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시작한 작업은 마흔여덟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가 8년간 번역한 분량은 200자 원고지 6만 매 분량. 2009년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변주승 교수(54)는 마침내 50권에 이르는『국역 여지도서』를 펴냈다. 그리고 2014년, 또다시 90권에 달하는 『국역 추안급국안』을 세상에 내놓았다.
『조선왕조실록』 번역 이후 가장 방대한 작업으로 꼽히는 두 책의 번역으로 그는 고전 번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고, 역사 연구의 진전을 가져왔다.
30대 중반부터 한문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 해왔으니, 어느덧 20년이다. 고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과의 싸움이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전이 지닌 가치와 역사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는 이 싸움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다.
『여지도서』를 펼치다
"『여지도서』의 여지(輿地)는 우리가 사는 땅을 뜻합니다. 즉 천하, 전국 팔도로 해석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라에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는 것처럼, 조선이란 나라도 국가를 운영하려면 다 파악을 해야 했죠. 그렇게 파악한 것이 '지리지(地理誌)'라는 겁니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를 기준으로 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다시 보니까 이 데이터가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영조임금 때 새로 조사해보자 한 것이 『여지도서』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책 하나 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당시 임금이 볼 수 있도록 모아놓는 것까지는 했는데, 출간까지는 못간 거죠."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 사이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다. 조선 8도의 자연과 물산, 인물 등이 정리돼 있는 책으로, 오늘날 전통문화의 뿌리를 조선시대와 연결시키는 것으로 볼 때 『여지도서』 번역이 우리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다.
"팔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서 각 읍에서 읍지를 올려 보내도록 했죠. 그런데 반역자가 나오면 고을이 없어지고, 왕비가 나오면 만들어지다 보니, 상당수 마을이 빠져있는 거예요. 가장 많이 빠진 지역은 전라도와 경상도였고요. 국가에서는 어느 지역은 들어가고, 어디는 빠져있으니까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읍지가 있으면 끼워 넣은 거예요. 전주편도 사실은 『완산지』라는 지리지를 끼워 넣은 겁니다."
『여지도서』는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하면서 사회·경제적인 내용을 강화했다. 그렇게 탄생한 『여지도서』에는 조선시대 마을 350곳, 정보 40여 가지가 수록돼 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산과 강, 저수지의 깊이, 도로의 폭, 논과 밭의 면적, 창고는 몇 칸, 주요 명승지와 절,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과 건물들이 다 정리돼 있었다. 때문에 지역사 연구의 기반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각 읍의 첫머리에 읍별로 채색지도가 부착돼 있는데, 변 교수는 『여지도서』가 조선왕조가 국가차원에서 조망한 마지막 인문지리서라는 점에서 지도를 복원하는 일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고 했다.
현재 『여지도서』는 대한제국 말엽 서양 선교사 손에 들어가 명동성당에 보관돼 있다. 변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흑백으로 찍어 묶은 영인본을 가지고 번역 작업을 했다.
『완산지』로 보는 전주 역사
『여지도서』의 전주편을 대신하는『완산지(完山誌)』는 오늘날 전주와 완주, 그리고 비월지(飛越地, 다른 고을을 뛰어넘어 있는 행정구역)였던 논산 등을 포함하고 있다.
"건치연혁이라고 해서 조선 팔도 모든 고을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연혁을 담았어요. 그런데 옛 조상들이 지은 지명을 보면 소름끼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 용담댐이 있는 곳을 보면 조선시대에 용담(龍潭)현이라고 '용 용(龍)'자에 '연못 담(潭)'을 썼는데,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수몰됐지 않습니까? 제가 원래 전남 장성 출신인데, 장성 입구에 하만리라고 있습니다. 백양사 근처인데, 이곳도 지금은 장성댐이 들어서서 물이 딱 하만리까지 들어섭니다. 제가 1997년 전주로 이사를 왔는데, 전주분들은 온고을이라고 부르더군요. 어떤 교수님도 완전한 도시라고 표현을 하셔서 제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우리는 예로부터 큰 홍수나 지진도 없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해 사람이 살기 좋은 완전한 고을이라고 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완산지』의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변 교수는 "개인적으로 지명에 '완'자와 '전'자가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전한 존재를 원하는 이상과 맞아떨어진 듯하다"고 풀이했다.
"전주지역이 풍수지리학적으로 행주형(行舟形)으로 아주 명당입니다. 오늘날 전북일보사 자리에서 서해바다까지 탁 트여있습니다. 전주의 진산(鎭山)인 건지산의 경우 산세가 원광대한방병원 있는 데서 끊겼는데, 민간에서 전하기를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는 뜻에서 여기에 있는 산에 '가할 가(可)', '이을 련(連)'을 써서 가련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또 건지산이 북쪽에 가서 기세가 끊기니까 지세가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오늘날 덕진공원 연못을 조성한 거죠."
