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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 | 기획 [전북에 가야사가 온다 ③]
정확한 고증과 규명이 올바른 가야사를 세운다
김세희(2017-08-28 14:34:48)



역사기록은 승자의 잔치다. 승리자가 남긴 기록이 그대로 역사가 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가야는 신라, 백제에 병합되면서 역사에 제대로 초대받지 못했다. 패자의 기록은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처럼 스스로를 주체로 서술한 역사서를 가지지 못했다. 한국 고대사가 삼국시대라 불렸던 것을 봐도 가야사의 소외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동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일원이었지만 제외된 것이다.
특히 전북의 가야사는 긴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1982년 남원 월산리에서 고총이 발견돼 호남 가야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지만, 이후 진전은 없었다. 전북 내 자치단체의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가야사는 영남권 자치단체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김해시와 함안군, 고령군, 의령군은 역사문화도시라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앞 다퉈 가야사 마케팅을 벌였다. 학술행사와 유적복원작업도 마치 유행이라도 한 듯이 활발히 이뤄졌다. 반면 전북의 가야사는 여전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15년 대규모 제철 유적지가 장수군과 무주군 일대에서 발견됐다. 주로 대형고분 중심으로 발견됐던 영남권과 달리 철의 생산지가 발견돼 관심이 모아졌다. 가야의 중심지라 하는 김해와 고령에서도 발견된 제철유적은 없었다. 더 이상 전북을 가야사의 변방으로 치부하긴 어려웠다.
그로부터 2년 후 또 다른 전기가 마련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6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복원사업'을 정책과제에 포함할 것을 지시했다. 가야사의 부활은 국가사업이 됐다. 영‧호남 벽을 허물 수 있는 사업이라는 명분하에 양 자치단체들은 가야사 연구와 복원사업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북도는 전북가야만의 독창성을 살리기 위해 제철유적과 봉수유적이 대거 발굴된 장수와 남원 등 동부권을 중심으로 발굴‧복원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전북가야 연구복원 TF팀과 전문가협의회도 발족시켰다. 이날 TF팀과 협의회는 도내 가야사 유적 분포지 674곳 중 271곳을 전략사업지로 선정했다. 내년부터 8536억 원을 들여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벌인다.
전북 가야사의 권위자인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전북의 가야는 철의 테크노벨리였다"며 "발굴‧복원 작업이 진행되면 가야사의 중심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전북의 가야사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유물과 유적이 새로운 가야사를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현재 전북의 가야사와 유적지, 향후 과제에 대해 조명해야 하는 당위성도 부여해준다. 전북의 가야 유적 유물을 제대로 복원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전북의 가야사를 엿볼 수 있는 기록과 가야유적 분포 현황, 이들이 갖는 의미를 정리해본다.


무명(無名)의  전북가야='금관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려시기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나온 가야국들의 이름이다. 이 중의 전북에 있던 나라는?
정답은 '없다'이다. 금관가야는 경남 김해시, 아라가야는 경남 함안군, 소가야는 경남 고성군, 고령가야는 경북 상주시, 대가야는 경북 고령군, 성산가야는 경북 성주군에 있었다.
가야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 다른 사료에서도 전북의 가야는 찾기 힘들다. 가야사는 중국사료인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 '양직공도(梁職貢圖)', '남제서(南齊書)',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한국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등에 단편적으로 전해져온다.
이들 가운데 일본서기와 양직공도를 통해 장수와 남원에 가야소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반파(伴跛)라는 나라는 전북과 개연성이 있다. 기록에는 "반파는 백제와 3년 전쟁(513년~515년)을 치르면서 봉수를 쌓아올렸다"고 나온다. 곽장근 교수는 "다른 사료와 비교해봤을 때 반파는 가야계 소국으로 추정되는 데, 여기서 봉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 시기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양직공도에는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일대에 각각 상기문(上己文), 하기문(下己文)이라는 소국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곽 교수는 "이들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백제에 의탁하면서 연명했던 소국들이다"며 "이 지역에서 발굴된 토기와 봉토분 양식을 문헌사료와 비교해보면 가야계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반파와 상기문, 하기문도 추정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 많은 사료와 유물유적, 연구성과가 축적돼야 한다는 게 대다수 가야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장수와 남원의 가야사도 곽 교수가 편의적으로 장수가야, 운봉가야로 명명하고 있다. 사실 전북의 가야는 삼국유사에 나온 여섯 가야처럼 옛 이름을 찾지 못했다. 
곽 교수도 "영남권 가야사는 문헌기록과 유물유적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히 규명되지만, 전북은 그렇지 못하다"며 "기록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현재 지표조사가 된 유물 유적에 대한 속도 있는 발굴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북 가야사의 비밀을 풀 열쇠…제철과 봉수

