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5 | [문화저널]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를 바로 찾자
혁명의 본격적인 출발 선언
백산대회
원도연 전북산업대 강사(2003-09-23 12:08:58)
농민군에서「혁명」군대의 진용으로
무장 당산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무장에서 고부로 통하는 굴치(屈峙)를 넘어 태인에서 최경선이 이끄는 3백 명을 수합하고 말목장터에서 대기하던 1천여 명의 농민과 합류했다. 이어 고부관아를 들이친 농민군은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다 3월 25일(양 4월 30일)에「백산」으로 이동하여 진을 쳤다.「백산」은 고부읍으로부터 서쪽으로 십 리쯤 되는 곳에 위치한 야산으로 인근 교통의 요지이자 고부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의 요충으로,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 지역의 하나이다. 이곳은 일찍이 삼한시대때부터 토성이 쌓여져 있던 전통의 요새였으며 관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어 병량(兵糧)문제를 해결하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일면이 겨우 인마가 통행할 수 있으며, 근방은 유명한 평원으로 유독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전라도고부민요일기』의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었다.
무장기포가 새로이 확인되면서 지금은 다소 그 위세가 덜하지만「백산」은 한동안 동학농민군의 기포지로 알려지기도 했던 빠뜨릴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백산에 진을 친 농민군은 각지에서 속속 모여드는 농민들을 명실상부한 농민군대로 조직하고 이곳에‘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설치했다. 무장기포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소극적이었던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이 본격적으로 합류했던 곳도 바로 이곳 백산이다.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손화중포에 속하는 접주들이 거느린 3천5백 명, 김개남포의 1천3백 명, 김덕명 포에 속하는 2천명 등으로 대략 7천여 명의 농민군이 집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손화중포를 중심으로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수가 4천명 정도였다고 할 때 불과 4-5일 사이에 백산으로 모인 농민군이 7천명으로 불어난 것은 그곳이 단순한 집결장소만이 아닌 일종의 출정대회의 성격을 지니는 약속된 장소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부봉기를 혁명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이를 백산에서 보다 구체화하는 일련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무장기포에서 포고된 첫 창의문과 백산대회에서의 격문이 비교적 짧은 시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백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혁명은 그 세 가지 요건인 이념과 주체와 조직을 온전한 형태로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출정을 알렸던「백산대회」
무장기포가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그에 관련한 자료들이 뒷받침되면서 백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다소 미흡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줄곧 백산기포라고 알려져 왔던 사실판단의 착오에 대한 일종의 상대적 반발(?)과 백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부족했던 탓이다. 우선 그동안의「백산봉기」또는「백산기포」라는 명칭부터 바뀌어져야 한다. 비교적 적절한 명칭으로「백산결진」또는「백산대회」가 별다른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여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집회 및 대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나 전략이 수립되는데는 항상 각종의 집회나 대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곧 그동안 봉건왕조의 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과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왔던 민중들의 뜻을 민주집중의 원칙으로 모아내고 혁명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민중적 결정과정이었다. 이 같은 대회는 이미 동학농민혁명 이전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으로 표출되었던「삼례집회」와 보은, 원평에서의 집회에서 나타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들 집회가 동학교단이 이끌고 교조신원을 과제로 하고 있었던데 반해, 백산에서의 대회는 이미 무장에서 기포를 선언한 후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들의 혁명적 열기를 모아내는 농민혁명 최초의 민중대회이자 출정대회였던 것이다. 또한 집강소시기에 이르러 농민군은 각 읍 단위와 대도소 단위의 집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산에서 농민군이 전열을 정비한 것은「집결」혹은「결진」보다는 한층 적극적인 의미를 담은「대회」로 부름이 마땅하다 하겠다.
혁명이념을 집약한「백산격문」
백산에 모여 진을 개편한 연합농민군은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총관령(總管領)에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領率將)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 정백현을 선출함으로써 혁명의 지도부를 조직했다. 이때 모여든 농민군의 구성을 두고『조선사』의 기록은“난민중동학도 수천, 각읍 소리(小吏), 경향의 범법망명자 역시 이에 이른다”고 전하고 있다. 즉 백산으로 모여든 농민군은 동학교도 수천을 주체로 각읍의 소리들과 경향의 범법망명자가 이에 합류한 것이다. 이제 혁명은 동학교단의 통제범위와 국지성을 완전히 벗어나 지방단위의 농민혁명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고, 백산은 각지에서 몰려드는 농민들과 도망민들로 온통 흰옷과 죽창으로 물결지고 있었다.
