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5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요즘 애들'과 기성세대의 비겁함
윤덕향(2003-09-23 11:16:49)
전주 군산간 벚꽃 100리길 축제로 법석인 4월은 앨리어트의 싯귀가 아니더라도 정녕 잔인한 달이다. 김영랑 시인이 기다린 그 찬란한 슬픔의 봄은 이 땅에 벚꽃행락의 모습으로 찾아들었다. 봄을 맞아 피는 꽃에 국적이 있을 리 없지만 백목련의 고고함이나 진달래의 화사한 웃음도 벚꽃 속에 묻혀 버렸다. 벚나무마다에 몰려든 인파를 보노라면 이 땅의 봄에는 벚꽃만 있는 것 같다. 이 봄날 진달래, 살구꽃 복숭아꽃 화사한 곳을 찾는 아이들은 행복하다. 구태여 진달래가 아니라도 좋다. 오랑캐꽃이든 자운영이든 이름모를 들꽃이든 간에 꽃이 있고 맑은 산을 씻어오는 들바람만으로도 싱그러운 시간들이다. 꽃찾아 날아드는 나비를 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법하다. 그런 한편으로 꽃길을 거니는 봄동산에서 뛰노는 청소년들이 마냥 곱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기성세대의 색안경 탓일 게다.
고사리 손을 잡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 소풍을 가는 우리의 아이들을 보면 한없이 귀엽고 앙증스럽다. 비록 어른들이 넘치고 흐를 만큼 자리를 차지한 한 모퉁이에서 행사처럼 치루는 소풍이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덩달아 봄이 익어가는 것만 같다. 소풍날만이라도 봄공기와 더불어 화수분같이 풍성한 감정을 마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녕 소풍이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명목상으로야 분명 아이들의 정서를 함양하기 위한 따위의 미사여구가 등장한다. 그러나 참으로 정작 소풍날 하루만이라도 아니면 어린이날 하루만이라도 어린이 헌장에 있는 온갖 그럴 듯한 말들마따나 참으로 어린이를 위하는 시간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어른들 스스로의 분위기에 들떠 어지러운 놀이공간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부모의 허영을 충족시키고자 몰아댄 미안함을 상쇄하려는 듯 것처럼 꾸며대는 가식을 말할 필요도 없다. 좁은 공간과 비틀린 청소년 대책에 목청을 높이는 것도 힘에 겹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가정은 어디에 있는가? 하기야 가정이 없는 아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곰곰 생각할 때 그것이 가정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 왕성한 교육열 덕분에 학교문을 나서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거나 그나마도 시간에 쫓겨 가방을 든 채로 영어학원, 태권도학원, 서예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으로 내달을 수밖에 없다. 학원에서 돌아와서 저녁 먹고 숙제하고 잠자는 것이 우리의 아이들이다.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것은 학원을 다닐 수 없는 일부 가난한 집 아이들의 몫이고 그런 아이들과 내 새끼가 어울리면 큰 일이 날 일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국민학교만이 아니고 학년이 올라 갈수록 심해져 고등학교 3학년쯤이면 학교가 아니라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이 있다는 현실이다. 단지 먹고 자는 공간이면서 학비를 대주는 곳에 불과한 곳을 가정이라고 이름하기에는 가정이 너무 억울한 느낌이다.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석학을 양산하려고 이 난리북새통인지 모르겠다. 전 국민의 박사화를 국정지표로 삼고 있는 나라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이다. 아니 학원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나 공부에 헬쓱해진 우리의 청소년들은 차라리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 뒤안길 육체적, 경제적, 정서적으로 불우한 처지의 청소년들에 비하면 말이다.
이제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언론매체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판을 치고 어린이나 청소년에 둘러싸인 높으신 분들이 자애로운 모습이 등장할게다. 차라리 신문을 접고 방송에 귀와 눈을 막고 싶다. 청소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순진함을 이용하는 몇몇 장사꾼은 차라리 동정의 여지가 있다. 청소년을 위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그들의 감성과 이성을 오도하는 선전광고도 차라리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는 꽃이라는 소파 방정환의 말을 곧이곧대로 실천하듯 청소년을 유흥가의 꽃으로 만드는 자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선량한 시민을 자처하며 어린 꽃들을 즐겨 찾는 뻔뻔함이나 꽃을 사고파는 그들도 용서하리라는 한없는 관용에는 차라리 분노가 아까운 기분이다. 청소년을 사고파는 판에 특정한 날에 행사처럼 보여주는 관심만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인지? 시청률이나 발행부수를 위하여 청소년들의 탈선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건전한 청소년문화를 외치는 목소리는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지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한때 체육청소년부가 있었다. 간편한 정부를 표방하는 지금 체육부는 이름만이라도 남아있지만 청소년 부는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청소년 문제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청소년 문화를 위한 여건이 완비된 탓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청소년에 대한 지도와 올바르고 건전한 문화를 육성하는 일이 가치가 없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아마 어디에선가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그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싶다. 믿지 않기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네 사회의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니 말이다. 이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애써 기성세대의 비겁함을 감추려는 것이다. 허망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정부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에 유례없을 만큼 치열한 교육열은 참으로 아이의 장래를 위한 것인지 검증된 바 없는 이상(異常) 열풍 속으로 아이들을 쓸어 넣고 있다. 국제화, 개방화를 표방하자마자 그 물결에 뒤지지 않게 하려고 기를 쓰고 유치원 영어, 국민학교 영어로 아이들을 무장시키고 있다. 이러다간 미국인처럼 만드는 성형수술과 미국문화에 흡수, 동화로 한민족과 한국문화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만 같다.
그런 한편으로 '요즘 애들은...' 소위 '신세대들은...'하는 말들이 시중에 나돈다. 마치 자신의 아이들은 그 부류와는 전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기성세대들 모두가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거나 '우리 때는'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자란 것처럼 말이다.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은 이미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있는 낙서이다. 그리고 버릇없다는 소리를 하는 우리 자신도 귀에 못이 박히듯 그 소리를 들으며 기성세대가 되었다. 혹시 버릇을 가르친다는 학원으로 부모들의 발길이 쇄도할까 두려우니 서둘러 말을 마치는 것이 상책이다. 벚꽃 속으로 봄이 오가는 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