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5 | [문화저널]
판소리명창
도막소리로 이름 날린 젊은시절
명창 이일주 2
최동현 군산대교수 판소리 연구가(2003-09-23 15:05:46)
아버지에게 소리를 배워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일주는 이제 그야말로 직업적인 소리꾼이 되었다. 남원 전주 등지를 전전하며 소리를 하면서, 이일주는 자기 집안 이외의 소리를 접하게 된다. 스물다섯 살 무렵, 좀 더 나은 소리를 위해 당시 한창 인기가 있었던 박초월을 만난 것이다. 박초월은 순천에서 나 남원에서 성장하면서, 송만갑의 제자인 김정문으로부터 소리 수업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송만갑의 문하에 들어 대성한 현대 최고의 여류 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박초월은「흥보가」「수궁가」「춘향가」등을 장기로 삼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일주는 박초월을 찾아가 박초월 씨 학원에서「흥보가」와「수궁가」를 배웠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배운 것은 아니고,「흥보가」는 흥보 매 맞는 대목과 박 타는 대목,「수궁가」는 처음부터 고고천변까지를 배웠다.
좀 더 오래 있으면서 공부를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는 가난한 시골뜨기 소리꾼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잠은 학원 다다미방에서 자고, 50원짜리 밥을 사먹으며 공부하는 생활을 오래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일주는 타고난 재능으로 선생님 목을 그대로 따서 했기 때문에, 밖에서 들으면 박초월의 소리인지 이일주의 소리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초월에게 소리를 배우고 내려온 뒤에는 제2의 박초월이 났다고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전주에서는 제일간다고 하던 모 씨와 소리 대결을 벌여, 높고 고운 목으로 대번에 기를 취었던 것도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이일주는 박초월에게 배운 2-3년 뒤에 또 김소희를 찾아갔다. 김소희는 박초월, 박녹주와 더불어 1930년대 후반 이후 현대 판소리의 여성 트로이카로 군림해온 사람이다. 박녹주가 말년에 목을 많이 상하여 왕년의 기량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김소희와 박초월은 그야말로 우리 여성 판소리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일주는 당대 최고의 소리를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박초월에게 배운 다음 또 김소희를 찾은 것이다. 이일주는 타고 난 목과 능력으로 김소희에게도 사랑을 받는 애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소희에게도 오래 배울 수는 없었다.「심청가」와「춘향가」한 대목씩을 배우고는 곧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초월과 김소희에게 도막소리를 배운 뒤 이일주는, 자신의 표현을 빌면, ‘최고에게만 똑 떨어지게 배웠으니 나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한참 도막소리로 이름을 날리며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지내던 이일주에게 새로운 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암울한 그림자로 시작되었다. 자신의 딸이 전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소리를 계속할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당시 남원에 살던 이일주는, 남원 살림을 정리하고 딸을 따라 전주로 올라오면서 소리를 작파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않고, 숨어서 살 생각을 했다. 천대받는 소리꾼의 자식이라는 말을 딸에게 듣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주로 이사를 와서 한동안 숨어 살고 있는데, 성운선(전북 순창 출신의 소리꾼으로, 현재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이다)이 어떻게 알고 초청을 했다. 성운선은 전주에서 큰 요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일주를 초청하며 소리를 들어보고는 오정숙에게 소리를 배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오정숙은 전주에서 한일식당이란 음식점을 하면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일주는 속으로‘나도 소리는 할 만큼은 한다.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안되고, 성질도 무섭다는 디, 내가 뭣 헐라고 소리를 배워?’하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 여러 명이 함께 와서 억지로 끌고 가는 바람에 오정숙을 만나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사실 소리를 작파한다고는 했어도 늘 소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오정숙의 소리를 막상 들어보니‘자존심은 어디 호랭이가 물어가 버리고, 그냥 맘이 칵 쏠려버리더라’는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쏠려버린 데는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오정숙이 소리를 내는데, 자기 아버지가 하시던 소리와 꼭 같더라는 것이다. 이일주의 부친 소리와 오정숙의 소리가 왜 같은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일주의 부친 이기중이 김연수와 함께 공연을 많이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기중이 당대의 대명창 김연수의 소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오정숙은 김연수의 제자로서 김연수의 소리를 충실하게 이어받았으므로, 두 사람의 소리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을 수 있겠다는 추정은 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이일주는 오정숙의 제자가 되어 새로 소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가 1973년이니, 이일주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