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을 다큐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있다. 농담처럼 던진 가벼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 때,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다큐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진실을 다루며, 그래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이 전제돼 있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이, 웬만한 예능보다도 더 재밌는 정치 뉴스가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 지금. 40년 간 TV다큐멘터리만을 연출해 온 이동석 PD가 '진실의 힘, 다큐멘터리의 상자를 열어라!'를 주제로 '수요포럼'을 찾았다.
진실의 힘이 어느 때보다도 절박한 때. 사실을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다큐멘터리에, 그는 "다큐는 정말 진실한가?"라는 파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큐멘터리,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나라가 어수선한데 오늘 이 자리에 나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큐멘터리,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라'. 뭐가 들어 있는지 한 번 열어보죠. 다큐멘터리에 대해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은 정말 진실한 것이냐, 객관성이 있느냐, 그런 것일 겁니다. 항상 다큐멘터리는 진실할 거다, 진실해야 된다, 그런 기대와 믿음이 우리같이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궤도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하는 채찍질이 되죠.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되어서 다큐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김제가 고향인 이동석 PD는 1973년 TBC-TV에 입사했다. 드라마가 하고 싶었지만, 마침 다큐라는 포맷이 외국에서 상륙하는 단계였고 선임 부장은 그를 다큐 PD 자리에 눌러 앉혔다. 1981년부터 10년 간 KBS에서 근무를 했으며,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1993년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덕션인 '리스프로'를 설립했다. 그리고 3년 전에서야 비로소 현업에서 은퇴했으니, 40년을 오로지 다큐 한 길만을 걸어온 것이다. 방송 안팎에서, 그리고 위아래서 다큐를 체험해 온 그는 "누가 했느냐에 따라 말의 신뢰와 진정성이 달라진다"며 "나는 다큐 1세대로서, 다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책임 밖의 이야기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진실은 객관성의 동의어라 생각하고 혼용하겠습니다. 다큐는 진짜 진실한 걸까요? 진실성을 해치는 것에는 내부적 요인이 있고, 외부적 요인이 있습니다. 회사와 맞지 않으니 경영진에서 수정하라고 압력을 넣을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이 시대 이념이나 정권 지향점과 맞지 않으니 뜯어고치라는 압력이 있어 진실성이 훼손되는 경우가 있죠. 저는 40년 방송생활을 하면서 주로 전통문화 관련된 프로그램을 했고, 장편이나 해외 취재를 많이 하다 보니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왔다갔다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딱 한 번 있었지요. 1980년대 부동산 프리미엄이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문제로 대두됐던 시기였는데, 출감한 지 얼마 안 된 부동산 큰 손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었습니다. 신변 보호를 위해 그를 우리 집에 모셔다 놓고 인터뷰를 하고 회사에 들어왔더니, 본부장이 바로 보자고 하더군요. 결국은 나머지라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그 인터뷰를 뺄 수밖에 없었죠."
그는 자신의 대표작 '세계를 달린다'(KBS, 1987)와 '잊혀진 전쟁'(MBC, 1991~1993), '인간극장'(KBS, 2000~2008)을 중심으로 방송 프로그램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요소들이 프로그램에 작용을 하고, 객관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설명을 이어갔다. 세 작품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프로그램이었지만, 반대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작과정과 객관성
"모든 프로그램에는 기획의도가 있습니다. 기획의도란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이며, 존립근거지요. 뒤집으면 모든 프로그램은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 프로그램 속에서 뭘 말하고 싶은지, 그것이 바로 주제입니다. 기획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죠."
1987년 제작된 '세계를 달린다'는 당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우리나라 자동차 3대로 남미 대륙을 4개월간 종횡단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하루하루가 고비였다. 아마존강에 항공촬영을 나섰다가 경비행기가 불시착해 죽을 뻔하고,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국경에서 게릴라를 소탕하러 온 정부군을 만나 극도의 긴장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자동차 보유 100만 시대 국력 신장의 자부심이 담긴 프로였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9부작으로 방송된 '잊혀진 전쟁'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인의 희생을 다룬 것으로, 한국인의 참상은 힘 잃은 조국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2000년 세상에 처음 내놓은 '인간극장'은 전혀 새로운 휴먼 다큐를 만들겠다는 기획의도만큼이나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제각각이듯, 주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는 여러 사람들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형식에 있어서도 기승전결이 뻔한, 다듬어진 휴먼다큐가 아닌, 보다 절실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주제가 완성되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작업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동일인을 두고 검사는 모든 죄상을 엮어서 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반면에 변호사는 맞은편에서 보면서 이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를 펴지요. 그것이 바로 시각입니다. 이렇게 시각을 맞춰간다는 것부터가 의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큐를 비롯해 모든 프로라는 게 의도를 가지고 만드는데, 벌써 여기에서부터 진실성과 객관성을 훼손당하는 거죠."
주제와 시각이 설정되면 자료수집과 답사에 나선다. 그는 "광맥을 찾는 데 있어 맨 처음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객관성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세계를 달린다'는 당시 주어진 자료가 거의 없어 사전 취재 없이 바로 현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현장에서 구걸하다시피 해서 만든 작품이다. '잊혀진 전쟁'은 태평양 전선을 따라 사전답사하고 취재했으며, '인간극장'은 100% 현장 취재로 이뤄졌다.