새로이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 지도부는 백산에「호남창의대장소」를 두고‘동도대장(東徒大將)’,‘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세우는 한편 격문을 공포해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에 띄워 백성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공포된 격문은 혁명의 이념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버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이 격문은 농민혁명의 대의와 그 대상, 그리고 혁명의 계급적 주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장창의문에서 나타나던바 “임금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살고”그리고 못내 성상의 덕화를 바랐던 농민군은 이제 창의(倡義)의 본의가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세우는데 있다”고 하는 국가경영의 혁명적 포부를 마침내 드러냈다. 즉 무장기포의 대의명분을 여전히 봉건왕조의 유교이념으로부터 찾아야 했던 농민군은 이제 보다 적극적이고 솔직한 혁명이념으로 농민군의 위용을 떨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이 격문에서 양반과 방백과 수령을 혁명의 대상으로 삼고 소리(小吏)까지를 포함하는 계층적 연대를 표방한 것은 농민들의 봉건적 사회신분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의식적인 선언인 동시에 농민군의 자신감 넘치는 혁명 전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농민군의 4대名義」와「12개조 기율」
격문과 함께 농민군 지도부는「농민군의 4대名義」제정하여 농민군의 진소에 돌렸다. 『한국계년사』에 실린 4대 名義는 이러했다. 첫째,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해하지 말라.(不殺人, 不殺物)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忠孝叢全, 濟世安民)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를 멸하자.(驅兵入京, 盡滅權貴) 이 4대 名義를 통해서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농민군이 지녀야 할 기강을 밝히고 일본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배격과‘서울’이라는 전술목표를 공식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실현의지를 담아냈다.
농민군의 혁명적 이념과 계층적 구성은 엄정한 규율을 통해서 뒷받침되었고 이는 광범한 민중의 지원을 얻는 근본적인 힘이 되었다. 농민군은 이 혁명의 대의를 널리 호소하기 위해 12개조 기율을 대서한 깃발을 걸었다. 김윤식의 『續晴史』와『甲午朝鮮內亂始末』에 실린「12개조 기율」은 (1) 항복하는 자는 받아들일 것, (2) 곤궁자는 구제할 것, (3) 탐학 하는 자는 추방할 것, (4) 농민군을 따르는 자는 경복할 것, (5) 도망하는 자는 쫓지 않을 것, (6)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줄 것, (7) 교활한 행위는 하지 말 것, (8) 가난한 자에게는 베풀 것, (9) 불충한 자는 제거할 것, (10) 거스르는 자는 타이를 것, (11) 병자에게는 약을 줄 것, (12) 불효자는 죽일 것. 으로 되어 있다. 농민군은 이렇게 해서 놀랄만한 흡인력을 갖고 민중의 호응과 지원을 얻어 나갔다. 심지어는 농민군을 적(賊)으로 삼았던 일본인조차도 척왜양의 슬로건에 전율하면서도 그 통제의 비범과 기율의 엄정함에 감탄한 자 적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甲午朝鮮內亂始末』에서는 “이 12개의 군기가 얼마나 지방민에게 희망을 주었는가. 그들의 방책 또한 자못 교묘하다 할 만하다. 그리고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상당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이고, 지방토민의 양곡을 빼앗는 짓은 감히 하지 않고 필수식량은 이를 구입할 때 반드시 대금을 지불하고 조금도 토민에 해를 가하는 법이 없었다. 하여, 종래의 무수한 폭거인 봉기들과는 전혀 그 예가 다르고, 조정의 문란에 고통 받는 지방민들이 때로는 오히려 환로로 이들 반란군을 맞이하는 것이 결코 그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혁명의 세 가지 요건이 성립된「백산성지」
무장기포가 확인되면서 빛이 바랜 「기포지」백산은, 그러나 여전히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백산에서 공포되고 내걸렸던 격문과 행동강령, 기율 등은 혁명의 이념과 조직을 의미했으며, 여기서 농민군은 혁명군대로써의 조직을 완성했다. 전봉준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본격적인 출발을 만방에 알렸으며, 더불어 혁명의 열정을 확인한 농민군은 백산을 기지삼아 황토재에서 벌린 중앙군과의 최초의 전투를 대승으로 일구어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부군에 속해있던 백산은 현재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76년 4월 2일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31호로 지정되었고 83년에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고시되었다. 이 나지막한 야산의 정상에는 지난 89년 동학혁명 백산기념사업회가 건립한「東學革命白山倡義碑」가 서있다. 그러나 때로 이곳을 들를 때마다 그 입구에서부터 느끼는 면구스러움과 옹색함은 백 년 전 농민군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저항의 숨결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백산」성지에 들어서는 입구는 마치 도시 외곽의 달동네를 들어서는 듯한 볼품없는 모양새로 우리를 맞이하고 그보다 더 낯부끄러운 것은「백산」을 둘러싸고 산을 온통 파헤쳐놓은 채석장의 모습이다.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를 기린다는 것은 그럴듯한 기념탑 하나 세워놓는 것으로 족한 것은 아니다. 이곳 저항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놓은「백산」에 무분별한 채석장 허가를 내주고도「적법한 절차」임을 내세워 역사의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각계의 요구에 냉담한 오늘의 행정 관료들이 있다. 그들과 혁명의 진원지인 고부군을 갈갈이 해체시켜 저항의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던 일제와의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정상부근의「문화제 보호구역」만을 남겨두고 백산 전체를 사각형의 현대적 타워로 만들어버릴 속셈이 아니라면, 차츰 빛을 잃어가는「백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더불어 그 파괴된 저항의 현장을 바로잡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