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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전주천 따라 역사의 옷 입히기
정재철(2016-12-16 15:57:54)

물 따라 가다보면 전주천은 공사 중이다. 필자가 11월 중순에 한벽당에서 진북교까지를 살펴봤더니 네 군데서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천변으로 길을 내는 공사, 강 언덕 밑에 돌을 붙이는 공사 등 다양했다. '전주천을 어떻게 하겠다는 큰 그림은 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개울물처럼 졸아든 전주천을 얼마만큼 파내고 손을 대야 큰 기계가 뿜어내는 굉음을 더 이상 듣지 않고 한 해를 넘길 수 있을까 궁금했다.  


전주를 이해하는 열쇠 말 중 하나는 '전주천'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살펴보니 강을 중심으로 천변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천변에 가득이고 주변에는 낮은 초가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전주천변에는 이처럼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는 다리는 전주부성과 주변 사람들을 연결하고 먹을거리가 드나드는 생명 고리였다. 물산들이 이 다리와 천변시장을 통하여 성 안 밖으로 들며 나갔다. 


강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도시에 이처럼 아름다운 강을 갖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배산임수라는 풍수지리를 손에 쥐듯 옆에 두고 걷는 것 또한 특권 같은 것이다. 걷다보면 이곳은 시간대에 따라 풀 내음과 소리와 빛깔이 다르다. 머리 위를 지나는 다리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도 주변과 어울려 물 위에 정겨운 풍경을 남긴다.


만경강의 상류는 전주천과 삼천천이다. 두 지류는 서신동의 이편한세상 아파트를 끼고 돌아 만나서 제법 큰물이 된다. 삼례에서 다시 고산천을 만나 흐르다가 김제평야를 적시는 만경강으로 벼농사를 위해 물을 흩뿌리다가 이젠 강을 버리고 서해 바다에 몸을 부린다.


슬치와 마치에서 시작된 상관계곡의 물줄기가 여러 골짜기와 작은 마을을 끼고 돌면서 숱한 얘기들을 만들어냈다. 주변의 큰 바위나 물이 구비치는 여울목에는 어김없이 전설들이 숨어 있고 인물의 성장기도 품는다. 은석동은 상관면에 있는 마을로 정여립이 살던 곳이다. 그는 붕당의 다툼 속에서 희생되었다는 평가와 전라도와 동인들을 수난으로 몰아넣은 이름으로도 남아 있다. 대개의 모반 사건은 실체가 모호하고 밀고와 고문으로 조작된 흔적이 많아 논란이다. 


전주천은 여러 마을을 거쳐 한벽당에 이른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남천으로 흘러 내려간다. 한벽당은 자연 암반 위에다 돌기둥을 세우고, 뒤쪽에 축대를 쌓아 만든 누각이다. 자연을 그대로 살려 지었다는 점이나 이 건물이 오랜 풍파 속에서도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만해도 신기하다. 옛 문인들은 한벽루 앞을 흐르는 전주천의 모습을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고 읊었고,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는데 한벽당에서 만나는 청아한 풍경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한벽당 바로 뒷산을 기차가 뚫고 지나가더니 지금은 한벽당 앞으로 전주 남원 간 국도가 지나고 커다란 다리건설로 전주 8경중의 하나인 한벽청연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렵게 한다. ​한벽당 밑을 흐르는 물도 줄어들어 바위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기보다는 작은 실개천으로 변한 모습이 애잔하다.


전주천 주변에는 생활과 관련하여 땔감을 사고파는 나무전거리, 옹기전거리, 약전거리, 떡전거리가 있었다. 지금이야 땔감을 살 필요도 없고 옹기도 잘 쓰지 않으니 이런 거리들이 남았을 리 없다. 전주 약령시는 대구·청주·공주·진주약령시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약령시로 서천교 북쪽으로 이어졌다는데 지금은 약전거리라는 이름조차 희미해졌다. 사람들이 천변에서 어울려 살았으니 웬만한 것은 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으나 상(喪)을 당하면 난감한 일이었다. 장례식장이라도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을 개인 집에서 치러야 했다. 이럴 때는 남밖시장에 있는 상여도가나 서문밖의 섬밖도가의 상여꾼들이 전문적으로 장사를 치러주었다. 


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여럿이다. 지금도 싸전다리(양곡), 쇠전다리(우시장), 소금전다리(소금), 설대전다리(담배) 등의 옛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우리는 이런 이름을 잊고 산다. 쉽게 전주교, 매곡교, 서천교, 완산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현재 있는 전주교 위쪽으로 남천교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었다. 홍교이고 무지개 모양이었는데 물위에 비친 다리 모습이 안경처럼 생겼다 하여 안경다리, 쌍안경다리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홍수로 다리가 무너지자 그 밑에 전주교를 세운 것이다. 전주교는 풍남문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다. 여기에는 쌀도가들이 모여 있어 싸전다리라 불렀다.


전주 8경에 2경을 더하여 전주10경인데 그 중 하나가 남천표모(南天漂母)이다. 남천교 물가에 모여 앉아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차가운 강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여성들의 수고로움과 고생을 생각하니 낯 뜨거워진다. 지금의 전주천과 매곡교 사이의 초록바위는 전라감영의 형장이다. 19세기에는 이곳에서 전라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유교와 다른 천주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모진 형을 감수했고 목숨을 빼앗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기린봉 위에 둥근 대보름달이 떠오르면 남천교와 서천교의 다리위에서는 다리 밟기가 시작되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름달을 바라보며 자기 나이만큼 다리 위를 왕복했다. 이런 민속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했고 서로 바빠서 못 만났던 이웃들에게 안부를 묻는 만남의 기회이기도 했다.


현재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시멘트 다리와 몇 개의 징검다리가 전부이다. 다리 가운데는 남천교와 서천교가 돌다리로 아름다웠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다리는 차량이 다니는 도로 역할에 만족한다. 이제 강을 싸고 차량이 온통 주변을 점령했고 거대한 아파트들이 새로운 주인 인 냥 산을 막고 강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전주천을 공유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질박한 얘기와 천변을 중심으로 시장을 만들어 생활했던 사람들의 애환이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 강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기억하고 역사의 옷을 입혀 얘기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런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역사는 '기억의 공동체'이며 '몸으로 체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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