이밖에도 기린봉 꼭대기에는 조선시대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한옥마을 남천교는 정조임금 때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당시 전주시장이 돌로 쌓은 것이라고 소개돼 있다. 또한 숲정이성당 쪽은 조선시대 군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전라감사 등이 전주의 땅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무를 심어 숲이 우거지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를 번역할 때 한시가 어려워 애로사항이 있었죠. 하지만 한시는 어렵다는 걸 아니까 작정하고 덤벼들게 되는데, 쉬우면서도 어려운 게 바로 풍속이었습니다."
『여지도서』 풍속조는 마을의 인심, 풍토, 사람들의 성품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풍속은 무엇보다 직역과 의역 사이에서 갈등이 컸다. 예를 들어 '어느 고을은 퇴박하다'는 표현이 있다면, 이를 직역하면 '멍청하다'가 되고 의역을 하면 '우직하다'가 되는 것이다. 직역을 해서 있는 그대로 풀이할 것인가, 의역을 해서 뜻을 살릴까. 고민의 지점이었다.
"원문을 보면 전주 사람들은 '현리하다'고 돼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돈을 밝힌다' '잇속을 잘 챙긴다'라는 뜻인데, 왜 전주 사람들을 왜 현리하다고 했을까…. 번역을 하면서 계속 고민을 했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리한 곳을 찾는다면 아마 서울 강남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농업국가다 보니 전주가 바로 조선왕조를 먹여 살렸던 곳이죠. 오늘날 전라남도와 제주도까지 포괄하고, 당시 동문·서문·남문· 북문 이 작은 사이즈에 아전들이 근무했던 영절이 45개나 있었다는 것만 봐도 물산이 풍부하고 돈이 넘치는 곳이어서 현리하다는 말을 쓴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현리하다'를 '사람들이 눈치가 빠르고 영리하다.'라고 번역했다. '현리하다'는 표현 뒤에 나오는 '백성들이 어리석거나 완고하지 않다'는 문장에서 힌트를 얻은 것.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견물을 깨쳤다는 뜻으로, '집안을 다스리는 사람은 대부분 곡식을 저장한다'는 표현 역시 다른 고을에는 없는 내용으로 물산이 풍부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묘전(廟殿)에는 조경묘와 경기전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당시 경기전 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수복(守僕)이 210명이고 오늘날 소방관인 금화(禁火)가 100명이라는 것만 봐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죠. 현재 복원이 추진 중인 전라감영을 비롯해 태조 이성계의 선조 이야기, 전주사고가 실록을 어떻게 지켰는지, 전주를 빛낸 인물들까지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하지만 예인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곡식 신에게 기도했던 사직단(社稷壇)을 한옥마을 콘텐츠로 복원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도전, 『추안급국안』
2014년 변 교수 연구팀이 『국역 추안급국안』 90권을 발간하자 또 한 번 세상이 떠들썩했다. 2004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약 10년간 진행된 작업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하면 단일 번역서로는 최대 성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601년(선조 34)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약 300년 동안 변란, 역모, 천주교, 왕릉 방화 등에 관한 중죄인을 체포해 심문한 기록이란 점에서 학계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보였다. 279건의 사건기록, 사건 연루자만 1만2천명으로, 양반과 노비, 관료와 상인, 농민, 궁녀 등 중죄인들의 진술을 그대로 적어 일반 대중들도 관심을 갖기 충분했다.
"조선 후기 범죄 수사기록을 통해 당시 전라도 지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호남지역 유항검 순교 기록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이인좌의 난의 경우 태인 관아에서 내린 명령으로 자신은 마지못해 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당시 죄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지배층의 권력투쟁, 서민들의 생활상 등 조선시대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추안급국안』은 조선 후기 정치·범죄사회사 자료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변 교수는 "『추안급국안』이 학문적인 자료를 넘어 점차 소재가 고갈되어 가고 있는 드라마, 영화 등 2차 창작물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중앙에서 『추안급국안』을 TV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비롯해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하였다. 『추안급국안』 번역이 전주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콘텐츠 자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추안급국안』이 나온 지 2년이 됐습니다만, 아직 인터넷 서비스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순간 서울이 알아서 다 해먹을 겁니다. 우리 전라북도야말로 전통문화지역이고 또 전주에서 이뤄진 성과니만큼, 전주에서 우리의 역량으로 지역 문화콘텐츠 자원으로 활용하고 개발하길 바랍니다."
변 교수는 완고했다. 한문을 번역해 온 20년 동안 빈틈없이 정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확고한 신념과 고집스러움으로 그는 『여지도서』와 『추안급국안』이라는 전주의 원석을 발굴했으며, 번역이라는 힘든 작업을 통해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그 원석을 빛나는 보물로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2013년 6월, 『국역 추안급국안』 출간을 앞두고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고전 번역은 마라톤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번역문만 200자 원고지 15만 장 분량이라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번역하는 것'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에게는 고단하고 치열한 고행일 지라도 우리는 그가 쉼 없이 달려 마침내 열어놓은 그 길에서 고전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의 마라톤이 오래토록 멈추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