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6.10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명멸하는 순간의 진심을 옹호하며
<최악의 하루>
김경태(2016-10-17 09:49:46)




연극 연습을 마친 '은희(한예리)'는 자신과 같은 배우인 애인 '현호(권율)'를 만나기 위해 그가 드라마를 촬영 중인 남산으로 가고자 한다.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나 그에게 길 안내를 해주고, 그 답례로 료헤이는 은희에게 커피 대접을 한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심'의 순간이다. 그녀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어, 현호에게 차가 막혀서 늦는다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이내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이름조차 료헤이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남산으로 향한다. 은희는 짬을 내어 나온 현호와 만나 티격태격하다가 그녀를 예전 여자 친구의 이름으로 잘 못 부르고 만다. 화가 난 은희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남산을 내려간다.

한편, 현호와의 관계가 소원했던 시기에 잠시 만났던 이혼남 '운철(이희준)'은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을 보고 남산으로 무작정 찾아와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그들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그녀가 연습 중인 연극에는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한 커피,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속이려면." 영화 속 인물들은 마주 앉아 계속 커피를 마신다. 진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희와 운철은 남산에서 다시 마주친다. 커피를 마시며 전부인과의 재결합을 알리며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호소한다. 눈물을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은희를 향해 "어떻게 진실이 진심을 이겨요?"라고 묻는다. 운철은 재결합을 하지만, 그것이 은희를 사랑하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아니다. 그에게 결혼 생활은 진짜지만 사랑의 감정은 진심이다. 강조컨대, 진심은 진실과 다르다. 진실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지만, 진심은 그 순간만을 산다. 그리하여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사랑의 근간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라면 그것은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봄날이 간다>의 명대사인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는 "어떻게 사랑을 불변의 진실이라고 굳게 믿지 않고 그것을 한낱 변덕스러운 마음에 기대어 의심할 수 있나요?"로 자세히 풀어 쓸 수 있다. 진실을 위해서는 거짓말이 철저히 배척되어야 하지만, 진심을 위해서는 적시적소의 거짓말이 요긴하게 쓰인다. 애정 관계에서 솔직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자기모순이 허용되는 것은 그 진심의 특권이다. 그 솔직함의 대상이 상대방이 아니라 그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하루'는 현호와 운철과 함께 우연히 남산에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면서 정점을 찍는다. 현호는 그 모든 관계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운철에게 소주 한잔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은희는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채 홀로 남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 아니라 명멸하는 진심이기 때문이다. 술은 우아한 배려의 거짓말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오롯이 진실한 욕망들로 채운다. 술이 진실의 원동력이라면 커피는 진심의 조력자이다.

은희의 진심은 세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는 것, 즉 그들 모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들 각자와 마주하는 매순간, 상대방을 향한 진심에 충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그녀는 양쪽을 저울질 하며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둥이로 폄하될지 모른다. 그녀의 말처럼, 소설도 연극도 결국은 모두가 꾸며진 이야기, 즉 거짓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진짜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매 순간 이야기를 꾸미고 연기를 하지만 그것이 그 순간의 진심에 최선을 다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하기 보다는 연극적 진심, 혹은 소설적 진심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