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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나의 청춘은 여전히 불온한가?
아거 「불온한 독서」
이휘현(2017-03-15 09:45:48)



내가 지나온 30대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직장생활의 빠듯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읽고 쓰고 마냥 몽상에 잠길 수 있었던 20대 시절의 헐거웠던 시간들과는 전혀 다른 기억이다. 앞날에 대한 불안의 정도로 따지자면 다른 시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공포에 시달렸던 20대 시절이지만, 30대 이후 펼쳐진 단조로운 삶에 비하면 차라리 보잘 것 없었어도 날 것 그대로의 자유가 있었던 그 시간들이 나는 좋았다. 20대 때의 나는, 그냥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직장을 갖게 된 30대 이후의 내 삶은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
나이가 마흔 즈음에 다다르자 조바심이 났다. 무언가 내 인생의 곡선을 꺾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의미 없이 나이 들어가 버리지 않을까? 완벽한 복원은 힘들겠지만, 불안하되 내 마음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잃어버린 청춘이 미치도록 고팠다. 무언가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 그렇다고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바심에 시달리며 살아온 기억으로 30대를 관통하면서, 나에게는 부양가족이 생겨났다.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면서 내 삶의 결도 두터워졌다. 그 자체로 나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긴 했지만, 고독에 비교적 익숙했던 청춘의 시절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내 삶도 큰 변화를 겪었다. 더군다나 지난 10여 년 간 길들여진 내 수입 반경 안에서의 소비 패턴에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빈티 줄줄 흐르던 20대 시절과는 뜻밖에 다른 세월을 구가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안온함을 굳이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타협책은 무얼까?
1년에 한 권씩 책을 내보기로 했다. 내 나이 마흔 즈음에 다다를 무렵의 다짐이었다. 좀 벅차다면 2년에 한 권 정도도 좋고.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대학교 다닐 때 공동저자 형식으로 책을 몇 권 낸 경험도 있으니 아예 불모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 한 번 질러보자!
일단 인터뷰집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서 잊혀졌지만 쉽게 잊혀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물론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사람들을 골랐다. 그렇게 몇 사람들을 어렵게 수소문해서 만나 인터뷰를 땄다. 그런 식으로 대여섯 차례만 더 진행하면 의미 있는 인터뷰집이 하나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신감이 바래갔다.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의미가 있을까? 작게 시작한 고민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결국 인터뷰집 출간 계획은 포기로 이어졌다. 또 다시 의지박약의 징후가 나타나는구나! 나는 절망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인터뷰집을 멋들어지게 한 권 내고, 그간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독서'관련 글들을 모아 책 한 권을 더 내고, 또 여유가 된다면 책읽기의 즐거움을 설파하는 멋진 에세이를 내었어야 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어야 했다. 하지만 내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강렬한 욕망의 여진만이 공허하게 내 가슴을 맴돌고 있을 뿐.
내 오랜 친구가 책 한 권 냈다는 소식을 접한 지난 달에도 여전히 나는 그 헛헛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오랜 친구의 책 출간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의외의 일격이었다고 할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워낙 상대적인 속성이 강해서 그런 지 그 소식을 들은 후 며칠 동안은 내가 루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이렇게 직장에 얽매어 살다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빈 껍데기를 발견하겠지…'. 패배의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친구의 책을 사서 읽어보기로 했다. 책 제목이 <불온한 독서>다. 책표지는 깔끔하고 예쁘다. 하지만 타이틀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불온한?? 그 단어는 왠지 지나가버린 청춘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직도 이런 말을 대놓고 쓰다니.. 쯧쯧,..' 그러고 보니 그 친구와 내가 아주 오래 전 애독했던 시집 중에 허연 시인의 <불온한 검은 피>가 있었다. 그 시집 한 권으로 축낸 술값이 얼마인가. 20대 때는 그 친구나 나나 '불온'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어차피 주류에 끼기 힘든 떨거지 청춘들이었다. 세상의 양지에 설 수 없다면 차라리 음습한 곳에서 불온하게 살아가리라. 위악에 들뜬 우리는 '불온'을 무기 삼아 우리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어 댔다. 우리의 가난한 주머니는 그렇게 탕진되었다.
시간은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나이 서른에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삶을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저주받은 중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각자 운이 조금씩 트였는지 각개 약진에 나름 성공해서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직장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풍문처럼 남의 입을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할 뿐.
<불온한 독서>는 그 친구가 나에게 전하는 가장 최신의 근황이다. 책을 펼친다. 머리말에 나이 마흔에 대한 이야기가 박혀있다. '마흔앓이'는 나 혼자만 한 게 아니었다. 그 마흔앓이가 산통을 겪어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술로 몸만 축낸 내 불혹에 비하면 이 얼마나 생산적인가. 나라는 인간은 역시 루저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불온한 독서>는 '아거'라는 필명으로 쓴 내 친구의 독서 기록이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세상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과 엮었다. 상당수의 내용들이 불합리와 부조리로 얼룩진 세계를 향해 일갈한다. 그 마음이 꽤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책이 술술 읽히길 바랐는데, 글들이 내 머리와 가슴에서 툭툭 튕겨져 나갔다. 지나치게 착한 글들이라고 해야 할까? 말은 불온한 독서라고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너무 착한 독서처럼 보였다. 나는 어쩌면 '불온함'의 의미가 좀 더 현실적이고 변칙적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친구는 그 의미를 상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 가져와 썼다.
나라면 진짜 불온한 독서를 하고 그 느낌을 불온하게 내뱉었을 지도 모른다. 날 것인 그대로. 하지만 나는 타이틀에다가 '불온'이라는 단어는 절대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그 친구와 나의 차이다.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린데 만날 징징대는 나를 큰 형처럼 달래주고 잡아주었던 사람이 그 친구다. 그런데 글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 친구는 여전히 우직하고 착하다.


글을 쓰는 행위, 또는 생각하는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자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행위다.  - 아거, <불온한 독서>, 20쪽 -


개인은 좀 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는 더 다양해지고 은밀해졌다. …… 이때 필요한 것이 '깨어있는 개인'이다.    - 같은 책, 285쪽-
 
조지 오웰과 리영희, 하워드 진, 에리히 프롬, 한나 아렌트 등을 읽으며 철학의 깊이를 더해가는 친구에 비하면 나는 저잣거리의 책들을 더 갈구한다. 그리고 그 속됨에 안도한다. 반면 친구는 여전히 세상과 맞장 뜨려고 한다. 그 고지식함에 나는 또 한 번 안도한다.
나이 마흔이 되었고 우리는 가장(家長)을 가장(假裝)하며 살아간다. 그 마음 어느 구석에는 여전히 식지 않은 청춘의 불온함이 남아 있을까?
친구는 <불온한 독서>를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런데 나는 무엇으로 나의 건재함을 증명할 수 있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술 한 잔 하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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