기록이 부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집중적인 발굴을 통한 고고자료의 축적이다. 기록이 부족한 역사는 유적과 출토된 유물로 이야기한다. 토기에 새겨진 명문(銘文),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 등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좋은 재료다.
전북의 가야사도 마찬가지다. 도내 곳곳에 존재하는 유물 유적은 비밀을 풀 열쇠가 될 수 있다. 전북도에 따르면 도내 가야유적은 남원‧장수‧완주‧무주‧진안‧임실 등 6곳에 고분과 제철유적, 봉수, 산성 등 모두 674기가 분포돼 있다. 이들 가운데 제철유적 129기와 봉수 65개소는 다른 가야문화권 지역과 차별화된다. 특히 제철유적은 가야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김해와 고령에도 없다. 곽 교수는 "지질학적으로 영남권은 철을 생산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며 "반면 전북 동부지역은 니켈이 함유된 최상급의 철광석이 매장돼 있어 철을 생산하기 좋은 여건이다"고 설명했다.
전북에서 대표적인 제철유적지는 장수 명덕리 대적골과 남원 운봉고원이다. 철의 생산지였다는 사실을 통해 가야의 중심세력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곽 교수는 "철은 현물경제의 중심이자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이어 "철은 생산자가 팔러 다니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자신의 물건과 철을 바꿔간다"며 "때문에 철은 곧 힘을 상징하고 철을 생산했던 집단은 중심세력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은 주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장수와 남원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제철유적과 관련이 있다. 우선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서는 편자(말발굽)가 발견됐다. 당시 말은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또 삼봉리 주석곽에서는 환두대도(環頭大刀, 고리장식칼)가 부장된 흔적이 발견됐는데, 환두대도는 권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위신재(威信財)다.
또 지난 2010년 남원시 월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는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최상급 위세품이다. 청자계수호는 중국과의 독자적인 외교가능성을 시사한다. 전북이 가야의 변방이 아니라 중앙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이 고분에서는 철제초두(鐵劑鐎斗), 금제 귀걸이. 갑옷, 투구, 기꽂이 등의 위신재들도 함께 발견됐다.
문헌사료에 나온 지역과 제철유적지가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지표조사 결과로 밝혀진 남원 운봉고원 일대 35개소의 제철유적지는 중국문헌 양직공도에 나오는 기문국(己文國)이 있던 자리다. 또 이 근방의 가야계 고총에서는 철기 100여점과 청동거울, 금동신발, 철촉다발, 말뼈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를 두고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기문국이 막강한 세력을 이룬 가야계 국가였다는 추정까지 나온다.
봉수도 전북 가야사를 규명해줄 수 있는 대안적 사료다. 봉수는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왕에게 알리는 통신시설이다. 한국 고대시기의 봉수가 발견된 곳은 전북 동부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 봉수를 가야계로 해석하는 이유는 주변에 가야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봉수 주변에는 가야계 산성과 석축, 수혈식 석곽묘, 축대시설 등이 분포돼 있다.
봉수의 실체는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곽장근 교수는 해당 사료의 내용과 장수의 봉수터를 비교분석해, 봉수의 종착지가 장수의 삼봉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변에 가야계 삼봉리 고분군이 있고, 장수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어 금산, 진안, 무주, 남원, 임실 봉수로의 신호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또 봉수의 종착지가 장수라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반파는 상당히 가야의 강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봉수로의 종착지에는 왕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전시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부연했다.


