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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 기획 [창간기획 ④]
사람들이 만나 역사를 만들었다
문화저널이 만난 사람들
윤지용(2017-12-11 11:47:39)



'인생이 모여 역사가 된다'고 했다. 한 사람의 삶이 실개천이라면 그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들어 역사라는 장구한 강물을 이룬다. 창간 이래 30년,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그 세월 동안 문화저널이 찾아가 만났던 사람들은 줄잡아 300명이 넘는다. 어떤 이들은 어느새 고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삶과 실천은 문화저널이 당대를 응시했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새삼 지난 시기의 인터뷰 기사들을 들춰보는 까닭은 그 기록들이 문화저널이 써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정렬시인을 만났다.
1987년 11월 창간호에서는 시집 <할 말은 끝내 땅에 묻어두고>를 낸 정렬 시인을 인터뷰했다. 그는 일찍이 1953년에 약관의 나이로 등단하여 조지훈 시인이 그 시재(詩才)를 귀히 여길 정도로 촉망받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중앙문단에 이름 날리기를 꺼려하여 정읍 회룡리의 고향마을에 살며 시골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는 늘 시만 생각한다고 했다. 좋은 시를 쓰고 싶어 몸이 단다고 했다.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시 열심히 쓰시라고 대학노트 한 권을 두고 갔다는 얘기를 하며 눈시울이 붉혔다. 인터뷰 당시 와병 중이면서도 찾아간 손님에게 따끈한 정종을 따라주었던 그는 지난 1994년 62세를 일기로 작고하셨다.
1988년 7월호에서는 화가 임옥상을 만났다. 지난 정권에서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윗줄에 이름을 올렸고 촛불집회 기간 낸 퍼포먼스로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던 그는, 80년대 당시에도 전북지역의 민중미술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작업실에서 그는 전시회에 내놓을 <아프리카 현대사>에 매달리고 있었다. 작업실 한쪽 벽을 꽉 채운 대형 캔버스 화폭에 등장하는 학자. 노동자, 군인, 아이들, 여성, 모두 흑인이었다. 그는 그 작품을 통해 단지 아프리카인들의 아픈 삶을 반영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3세계가 당하고 있는 억압과 착취를 고발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에도 변함없이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들에 대해 미술작업을 통해 발언해왔던 그는 스스로 '소셜 디자이너', '사회연출가'를 자임하며 다양한 공공미술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LA의 '퍼시픽 디자인센터'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해 8월에는 굽이굽이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서 김용택 시인을 찾아갔다. 당시에 마흔이었던 그는 고향의 작은 분교를 지키며 초등학생 꼬맹이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었다. 그 세대의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역시 책을 읽는 것이 부모님께 죄스러울 정도로 궁핍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임교사 시절에도 그의 작은 소망은 읽고 싶은 책을 마음 놓고 사다 읽는 것과 담배를 보루로 사다 태우며 담배 걱정을 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새벽마다 시를 썼다고 했다. 밤 부엉이 우는 소리, 새벽 시린 섬진강 물소리를 들으며 원고를 다듬다가 환하게 동터오는 새벽과 들꽃 무더기가 머금은 이슬과 눈부시게 흘러가는 섬진강을 맞곤 했다. 여러 대를 이어온 가난과 섬진강의 빼어난 서정이 유난히 순정한 그의 시를 빚어냈는지도 모른다. 시는 그에게 밥이고 희망이고 사랑이라고 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이 된 그는 전국에서 인문학 강의와 시 콘서트를 여는 등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시절, 신념을 노래하던 그들이 있었다
1989년 4월호에서 만난 사람은 민족시인 최형 선생이었다. '민족'은 젊은날부터 선생의 영원한 화두였다. 3년여의 고단한 작업 끝에 그 무렵에 막 완성했던 대서사시 <푸른겨울> 역시 1950년대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스러져간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통한의 절규였다. 사실 <푸른겨울>은 선생 자신이 몸소 건너온 시대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문학지망생이었던 그는 6.25 전쟁의 와중에 고향에 내려와 인민위원회에 참여하다가 인민군의 패퇴 이후 입산해서 한동안 빨치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선배 시인들 중 정지용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정지용의 시가 역사와 삶을 단순한 낭만과 서정적인 시각으로만 담아두게 하지 않고 보다 치열하게 인식하는 의식을 자신에게 불어넣어주었다고 한다. 선생의 삶과 시는 과연 치열했다. 1987년 6월에는 젊은이들과 어깨를 걸고 민주항쟁에 참여했고 노년에는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병환 중에도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으시다가 재작년 5월 고인이 되셨다.
1990년 11월호에서는 이광웅 시인을 만났었다. 당시에 그는 전교조 설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로 교단에서 쫓겨나 시내의 어느 학원에서 강사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시대에 대한 분노와 삶의 고단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텐데도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무시무시하게도 '오송회 간첩단' 사건으로 4년 8개월 동안이나 억울한 옥고를 치른 이답지 않게 맑디맑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른바 '오송회'는 군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읽으며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고 4.19 민주영령들을 추모한 것을 빌미로 보안사가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낸 가짜 간첩단 사건이다.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에서 다섯 명의 교사가 모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고초를 겪고 두 번씩이나 타의로 교단을 떠났지만, 자신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했다. 비록 학교가 아닌 학원이지만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단다. 나라의 민주화와 교육의 민주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절망한 적 없단다. 그랬던 그가 인터뷰 2년 후인 1992년에 고문후유증과 병마로 세상을 떠났다. 쉰셋, 아까운 나이였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그들
은 고인이 되신 이들 중에 여성 노동운동가 박복실도 있었다. 인터뷰가 1991년 1월호에 실렸으니 아마도 90년 연말쯤에 만났을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92년 어느 봄날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서른다섯 나이에 불꽃같았던 생을 마쳤다. 김제 용지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통근버스를 타고 이리(지금의 익산)에 있는 메리야스 공장에 다녔던 그는 개발독재 시절 노동자에게 강요되었던 혹독한 근로조건에 맞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악했던 시절인지라 당연히 해고당했고 이후 여러 회사에 입사와 부당해고를 되풀이하면서 자연스럽게 전북지역 노동운동의 '대모'가 되었다. 인터뷰 당시에는 카톨릭 노동사목기관인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후배들의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1989년 1월호에는 '전북농촌문제연구소'를 실었다. 농업종사자 비중이 높은 전북지역에서 농업과 농민의 문제를 고민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70여 명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단체였다. 이석영 전북대학교 농대 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 같은 전북대학교 농경제학과 소순열 교수가 연구부장을 맡았다. 농업과 농촌문제에 대한 조사·연구사업, 도시-농촌 협동활동 지도 및 협동교육사업, 우유, 쇠고기, 돼지고기, 쌀, 유정란 등 농축산물 직거래 및 알선사업 등을 했다. 궁극적으로는 농산물 유통단계를 줄이는 직거래 활동을 통해서 농산물의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소비자협동조합을 건설하고 유기농법-자연농법으로 땅과 사람을 살리는 생활공동체운동을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실제로 이 단체의 회원과 활동가 출신들이 지금도 전북지역 각지의 여러 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92년 11월호에서는 옥구 출신으로 군산문화원장을 지낸 이병훈 시인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전주사범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20대 후반에야 도시에 나와 신문기자생활을 했다. 그 시절에 가람 이병기 선생과 신석정 선생 등 당대의 문인들과 교분을 맺었고 1959년에 신석정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등단 이후 1970년에 낸 첫 시집 <단층>을 낸 이후 <下浦길>, <어느 흉년에>, <멀미>, <달무리의 作人들>, <녹두장군>, <눈뜨는 下弦>, <찬물 한 대접 떠놓고> 등 여덟 권의 시집을 내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평생 군산에 살았다. 그의 고향친구인 고은 시인이 <만인보> 제7권에서 "다 떠나버린 삭막한 군산항을 지키고 사는 이병훈"이라고 했던 것처럼 한평생 군산에서 시를 쓰며 살다가 지난 2009년에 타계했다. 그가 평소에 늘 "내 시쓰기는 세상살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그의 시에서는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과 그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섬세한 촉각이 느껴진다.



