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말할 것 없이 이들 발랄한 촛불집회의 주역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적자(嫡子)들이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저 칠팔십 년대 길바닥에서 무지막지한 폭력의 공포를 딛고 울부짖다가 개돼지처럼 끌려가던 선배들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그 공포의 시대를 밀어낸 선배들의 헌신 끝에 이 위대한 '거리의 춤꾼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광장을 메운 저들은 한국현대사의 땅 밑을 도도히 흘러온, 위대한 민주주의의 물줄기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광장으로 들어서는 길은 마구 붐볐다. 5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청 앞 광장, 지하철 출구에서 마주한 세상은 온통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장관(壯觀), 스펙타클(spectacle)이라는 말은 원래 장엄한 광경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다. 비극을 지탱하는 여섯 가지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그 중 하나로 이런 광경을 꼽았을까? 궁궐과 사원, 거대한 돌기둥(列柱)들이 둘러싼 광장의 한 복판에서 비극의 주인공들은 종종 성난 군중들과 마주한다. 군중들은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역병과 재앙과 전쟁과 떼죽음은 왜 일어나는가? 누구 탓인가? 신탁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인 당신은 왜 이와 같은 재앙에 침묵하는가? 아, 이천육백 년 전에 저들은 벌써 왕을 광장에 불러내어 따져 물을 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도탄에 빠진 나랏일의 책임을 물었고 왕은 온힘을 다해서 백성들의 물음에 답하려 애썼다.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마침내 그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음이 확인되는 그 순간에 왕은 제 손으로 눈알을 파내고 광야로 떠났다. 스스로의 '눈뜬 봉사 짓'에 대하여, 스스로 내리는 준엄한 형벌이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한 장관 아니었을까? 거대한 왕궁과 신전, 직립한 돌기둥들이 장관이 아니라, 거기 담긴 인간들의 행렬, 그 약동하는 힘의 꿈틀거림을 장관이라 칭했던 것 아닐까? 경복궁의 정문,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으로 집현전에서 지어 올렸다는 이름의 그 큰 문, 광화문-. 그 문 앞에서 우리는 지금 인류사 최고(最高)의 장관을 본다. 아니, 인류사 최고, 최대의 장관을 매주, 토요일 밤마다 새로 만들어낸다. 구경 중의 제일은 불구경, 사람구경이라 했던가? 하지만 불을 든 사람들의 이 거대한 행렬에서는 구경만 할 수가 없다. 따라 걷고 따라 외쳐야 한다. 구경꾼도 행위자도 없이 뒤엉켜버린 메가 퍼포먼스를 주말마다 만들어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후손들인가?
직접민주주의의 폐해에 진저리를 치고 만들어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불특정의 군중들이 종종 저지르곤 하는 비합리성, 맹목성, 잔인성의 함정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사는 늘, 집단의 광장과 개인의 밀실을 오가며 나선형으로 발전해왔다. 어디서나 광장의 선동이 극한에 다다를 때면, 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악용하는 독재정권들이 발호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스스로의 정치적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광장의 군중들을 부추겼고, 군중들은 그렇게 한동안 사용되다가 버려졌다. 그래서 세계의 이름난 광장들은 대부분 두 얼굴의 기억을 지녔다. 파리의 바스티유가 그랬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북경의 천안문 광장, 멕시코의 소칼로 광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나라 칠팔십 년대의 시청 앞, 도청 앞 광장, 여의도 광장이 그랬듯이 광장은 종종 동원된 군중들의 영혼 없는 구호로 가득 찬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부패한 정치집단을 응징하는 대토론과 함성의 공간이었다가, 때로는 박제화한 나팔소리만 빽빽거리는 독재정권의 선전장이 되기도 하는 곳-. 민주주의를 외치는 성난 군중들의 함성과 독재정권의 금속성 메가폰 소리가 공존하는 곳-. 아마도 그 양날의 기억 때문에, 많은 이들이 광장에 나서기를 망설여왔을 것이다. 그렇게 광장에 나서는 일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온 이들이 지금, 마침내 광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아스팔트바닥에 나가서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적어도 역사를 통째로 거스르는 일은 없으리라 믿었던 중장년층, 생전 처음 차도에 내려서서 '말 타고 대학 가는' 누군가를 성토하는 청소년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이 모일 때마다 두 배, 열 배로 커지는 숫자의 기적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대통령더러 물러나라면서, 여당더러는 해체하라면서, 재벌들도 공범이라면서 발을 구르고 어깨를 들썩여 춤을 춘다. 헤드뱅잉을 하고 드럼을 두드리며 라임(rhyme)을 맞춰 논다. 어쩌면 저렇게 무겁고(무섭고?) 엄숙한 구호를 저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외쳐댈 수 있는가? 저들은 도대체 세상을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군중들이 오랜 시간 동안 광장에서의 외침을 유보해온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를 대신할 정치가들과, 언론과 세상의 논객들에 대한 일말의 신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에 의해서 지탱되어온 대의제 민주주의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날 때 군중은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선거에 의해 집권한 세력이 얼마나 추악한 막장 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목도하고 있다. 선거가 얼마나 민의를 조작하기 쉬운 말풍선들의 잔치인지, 정치가란 존재들이 때로 얼마나 교활하고 무능한지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이 스스로의 욕망을 주체 못해서 권력의 개가 되는 순간 나라가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몇 안 되는 '참 언론'의 활약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결과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광장으로 나서는 길뿐이다. 집안에서 티브이를 보며 분노와 냉소를 곱씹는 것으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음을, 정치가들의 기름기 번드르르한 입술에만 의지해서는 모든 일이 끝없이 원점으로 되돌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의 방식으로 비분강개하고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끌려가 감옥에 갇히는 길보다는, 노래하고 춤추며 차벽에 꽃을 붙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길이 훨씬 더 길게, 집요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저들을 압박하고 설득할 수 있는 길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비극 속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스스로의 잘못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적어도 늦게라도 깨달은 순간 저들은 온몸으로 그 죗값을 치르며 몰락해간다. 눈을 찌르거나 배를 찌르거나 독배를 들이키고 죽어가는 동안, 저들은 부패한 세상이 정화되는 쾌감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비극적 주인공은 그럴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듯하다. 자신의 눈이 아무리 잘못 했어도 눈을 찌르지 않을 것이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오고 간 자신의 발등을 스스로 찍어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일은 비극이 되기 어렵다. 끝내 성찰도, 뉘우침도 없는 주인공 탓이다. 대신 어둠이 깊어가는 광장에는, '발기부전연구회'가 내건 플래카드가 혼이 비정상인 여왕을 마음껏 조롱하고, 레게 리듬을 타고 붉은 머리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는 군중들의 막춤이 밤을 새운다. 팔루스(phallus-남근형상)을 흔들며 광장 가득 군무를 추던 코모스(Komos) 축제와 흡사하다. 풍자 정신이 만개한, 진정한 코메디의 밤이다.
밤 열 시가 다 된 시간, 지친 연인들이 피켓을 접어 들고 광장 뒷골목의 이층 카페로 올라온다. 그리고 이내 달콤한 대화에 열중한다. 주인공이 아무리 버텨도, 저 재미없는 마리오네트 연극은 끝나간다. 촛불을 들고 집단 발광(發光)하는 이 밤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깨끗해진 광장을 내려다보며, 저 연인들처럼 다시 따뜻한 이층카페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달콤한 밀실의 시간, 어서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