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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 칼럼·시평 [문화시평]
팔복동 카세트 테이프 공장의 호변(虎變)
팔복예술공장 파일럿(pilot) 프로젝트를 읽다
김형미(2016-11-17 14:09:05)




가을이다. 호랑이는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털갈이를 한다지. 털갈이가 끝난 호랑이는 그 색채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워진다고. 전주 팔복동. 온 산이, 그리고 바람이 잠시 날렵한 수염과 발톱을 감추고 낡은 철도길 위에 웅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몸을 늘여 포효할 것만 같은 숨죽인 꿈틀거림. 호변(虎變)하는 것이 어디 계절뿐이랴.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산업 공장이 예술 공장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와 같으리.

카세트 테이프 공장이라고 했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밖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건 채 시대에서 잊혀진 '비일상'의 공간이라고. 한때는 무한한 꿈을 꾸었을, 일상에서 잊혀진, 지금은 치직거리는 잡음도 남지 않은 건물. 과거의 기억과 먼지와 세월이 함께 묻혀버려 감히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고 말 한마디 묻기 어려운 비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 잰걸음을 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한.

'팔복예술공장'의 총괄기획자인 황순우 건축가는 바로 그것, "일상의 덤"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재생산한 것은 아닐까. 다가가기 힘든 것, 섬뜩하리만치 낯설고 무거워 괴팍함마저 느껴지는 것. 고개를 돌리고 싶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그리하여 그것들보다 더 비일상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과 같은 비일상 속에서 마음을 다독이게 만드는 힘을 말이다.

박방영 작가의 퍼포먼스와 함께 개관된 팔복예술공장. 18명의 예술가들이 뱉어낸 저마다의 감성과 목소리가 어우러져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빈 마음과 어둑하니 커다란 공장 내부를 훈훈히 녹여주고 있었던가. '구석구석 귀신같이 숨어 있는 여러 오브제들과 텍스쳐들을 리서치'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개인적으로 느꼈던 인상적인 기억들을 토대로 작은 섬을 구성하고 화려한 허상을 쫓아 표류하는 비극적 내용'을 다룬 홍남기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위층으로 올라가본다. "(제이) 스치는 바람에 (제이) 그대 모습 보이면~" '제이에게'를 부르는 이선희의 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안내해주는 세월의 좁은 계단을 따라.

생산과 유통의 폐기와 재생산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간임을 착안해 공단이라는 장소에 대한 경제 사회사적 가계도를 그리고자 한 김혜원 작가의 사진들, 폐공장에 흩어져 있는 유리 파편을 이용하여 각목으로 공장을 단순화한 강현덕 작가의 작품, 사 천 개의 흑백 카세트 테이프를 매달아 빛으로 표현한 이자현 작가, 공장 곳곳에 난 풀들과 버려진 자재들의 느낌을 '예이도(藝以道), 즉 예술로서 공장이 첫 발을 내딛는'다는 뜻으로 표현한 박방영 작가의 그림…….

나는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처음으로 공장의 '살아 있음'을 느꼈다. 오래전 제 몫을 다했을 카세트 테이프를 만들던 쏘렉스 공장, 그 자취를 아주 버리지 않고 모습 그대로를 취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림으로 해서 모두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지난날의 흔적과 역사가 다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현 시대의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과 꿈을 들여와 가는 길. 그 곳을 살다간 하늘과 공기와 풀들과 자재들, 켜켜이 쌓인 먼지를 포함한 미래에 있을 새로움과 놀라움,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는 크고 작은 많은 요소들이며 어색함, 예상치 못한 그 어떤 것까지도 같이 가는 길. 그래, 예술이라는 이름 위에서.

번듯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는 쉽지만, 묵은 사진첩을 끌어안고 가는 길은 그만큼의 힘이 들겠지. 그 힘든 여정을 황순우 감독은 지금, 이곳 팔복예술공장에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파일럿(pilot)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공간 쓰임새를 고민한 후에야 시설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듯도 하다. 팔복예술공장을 기획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장 속에 갇혀진 섬과 같은' 이 공간을 과연 '누구를 위한 공간'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그런데 왜 예술이어야만 하는가.' 
이 세상에는 경제적 논리와는 다소 동떨어진, 예술이 전혀 필요 없이 살 수 있는 길도 많으리라. 황순우 감독은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했던가. 독특한 창조성으로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 바로 그 힘으로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케케묵은 공간을, 사람을, 도시를, 더 나아가 환경과 공동체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자정작용을 가진 것, 예술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천 명의 얼굴과 마음'이 함께 가야하는 무거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숨죽이고 있던 것이 이렇게 생생히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나 건물, 터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은 언젠가의 재생을, 혹은 창조됨을 위해 조용히 만나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시간과 공간과 사람이 어느 한 시점에서 만나 호변할 기회를 갖는 건 아닌지. 우리가 보고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털갈이를 하고 새 털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호랑이는 아닌지 말이다.
자연과 예술, 예술과 과학기술 산업, 마지막으로 전통과 동시대 예술이 공유되길 간절히 바라는 팔복예술공장. 변해야 할 때 과감히 변해서 새로운 요구에 부응해 나갈 준비를 마친 이 공장이 점차로 많은 덕행을 쌓아 시대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길, 그런 시대적 사명을 띠길 나 또한 가슴 깊이 바램을 가져본다. 큰 혁신에는 그만한 위험과 모험과 서운함도 노고가 되어 함께 따르리라. 황순우 감독의 말대로 예술의 독창성이나 개별성의 성향을 상실시키는 굳이 '문화'화 될 필요 없이, 누구나 쉽게 다가들어 비일상적인 공간을 더욱 비일상적이게, 혹은 일상적이게 누릴 권리를 가질 수 있기를. 천지가 움직임을 멈추고 뿌리고 돌아가기 위해 부산할 때, 새로운 시작을 결행한 진정성 있는 호변으로 우주 가을 속의 위대한 봄을 맞을 수 있기를.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제이) 난 너를 못 잊어/ (제이) 난 너를 사랑해~" 
환청인가. 이선희의 노래가 귀가해서도 밤늦도록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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