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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 | 칼럼·시평 [문화칼럼]
소망 같지 않은 소망
이영하(2017-05-19 14:20:28)

세월호 참사가 있던 2014년 9월 안산 와동에서 '치유공간 이웃'(이하 '이웃')이 문을 열었다. 3년간 유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울고, 또 오래도록 아이 이야기를 하고, 뜨개질을 했다. 어쩌면 '이웃'의 3년은 이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참사를 당한 부모에 비할 바 없지만 함께 슬퍼했던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이웃'에 자원활동을 왔고 이들과 함께 밥을 지었다. 유가족들에게 마음을 보태고 싶던 수많은 사람들이 된장이며 고추장, 각종 채소와 과일을 보내주었고, 이를 정성껏 씻고 다듬어서 밥상을 내왔다. 몸이 아파 친정에 온 딸을 위해 온갖 몸에 좋다는 것들을 정성을 다해 차려내는 친정엄마의 심정으로 그렇게.

'이웃'은 거의 늘 이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세상에나 벌써 3년이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달력도, 시계도 없는 곳에 있던 어느 날 '3년이 흘렀습니다'라는 외지 사람의 소식을 전해 듣는 느낌이랄까. '이웃'에 있다 보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것을 잘 느끼지 못 할 때가 많다. 거의 매일이 같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유가족 엄마들이 '이웃'에 오면 듬성듬성 마루에 둘러앉아 각자의 뜨개질 거리를 꺼내들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이어간다. 대화가 흐르다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아이 이야기, 또 그러다 4월16일 팽목에서 본 아이의 마지막 모습으로 이야기가 옮겨간다. 검안실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고 혼절했던 일, 젖은 아이 머리칼을 만지던 감촉, 바다냄새가 훅 하고 올라오던 젖은 옷, 이마에 난 상처 모양까지 세세하게 말하고 나서야 끝이 나는 이야기다. 그러다보면 엄마 눈에 맺혔던 눈물이 주르르 떨어지고 듣는 이웃치유자(이웃의 자원활동가를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도 함께 운다. 3년 동안 똑같이 반복되는 매일매일의 '이웃'풍경이다. 500일이 되었느니, 1000일이 되었느니, 3년이 되었느니 하는 SNS의 떠들썩한 이야기들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을 만큼 똑같은 하루하루다. 옛말처럼 세월이 약이 되어, 흐르는 시간만큼 고통이 엷어지면 좋으련만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만 같다. 언젠가 이명수, 정혜신 선생님의 "아이 잃은 고통은 평생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부모들이 눈을 감기 전까지 안고 가야 할 거예요. 이 고통은 치료의 대상도 아니고, 치료할 수도 없어요."라는 얘기에 나는 절망했다. 이 고통이 눈을 감기 전까지 평생 간다니 이를 어쩌나.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유가족 엄마들은, 큰 위로가 됐다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다.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다는데'절망'이 아니라 '고맙다'니. 내 고통이 얼마나 큰 지, 이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아주어서 고맙다고 울면서 이야기하던 그 말이 오래도록 남는다.

3년이 된 지금, 어쩌면 이 말은 '이웃'이 해왔던 3년의 시간을 설명해주는 것일 수도, 또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져야 할 병처럼 여겨지거나,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충고, 가슴에 묻는다는 옛이야기를 들먹이는 위로 아닌 위로가 정석처럼 들려온다.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보면 죽을 것처럼 힘든 내 고통이 유난스럽게 느껴지면 어쩌나 싶고, 숨죽여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없어지지 않을 고통이라는데도 그걸 '알아주는'것이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반갑고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아픈 게 당연하고 우는 게 당연하다는 인정, 그리고 같이 울며 그 고통의 터널을 손잡고 걸어가는 것, 그것이 이 참사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치유'가 아닐까. 유가족과 함께 하며 솔직히 가끔은 드라마틱한 변화나, '슬픔을 딛고 더 강하게 살아가는'과 같은 상투적인 문구가 실현됐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프지만 버티며 살 수 있기를,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때때로 마음껏 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소망일 수도 있다. 이런 소망 같지 않은 소망조차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아이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가끔은 크게 웃고 또 그러다 펑펑 울면서 보내는 슬프고도 힘겨운 하루도 누군가의 기도 같은 마음을 만나지 못 하면 가능하지 않다. 누군가가 든든히 뒤를 받쳐주는 듯한 보이지 않는 (또는 보이는) 그런 지지대를 딛어야만 살 수 있는 하루인 것이다. 물론 그 지지대는 사람의 마음으로 단단해지는 그것이다. 눈물 흘릴 때 조용히 손을 잡고, 손수건을 건내고, 촛불을 들러 광장에 나가고, 서명대에 줄을 서서 내 이름 석자를 쓰고, 작은 노란 리본을 다는 것이 삶을 지탱해주는 소중한 지지대이자 버팀목인 것이다. 길을 걷다가어떤 이의 가방에 달린 노란리본이 방석처럼 커다랗게 보였다고, 그리고 그 리본을 보고 또 하루를 어찌어찌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흔하디 흔하게 유가족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아이 잃은 고통은 평생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에 나처럼 절망한 많은 분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그 고통을 알아주는 일, 그래서 같이 울어주는 일,  그 슬픔과 함께 가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치유'이고 '소망'이라고 말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의 하루하루 삶을 지탱해줄 지지대를 놓아주는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라고. 드라마틱하지도, '슬픔을 이겨내는'일 따위도 없지만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만들어주는 일을 우리가 해왔고 또 할 수 있다고 꼭 말하고 싶다. 게다가 노란 리본을 다는 것 같은 그런 작은 일로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이 소망 같지도 않은 소망이 '소망'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작은 행동으로, 죽을 것 같은 절망에 빠진 어떤 유가족이 또 하루를 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부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정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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