향후 과제와 에필로그

전북의 가야사가 갈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 여전히 더 많은 발굴과 실증, 연구성과가 필요하다. 현재 발굴된 유산은 도내 전체 가야유산의 50%에도 못 미친다. 나머지 50%는 지표조사만 된 상황이다. 발굴작업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섣부른 고증을 통한 역사복원과 관광마케팅의 폐해는 이미 다른 가야문화권의 자치단체들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일례로 김해에서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출신이라면서 인도에서도 홍보를 펼치는 등 다방면으로 상품화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삼국유사에 허황옥의 고향이라고 나온 아유타국은 당시 인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자체도 정사(正史)가 아니다. 나중에 이렇게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으려면 도리어 불필요한 비용만 발생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 규명에 집중해야 되는 이유는 또 있다. 도내뿐만 아니라 한국의 가야사는 문헌사료가 적어 연구가 풍부한 편이 아니다. 안정준 경희대 연구교수는 "가야사 전공학자들도 현재 가야의 영역과 문화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며 "정확한 사실 규명을 위해서는 오히려 정부가 역사전문가들을 잘 선별해서 연구프로젝트에 먼저 지원하는 게 우선이다"고 주장한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도 그의 최근 논문 '가야사 연구의 새로운 진전을 위한 제언(한국고대사 연구 2017. 3)에서 "문헌을 치밀하게 재검토하는 일부터 발굴을 통해 새로이 알려진 고고자료도 활용하면서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야사 복원에 있어 역사적 사실 규명과 행정과의 조화를 과제로 갖고 있는 전북에 절실히 와 닿는 얘기들이다.
우선 역사적 사실 규명에 대한 과제다. 전북도와 전북가야 연구복원 TF팀 등은 장수에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반파'와 남원의 '기문국'을 중심으로 가야사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곽 교수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젝트다. 우선 장수 '반파'가 봉수의 종착지였다는 전제는 현재 학계의 정설과 통설까지 뒤집는 시도다. 학계에서는 반파를 고령의 대가야로 비정하고 있다. 곽 교수는 이에 대해 "전북에 대가야가 존재했다면 전북 동부의 봉수가 고령까지 이어져 있어야 한다"며 "하지만 전북 동부와 대가야 사이에는 봉수가 없다"고 반박한다. 개인적으로 곽 교수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많은 연구와 발굴을 통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봉수의 종착지라고 보이는 장수 삼봉리 봉수가 유물 자체만 놓고 보면 산성인지 봉수인지 명확히 분간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봉수라는 근거는 주변에 중대형 고총 등 가야계 유물이 있다는 것인데, 아직 단정하기는 부족하다고 보인다. 더구나 이 유물에 대해서는 지표조사만 끝난 상황이다. 발굴작업을 진전시키고 유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문헌사료와 일치시킬만한 명문(銘文)등의 핵심사료가 필요해 보인다.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기문국 역시 마찬가지다. 기문국 역시 장수의 반파와 더불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전제하에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장수 철제유적과 가깝다는 점과 편자(말발굽), 환두대도(環頭大刀), 중국계 청자 등의 위신재가 발견됐다는 점이 근거로 꼽힌다. 중국문헌 양직공도에 기문국이 나왔다는 사실도 다른 근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철제유적지에 대한 정확한 시기비정이 안됐다는 사실이다. 철제유적이 처음 발견된 이후 '주변에 가야고분 등의 유적이 있으니 가야의 철제다'는 것을 전제해 두고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북에는 가야뿐만 아니라 백제와 후백제도 존재했다. 좀 더 치밀한 고고학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시기 비정이 요구된다. 철제유적은 전북 가야사의 핵심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계 24개 소국과 전북 유물유적의 비교분석을 통해 전북가야의 옛 이름을 찾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연구팀과 행정과의 조화도 가야사 규명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 동안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지역이 역사를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실패로 끝난 경우도 많았다. 역사복원보다 도로 및 철도 구축, 지역 특화산업 육성, 이벤트 등에 예산이 과도하게 투입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련 예산이 지역 토호가 추진하는 토목사업 부활에 기여한 바도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은 중도에 프로젝트에 불참해버리는 사태도 발생했고, 역사복원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많은 연구자는 김대중 정부 때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사를 복원한다고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많이 쓴 것에 대해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며 "당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가야사 프로젝트는 연구에 들어갔던 비용이 10%도 안 되고 대부분 토목공사나 이벤트로 쓰였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행정이 전문가들의 견해를 수용해서 발굴과 연구에 충분한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전북도는 현재 잘못된 역사복원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학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발굴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행정이 중심이 되고 가야사 전공자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는 영남권 자치단체와도 차별화된 행보다. 행정과 역사학계와도 합을 잘 맞춰나가고 있다. 김인태 전북도 문화체육관광국장도 "학자들의 자문에 발 맞춰 행정이 따라갈 것"이라는 방침을 내세웠다.
다만 일부 우려되는 바도 있다. 전북도와 전북가야 연구복원 TF팀, 전문가 협의회 등은 2020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가야문화단지 조성, 유적전시관 건립, 제철과 봉수 체험시설 조성 등의 계획을 세우고 속도를 내려 하고 있다. 가야사 발굴‧복원이 진행된 영남권과 함께 발을 세계유산에 등재시키려면, 공격적으로 복원작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고증과 규명이 동반되지 않은 섣부른 준비는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는 그것을 보고 교훈을 삼는다' 는 전차복후차계(前車覆後車戒)라는 기억에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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