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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5 | [문화저널]
새로찾는 전북미술사 능란한 필치의 전통주의 화백 최명룡
이철량 전북대 미술학과 교수(2003-09-23 14:34:09)
전북지역 미술에서 17C는 상당히 년대가 올라가는 편이다. 왜냐하면 현재 발굴된 옛 그림의 상태에서는 적어도 17C이전의 작품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되는 최명룡(1624-1700)이전의 작가를 확인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이 작가도 『호남한국화 300년 도록』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작품 내용으로 보아 당시 그이 수진이 매우 높은 기량을 보이고 있어 당대에 화가로서 명성이 뚜렷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다른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그는 분명 향리에 은둔하면서 필묵과 문장을 즐기며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기를 몹시 꺼려했던 선비화가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일 다른 경우라면 도화서(圖畵署. 조선조때 그림 그리는 화가들을 모아놓고 필요한 그림을 그리게 하였던 기구. 이곳에 들어가면 종6품에서 9품까지의 벼슬을 하게 되며 시험을 치러 합격시켰음)화원으로 궁중화가였으나 활동이 미비하여 기록에 남겨지지 않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남아있는 그의 작품이 매우 출중하고 이에 비해 알려져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렇듯 최명룡은 작품의 수준에 비해 출생가계나 활동내역이 극히 미비하나 1624년(인조2년)에 전주에서 출생하였다 한다. 전주 최씨로 자(字)를 여운(汝云)이라고 하였고 호를 석계(石階)라고 썼다. 소개되는 죽림칠도(竹林七圖)에서도 석계라는 호를 쓰고 있다. 급당 이우기(及堂 李遇祺)에게 사사하였다 하나 스승에게서 한문공부를 하였는지 그림공부를 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우기는 화가인명부에 전혀 기록이 전하는 바 없어 화가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또한 중년에 변산에 들어가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다고 하는 걸 보아 최명룡이 직업화가이기 보다는 사대부(士大夫)화가였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당시 유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홍패, 이기패, 이상패 등을 배출했다고 하는 걸로 보아 그는 학문 특히 유학에 깊은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소개되는 죽림칠도와 같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필치를 보인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그의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재능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경우, 이를테면 사대부로서 그림에 능란한 솜씨를 보였던 윤두서, 이경윤, 이징 등이 조선조 전기에 활동하여 미술사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최명룡은 비교적 전통주의에 충실하여 시대적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상과 같은 사대부 화가들에 버금가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죽림칠도(竹林七圖)는 일곱 사람의 현자(賢者)와 이들을 시중들고 있는 한사람의 동자를 포함해 여덟 사람이 대나무 숲이 우거진 강변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담소하며 자연과 벗하고 지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인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표정과 동세가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두 팔을 활짝 들고 있는 역동감 있는 인물과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는 인물, 그리고 왼편에 술잔을 들고 반갑게 친구를 맞고 있는 인물, 우측 끝에서 벼루에 먹과 종이를 펼쳐놓고 싯귀를 짜내고 있는 인물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고 있다. 또한 모임에 늦게 도착하여 동자의 인사를 받고 있는 친구를 향해 반갑게 손짓하거나 인사를 건네는 반가운 표정들이 절로 즐거운 기분을 자아내고 있다. 이렇게 흥에 겨워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연출은 둘, 셋씩 짝을 이루며 부담 없이 어우러져 있는 인물배치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왼편 두 사람은 타던 거문고를 옆에 놓고 술잔을 기울이던 참인데 술주전자가 엎어져 술이 흐르고 있는 모습에서 취흥을 한껏 돋우고 있고 중앙의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다가 친구를 맞고 있는 정겨운 풍경이고 우측 끝에서는 이들과 전혀 관계치 않고 필묵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있는 인물군들이 전혀 이웃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연을 즐기고 있다. 이렇듯 편안한 모습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면속의 한사람으로 착각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구성상의 특징은 대각선 구도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죄측 하단에서 우측 상단으로 대각선 배치된 인물들과 화면 한 중앙에서 돌출되어 올라간 바위의 방향이 우측 상단 모서리를 향해 정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한 왼쪽을 꽉채우고 오른측 상단을 시원하게 트여진 여백으로 남겨 화면의 숨통을 열고 있는데 화면에 배치된 모든 정물들이 이 무한 공간을 향해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가장 뛰어난 점은 역시 신기(神技)에 가까운 운필로 경물 하나하나를 그려낸 훌륭한 묘사력에 있다고 보여진다. 인물 한사람 한사람의 동작과 비례관계가 정확하며 얼굴의 섬세한 표정까지 각각의 특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안면 근육과 머리카락, 수염 등의 묘사가 뛰어난 사실력을 보여주며 물 흐르듯 유연한 옷자락 선이 실제감을 더하고 있다. 한점 한 획도 빈틈없이 그려져나간 대나무 숲과 바위주름선 그리고 나뭇잎 등이 매우 단아하고 정갈하게 표현되어졌다. 가히 최명룡의 학자적 기품과 정갈한 선비의 성품을 대하는 듯하다. 그가 이렇듯 신품(神品: 옛날에는 작품의 상중하를 신품, 묘품(妙品), 능품(能品)으로 분류하였다.)에 가까운 뛰어난 기량을 가진 화가였다면 필히 그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며 남긴 유작도 많았을 것이다. 다만 최명룡이 이러한 죽림칠도를 어떻게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그림 우측 상단에 죽림칠도라고 써넣었으나 보통 죽림칠현도로 전하는 그림들이 조선조 후반에 많이 그려졌었다. 고사(古事)에서 소재를 빌린 것이다. 완적(頑敵), 혜강(惠 ), 산도(山導), 향수(向秀), 유영(劉 ),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이 위, 진(魏晉)의 정권교체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는 정치적 압력에 대한 저항과 상식에서 벗어난 언행을 통해 지배 권력이 강요하는 형식적 질서를 조소하는 선비의 고고한 기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최명룡이 어떤 경로로 이와 같은 화풍을 소화해였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10년간 변산에서 은둔하였고 특히 학문에 깊은 경지를 이루고 있었던 거로 미루어 죽림칠현과 같은 기풍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그가 지방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가정한다면 당시 전주를 중시한 지역미술이 대단히 활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최명룡의 「죽림칠도」는 그의 독자적 화풍이라기보다는 당시 유행하였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어떤 경로로 취득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중국화풍의 화풍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최명룡은 이와 같은 작품을 양산해 낼 수 있는 대단히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과 당시 이러한 작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지역적 환경을 엿볼 수 있는 작가로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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