"구성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효과적으로 나열하는 방법입니다. 처음부터 바로 결론으로 갈 것이 아니라 결론까지 가는 길에 팩트를 비롯한 요소요소를 요령있게, 재미있게 나열하는 작업이죠. 미국 동서횡단 도로를 처음 만들면서 직선도로로 만들었더니 공사비도 적게 들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너무 단순해서 졸음운전사고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로를 좀 고쳐서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더니 사고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성입니다."
그는 "같은 내용이라도 구성에 따라 시청률이 달라진다"며 "구성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객관성을 해치는 요소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큐는 살아있다
"촬영현장은 언제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연출자의 뜻대로 준비돼 있지도 않으며, 위험하기도 하죠. 현장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그저 보여주는 대로 볼 뿐이지만, 현장 사정이나 시간 부족, 장비 부족, 때로는 피로나 제작진간의 갈등에 의해 촬영이 부실하거나 포기하고 삭제하는 것들이 많아요. 때문에 실상을 촬영하기란 사실은 불가능하고, 결과적으로 객관성이나 진실성이 감소되고 훼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단 촬영이란 작업 자체가 대단히 작위적이죠. TV나 영화, 카메라는 앞에 있는 정경을 사각으로 자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처음 프로그램을 배울 때는 필름으로 촬영하다 보니 제약이 많았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무한대로 찍을 수 있다는 거죠. 벌써 프로그램의 질감이 달라지고, 훨씬 더 리얼한 프로그램이 많아졌어요."
'인간극장'은 100시간 가량을 찍지만, 방송되는 분량은 2시간 30분 정도다. 출연자들과 두세 달을 같이 붙어서 생활하다 보면, 나중에는 가족처럼 익숙해지며 카메라 앞에서 부부싸움도 하고 비밀을 털어놓기도 한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담아내기 위해 VJ카메라로 롱테이크로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맨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목이나 허리 고통을 호소했다. 반면, '잊혀진 전쟁'은 생동감을 위해 짧고 빠른 템포로 촬영했다.
"프로를 만드는 데 있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있죠. 바로 한일전 축구경기나 종군위안부 같은 문제지요. '잊혀진 전쟁'이 그런 프로죠. 징용되어 간 조선인들이 일본군한테 얻어맞을 때, 고향 생각날 때 부둥켜안고 '아리랑'을 불렀다는데, 우리도 울면서 촬영을 했는데, 결코 객관적으로 할 수가 없죠. 이런 때에는 제작자와 시청자와의 묵시적인 동조 하에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거죠. 또 '인간극장'과 같은 휴먼 다큐도 주관과 객관의 의미가 무의미해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보자, 사람 이야기를 하자는 거니까요."
이 PD는 "휴먼다큐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나도 힌트를 얻자는 것"이라며 "암선고를 받고 한 달 뒤 죽을 줄 알면서도 결혼식을 준비하는 부부, 휴가를 나와서도 집에 가질 못하고 먼발치서만 자식을 바라보는 모범수 이야기에서 주관, 객관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했다.
"편집은 제작자의 의도가 가장 많이 들어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초를 기반으로 역사를 쓰는 작업과 같죠. 생명이 없는 낱낱을 모아 주제라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입니다. 각각의 팩트는 가치중립, 등가의 원칙에 입각해 경중과 장단을 경정해 편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부분 제작자의 판단이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PD는 건전한 상식인이자 저널리스트이어야 합니다."
그는 다큐란 팩트를 기본으로 재창조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특정주제를 내세운 변주곡처럼, 제작자의 이념이나 능력, 제작 여건에 따라 객관성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가장 진실해야 하는 뉴스도 현장 설명이 안 될 경우 CG나 재연 방식을 쓴다"며 "있는 그대로만을 보여주는 것이 객관적인 것은 아니며, 왜곡하지 않는 것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큐는 과연 진실한 것일까요?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큐는 아직도 살아있는 걸까요? 요즘에는 다큐 연출을 3D업종으로 보고 지망자가 많이 줄었다고 해요. 우리 때는 90%가 다큐를 하기 위해 PD를 지망했는데, 요즘은 편성에서도 다큐가 줄고 교양 부서 자체가 없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이 다큐하기 딱 좋은 시절입니다. 검찰이나 청와대나, 현실이 다 다큐 감이잖아요."
그는 "다큐는 아직도 살아있는가"라는 질문에 진실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큐를 아직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많다고 힘주어 말했다.
매체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심각한 것은 도태되고, 상업성이 없으면 외면 받는다. 그리고 관객과 호흡하지 않는 문화는 소멸한다.
방송은 문화다. 다큐 또한 궁극적으로 문화행위다. 그는 "문화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 품에서 나오고 그 품에서 자라는 것"이라며 "한국 다큐가 만개하기 전에 쇠퇴하는 것이 시대 현상이고, 시대 수준"이라며 아쉬워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100% 진실이나 100%의 객관성을 소유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조건 다큐라고 해서 100% 믿거나 기대지 마십시오. 100% 믿음보다 시청자의 주관적 이해와 판단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시청자들의 높은 기대와 공감을 받으며 방송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서 있다. 그러나 시설이 하 수상하니, 노(老) 감독의 당부가 더 크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