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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 | 칼럼·시평 [문화시평]
경계인이 본 화가의 삶과 작품
박종수의 귀향전
김원용(2017-03-15 09:38:49)



"애라! 이것도 그림이냐, 내 유치원 아들도 이 정도보단 낫겠다."
고교 재학시절 미술시간에 그린 필자의 `작품`에 가한 미술 교사의 무지막지한 혹평이다. 40년 가깝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미술 교사의 평가가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필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미술 선생이 화제로 나올 때면 필자와 비슷하게 인색한 평을 받았다고 기억하는 동기들이 많다. 어떤 동기는 원근법을 무시한 산 밑의 집을 그린 그림을 놓고 개집이냐는 핀잔을 받았다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리 아무렇지 않게 학생들의 마음을 후빈 그 미술 선생님이 박종수 화가다. 돌이켜보면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출 수 있다`고 좋은 면을 칭찬할 수도 있었으련만 박 선생님은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이었던 것 같다. `교사 박종수`의 이미지는 이렇게 냉철한 선생님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박종수 선생님에 대해 한 가지 색깔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선생님의 `진짜 제자`들을 만나면서다. 학교 동기이면서 선생님의 미술부 제자였던 조각가 엄혁용(전북대 교수)은 박종수 선생님이 없었다면 오늘의 본인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선생님은 미술부원들에게 항상 "예술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고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님의 작업열정 또한 대단해 미술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붓을 손에 놓은 적이 없었다. 서양화에서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선생님의 조언과 격려가 있어 가능했단다.

이런 미술부에 대한 선생님의 응원과 관련해 필자가 기사로 쓴 적이 있다.
"한 스승에게서 배운 화실 출신 화가들이 다시 뭉쳤다. 젊은 열정으로 제자들을 지도했던 스승은 원로가 됐고, 제자들은 각지에서 중견 작가 혹은 교직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원화실'을 운영했던 서양화가 박종수 선생과 그 화실 출신 제자들의 이야기다.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고 '북쪽창이 있는 화실전'을 열었다.
예술평론가 겸 서양화가로 활동중인 예원예술대 김선태 교수·전북미술대전 초대작가 박진영씨·조각가 엄혁용 전북대 교수·판화가 윤리나 밀워키 예술대 교수·서양화가 김용석·엄경희·이숙희·이정란씨 등이 주요 멤버다.
'북쪽창이 있는 화실전'은 당시 전주 고사동 소재 원화실 건물이 북향이었고, 창문들이 북쪽으로 난 데서 붙인 이름이다.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이 붙여준 이름이란다. 그 이름으로 10년 전쯤 전시회를 가진 후 흐지부지 됐다가 이번에 재개했다.
미술이 하고 싶어 재수시절 화실을 찾았던 김선태 교수는 "지금과 같은 입식학원 같은 삭막함이 아니라, 사제의 정과 선후배간 우정이 쌓였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원화실'은 박종수 원장이 당시 전북사대부고 교사로 재직하며 78년부터 5~6년간 운영했고, 여기를 거쳐간 원생은 30명 안팎이다. 전시회는 특별한 주제나 이념 없이 학창시절 추억을 꺼내보는'정'으로 만들어졌다."
'30년 전 師弟의 情, 그림으로 꽃피우다'는 제하로 2012년도 전북일보에 게재한 기사다.

학생 시절의 이미지는 그저 기억의 편린일 뿐이다. 선생님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된 것은 기자라는 직업 때문이다. 교직과 작업실을 서울로 옮긴 뒤 전북에서 큰 활동이 없었지만, 필자에겐 오히려 선생님과 끈을 잇는 기회였다. 제자와 지인들의 전시회를 꼬박꼬박 챙기는 선생님을 전시장에서 뵐 수 있었고, 뒤풀이로 이어지면서다. 학생 때 그림을 그리 타박했던 선생님은 요즘엔 학교시절 필자를 무척 아꼈다고 우길 정도로 친근감을 드러내신다. 그럼에도 필자는 여전히 선생님에겐 주변인이며, 경계인일 수밖에 없다. 제자이지만 미술부 제자가 아니고, 문화부 기자로 꽤 활동하면서도 미술 관련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고민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자로서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을 세세히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운운하는 것도 분에 넘치기 때문이다. 다만 제자 겸 기자로서 피상적이나마 선생님의 단면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것 같다.

90년대 초 서울행을 결정했을 때 지역 미술인들의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은 전주에서 함께 활동하며 지역 미술발전을 위해 만류했으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은 서울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마음은 고향에 놓고 간 듯하다. 서울활동 시기에 가졌던 9차례의 개인전 중 2차례를 전주에서 열었다. 지역 미술인들과의 단체전이나 지역 미술행사 참여에도 뒷짐을 지지 않았다. 2년 전 서울 토포하우스갤러리에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는 고별전을 가졌다. 그리고 곧바로 2015년 늦여름 전주에 작업실을 차리고 귀향했다.
박종수 선생님에게 26년의 서울 생활은 또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전주로 귀향한 후 1년 반만에 마련한 개인전이 이를 말해준다. 2월 중순 우진문화공간과 교동아트미술관 2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된 귀향 후 첫 개인전은 박종수 화가의 새로운 면모와 저력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다.
"70~80년대 시대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소임을 느껴 `한국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그림을 20여년 그렸다. 교직 명퇴 후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초현실적 환상`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이제는 이를 중심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는 전시회 오픈식에서 "지난 삶을 통한 `과거의 기억`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접목하여 환상적으로 이끌어내느냐는 고민을 안고 작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희를 넘겨서까지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이 물씬 배어난다.
`살아오며 가장 열심히 한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었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역시 그림뿐이라고 자부한다`는 박종수 선생님. 13번째 개인전으로 귀향 신고식을 마친 선생님으로 인해 전북화단이 더욱 풍성해지고, 선생님 작업의 중심에 두고 있는 데페이즈망이 관객들에게 큰 울림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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