입구(새 전주시보건소 옆)에 이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 표지석이 있다.
차이나거리의 사연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동성당을 짓기 위해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전주로 오게 되는데, 이들이 자연스레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집성촌을 이루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인천의 차이나 거리를 떠올린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화려한 대형 중국음식점과 중국 잡화점으로 즐비한 인천의 차이나 거리와는 달리, 오랜 시간 화교들이 운영해 온 중국요리집, 중국어 소학교 등을 제외하면 '중국풍'의 분위기를 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풍의 패루와 일제 때 형성된 연륜 있는 몇몇 건물들이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차이나거리'의 이름을 지켜내고 있다. 특히 1920년 경 옛 중국인들이 비단을 팔았던 포목점 건물이 오랜 흔적 그대로 남아 있는데, 지금은 '현대이용원' 자리로,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동판이 새겨져 눈길을 끌고 있다.
거창하고 화려한 '차이나거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지나친 상업화로 내력을 찾아보기 힘든 현대화 된 개발보다는 덜 억지스러워 아직은 더 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는 곳이다. 선조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이곳을 현재의 생활문화 터전으로 삼아 존재하고 있으니, 역사성을 소재로 한 '개발'이란 것이 그나마 근본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내력 없는 '개발'은 감동이 없다. 감동 없이 소비만 쫓는 개발은 오래 가지 않고, 내일에 대한 책임이 없어 아쉽다.
그러나 상권이 죽고 구도심으로 밀려난 이곳에 활력이 필요한 건 확실해 보인다. 여전히 맛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는 대표적 중국음식점 대보장(차이나거리와 조금 떨어진 완산경찰서 맞은편)과 진미반점 등이 건재해 있고, 몇 년 전부터는 상권이 죽은 이곳을 청년 상인들이 찾아들면서 새로운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차이나거리와 웨딩거리가 만나는 십자로 부근에 젊은 청년 상인들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소품샵이나 소규모 음식점들이 새로운 특색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매달 둘째주 토요일에 열리는 프리마켓인 '비단길 마켓' 등을 통해 이 거리를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마켓 이름을 '비단길'이라 지었으니, 역사의 한 자락을 건져 올린 젊은 청년들의 재기발랄함이 흐뭇한 여운을 준다.     


거리는 생명체처럼 꿈틀댄다
현대인의 바쁜 생활상을 반영해 결혼식 문화가 '대행'이나 '컨설팅'을 거치며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첨단화하는 동안, 웨딩거리 역시 상가들의 단순 집적에서 상호 제휴와 공조를 통한 전문상권으로 성장해갔다. 화려한 근대 건축문화 유산을 간직한 채 외양의 화려함만큼은 여느 거리에 뒤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웨딩거리는 예식과 예물, 신혼여행 등 결혼이라는 '거사'를 치르는데 한 번은 꼭 거치거나 떠올리는 새로운 명소로 승승장구했다. 현재 웨딩거리는 웨딩샵, 한복집, 여행사 등의 웨딩관련 업종이 전체 상가 중 75%가 넘을 만큼 특화된 전문상권을 형성하고 있지만, 조금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관통로 네거리'를 배회하던 전주의 오래된 젊음보다 좀 더 오래된 젊음들이 청춘의 한 자락을 이곳에 먼저 부려놓았다. 관통로 네거리가 90년대를 대표하는 젊은이들의 약속장소로 사랑받았다면, 70~80년대 팔달로 대로변에 있었던 전신전화국, 일명 '전다방'을 중심으로 한 웨딩거리가 당시 젊은이들의 대표적 약속장소였다.

당시 놀기 좋아하는 한량들과 젊은 청춘들은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중앙동으로 몰려들었다. 지난 70~80년대에 웨딩거리가 위치한 중앙동은 전주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그래서 장년층 이상에서 이곳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석상이 길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고급 의상실이나 양화점, 고급 음식점, 오랜 역사에 빛나는 다방,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들로 불야성을 이루던 곳, 무엇보다 값싼 음식점이나 주점들이 많아 젊은이들의 아지트로 사랑받았다. 당시 이곳에 자리 잡았던 '정읍집'이나 '후문집' '형제집' 같은 막걸리집은 방황하던 젊은 청춘들에게는 보물 같은 장소였다. 이 거리에 나름의 사연 하나 품지 않은 청춘이 있다면, 어찌 전주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거리 역시 여느 번화가 못지않게 도시의 변화에 따라 흥망성쇠의 길을 걸었다. 웨딩거리에 있었던 전신전화국과 산업은행, 아카데미극장이 문을 닫고 뒤이어 전주 어르신들의 사랑방이었던 '설다방'이나 '중앙다방'도 도미노처럼 짐을 꾸려 나가면서 쓸쓸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위세를 떨치던 막걸리집도 자취를 감추면서 70~80년대 이 거리가 누리던 영화는 쇠잔해졌다.
다방과 막걸리집이 문을 닫은 자리에 하나둘 모여들던 얼굴이 바로 부티크, 웨딩샵, 허니문 여행사, 주얼리샵 등이었고, 전주를 대표하는 웨딩거리로 새로운 부활을 알린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이전부터 중앙동을 뚝심 있게 지켜온 보석상과 시계점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관련업종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지금의 웨딩거리를 만들 수 있었다.

중앙동은 웨딩거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특색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는 곳으로 전주시 4대문 가운데 서문 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구도심이다. 최근에는 전주시의 적극적인 관광 활성화 전략지대로 눈도장을 찍은 곳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역사적으로 스토리가 적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1907년 전주성 성벽이 일제에 의해 철거되자 도시 중심부에서 밀려난 일본 상인들이 현재의 중앙동 일대로 모여들어 도로를 정비하면서 일찌감치 번화한 상업지구로 이름을 떨쳤다. 다가동 차이나거리의 포목점과 함께 근대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린 '박다옥'이라는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근대적인 상업 건축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이 거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박다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상업지역에 들어선 우동집으로 전주에서 처음 생긴 대형 일식집이다. 지금은 한복집과 중국음식점이 들어서 있으며, 웨딩거리에 오면 반드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다.
전라감영 복원과 4대문을 잇는 전주시 관광개발정책이 본격화 되면, 이 거리는 또  한번 크고 작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꿈틀대고 변화한다. 사람들의 추억을 거리가 기억하듯, 거리의 역사는 사람들이 기억한다. 그래서 거리와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다.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운명공동체이다.
거리는 도시의 운명과 함께 뜨고 지기를 반복하며, 긴 세월동안 숱한 젊음들의 방황과 혼돈의 몸짓을 지켜봤을 것이다. 내가 나를 잃고 헤맬 때, 아스라한 추억으로 가슴 한 켠이 서늘할 때, 이곳으로 가자. 이곳에 기억과 추억을 간직한 또 다른 내가 있다. 잃어버린 내가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