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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사랑에 대한 조심스러우면서도 급진적인 선언
<가려진 시간>
김경태(2016-12-16 16:32:18)




어머니와 사별하고 새 아버지와 함께 '화노도'라는 섬으로 이사 온 초등학생 '수린'은 유체이탈 관련 블로그를 운영할 정도로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수린의 블로그를 본 '성민'은 자신이 유체이탈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이를 계기로 그들은 가까워진다. 그들은 암호로 적힌 노트를 공유하거나 숲 속의 비밀 아지트에 머물면서 조금씩 사랑을 키워간다. 어느 날, 그들은 '재욱'과 '태식'과 함께 공사 발파 현장 구경을 갔다가 발견한 동굴 안에서 빛이 나는 알을 밖으로 가지고 나온다. 성민이 호기심에 그것을 깨트리자 시간의 흐름이 중단된다. 하늘을 날던 새들은 그대로 정지되어 있고, 때마침 머리핀을 찾으러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간 수린도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 시간은 오로지 성민과 친구들을 향해서만 흘러간다.

이제 그들은 모든 사람과 사물이 멈춰선, 그저 신기하기만 한 세상 속에서의 삶을 마음껏 즐긴다. 그 세상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내키는 대로 취식을 하거나 매장에서 마음대로 옷을 골라 입는 등, 그 절대적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 일탈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천식 환자인 재욱이 죽자, 그들은 현실의 끔찍한 민낯과 마주한다. 시간 속에 고립된 삶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한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감각의 상실뿐만 아니라 공간을 지각하고 사회적으로 관계 맺는 능력의 결핍마저 초래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성민과 태식의 몸은 장성했지만 정신은 초등학교 6학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들은 서른이 넘은 성인의 육체 속에 갇힌 소년들이다. 그들에게만 허락된 시간의 흐름이 부여한 육체의 자유 이면에는 절대적인 고독이라는 영혼의 구속이 기다리고 있다. 태식은 그 고독을 견디다 못해 바다에 뛰어든다.

마침내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지만, 고립된 시간에 너무 오래 길들여진 성민은 그 흐르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수린과 다시 만나면서 비로소 그는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그러나 이미 육체와 영혼이 크게 어긋나버린 채 현실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현실 속에서는 성민은 초등학생 수린을 사랑하는 '소아성애자' 유괴범이고 수린은 그에게 유린당한 철없는 아이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 오명을 벗겨내기 위해 그 관계의 진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번지점프를 하다>(2001)를 상기시킨다. 고등학교 교사의 사별한 여자친구가 남학생으로 환생하면서 다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동성애이자 교사와 학생간의 사랑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받는다. 그 동성애적 외형은 그들의 진실한 이성애적 관계가 극복해야할 사회적 편견이다. 이제 금단의 사랑은 동성애에서 소아성애로 치환되며 더 많은 논란을 야기한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수린은 다시 알을 깨트려 성민처럼 어른이 되고자 한다. 이미 그 깊은 고독을 경험한 성민이 그녀를 만류한다. 그러나 그는 수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그 기나긴 고독 속에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내던진다.

중학생이 되어 뭍으로 나가는 배 안에서 수린은 희끗희끗한 머리의 성민과 조우한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성민과 아직 소녀에 불과한 수린이 보여줄 앞으로의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결말을 열어둔 채 불완전한 로맨스로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의 도덕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번지점프를 하다>가 동반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비극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동성애적 관계의 지속 불가능성을 선택한 결말보다는 깊은 배려가 느껴진다. 영화는 성민의 입을 빌어, 사랑은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오롯이 두 사람 간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느 누가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사랑을 믿어주면 그만이다. 이것은 사랑을 둘러싼 모든 관계를 포용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급진적인 선언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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