대물림으로 완성한 명인의 길
6년 2월호 주인공은 최승희 명창이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겠다며 한사코 반대하셨을 때 "죽어서라도 소리는 할란다"고 고집을 부려가며 소리를 배웠단다. 그러나 스물일곱 되던 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남편의 강권으로 소리공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의 스승인 김여란 명창은 한창 소리가 무르익어가던 제자를 떠나보내면서 몹시 아쉬워했고, 끈질긴 설득으로 10여 년 만에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소리판에 들어선 지 25년 만인 1980년에 남원 춘향제 전국판소리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고 이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하면서 마침내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최승희 명창의 뿌리는 서편제의 시조 박유전으로 부터였다. 그는 박유전에서 박기홍으로 이어지고 다시 정정렬과 김여란으로 내려진 춘향가의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스승인 김여란의 스승이었던 정정렬은 '절세의 명창'으로 칭송받았던 당대의 소리꾼이었다. 정정렬은 기존에 전수되어왔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독창적인 사설과 곡으로 재구성해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예인이었다. 그래서 최승희의 '정정열제 춘향가'는 지금도 판소리의 백미로 꼽힌다.

되돌아보니 80년대 후반과 90년대 무렵의 인터뷰 대상들 중에는 문화예술계 인사가 아닌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더러 있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교육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지면에 실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게 분출되는 격동의 시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문화'가 현실사회와 동떨어져 홀로 고고할 수 없는 탓이다. 문화는 결국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던가.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초등학교 선생님, 박물관 학예사, 지역 출판사 대표, 유학자, 음향설계전문가 등으로 인터뷰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정치, 문화, 역사, 예술 모두 사람에서 비롯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뷰 기사의 제목을 [사람과 사람]으로 바꾸고 더 한층 다양한 인물들을 찾아 나섰다. 전북지역의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전통예술분야의 장인들은 물론이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변영주, 춘향가 해설집을 낸 전성옥 기자, 전교조 초창기에 전북지부 위원장으로 맹활약했던 교육운동가 이미영 선생, 장터사진작가 이흥재님, 붉은악마 전북지부 송세영 회장, 마한백제연구소 김삼룡 소장 등을 두루 만났다. 사회적 경제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고 있는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의 활동가들을 찾아가 그들이 꿈꾸는 협동과 상생의 착한경제를 소개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패기로 청년창업에 도전하는 발랄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가인(佳人)은 박명(薄命)이라더니, 어질고 선한 이들을 먼저 떠나보냈다. 1980년대 군산에서 사회과학서점인 '녹두서점'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한길문고'를 만들어내고 지역서점의 명맥을 지켜가던 이민우 선생과 요가전문가이자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선각자인 배정희 선생은 이제 고인이 되셨다.

'시대'라는 날줄과 '지역'이라는 씨줄로 문화를 엮어온 30년이었다. 그동안 문화저널이 찾아가 만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활동들이 모두 귀한 의미가 있는데, 지면의 제약 탓에 다 꼽지 못하고 몇 개의 꼭지들만 간추리는 것이 몹시 힘든 일이었음을 고백하며 글을 맺는다.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인터뷰들은 문화저널 독자여러분이 최근에 읽은 기사들이라는 핑계로 자세히 소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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