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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 기획 [창간기획 ⑤]
시골에서 책과 함께 살아가는 일
사이다
전광진(2017-12-11 13:06:49)



새 책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참 전에 나왔어야 하는 책인데, 뜻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어요. 책 내기 전에 '교정을 본다'고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하는 가인쇄라고 할 수 있지요. 인쇄가 어떻게 나올지 미리 찍어 보고 여러 가지를 확인합니다. 다른 공산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시제품을 만들어 보는 셈이에요. 헌데 이 과정부터 어려웠어요. 교정을 내고 싶은 경우라 해도 교정 인쇄를 제대로 하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려워졌지요. 아주 숙련된 기술자만이 이 일을 잘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자꾸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출판에 관한 이야기들은 지난 몇 년 한결 같습니다. '책을 안 읽는다. 안 산다. 안 팔린다.' 하지요. 출판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인쇄소나 제본소에 가면 출판 시장이 어떤 형편인지 더 쉽게 알 수 있6습니다. 여러 출판사의 책을 모아서 만드는 곳이니까요. 역시 문을 닫거나, 사람을 줄이거나, 기계를 빼는, 그런 인쇄소 제본소가 적지 않습니다.
십 년 전 시골에 내려올 무렵에, 출판 환경은 본격적으로 원거리 작업이 가능하게끔 바뀌었어요. 상추쌈 출판사가 논밭으로 둘러 싸인 시골 한복판에서 어렵지 않게 출판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울이나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사무실에서 꼼짝을 하지 않으니, 이제 출판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적어도 책을 만드는 공정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만큼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것보다 사람들이 책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가 바뀌는 것이 큰 화두입니다. 그러니까 책은, 이야기든 지식이든 문화든, 이런 것을 담아 내고 전하기 위해서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들어 놓은 매체예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매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축에 들고, 그러면서도 돈은 적게 듭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몸공을 들이면 책 하나를 펴낼 수 있어요.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이야기로, 일하는 것으로, 눈짓과 손짓으로 전해 왔던, 경험과 지혜와 마음의 어떤 부분들을 책에 실어서 전하고 있어요. 책이어서 가능한 일이지요. 시골 어딘가를 다니면서 남기는 기록물의 양으로만 보자면 인터넷과 전라도닷컴을 비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날마다 화면을 스크롤을 하는 것보다, 한 달에 한 번 전라도닷컴을 보는 것이 시골의 삶에 훨씬 깊고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어요. 책으로 묶인 것이고, 그것을 펴내는 사람들이 책으로 묶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달마다 몸공을 들이기 때문이지요.
책은,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을 나누고 보관하고 퍼뜨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아주 훌륭한 방법과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어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과,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일은 아주 다른 일이지요. 무언가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이든,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이든, 어떤 원리를 깊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든, 일자리를 잃고 방황을 하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든 도서관은 열려 있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넵니다. 거기에 찾아 가는 사람한테 손을 내밀어요. 그게 책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편집자로 있을 때 농사나 자연에 관한 주제로 책을 펴냈습니다. 그런 경험들 때문에 시골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만, 시골에 살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같은 주제의 책을 펴낸다면 예전과는 아주 다른 책을 만들게 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수도권에서, 도시에서 살면서 펴내는 책과 지역에서, 시골에서 살면서 펴내는 책은 달라지게 마련이에요. 삶의 방식이 달라졌으니까요, 머릿속에서 책을 그리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지요. 사실은 출판사들만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거기에 몰려 있으니까요. 적어도 어디에 사는 독자이든 고개를 끄덕이게끔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면 안 되지요.
상추쌈 출판사는 책을 몇 권 내지 못했어요. 처음 시골에 내려올 때, "십 년은 지나야 살림살이가 꼴을 갖추게 될 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제야 십 년이고, 그 말이 맞다고 느끼고 있어요. 다행히 십 년 사이에 어느 만큼은 시골에서 사는 것에 눈이 뜨이고, 소리도 들을 줄 알게 되고, 그런 것이 있어요. 올해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곧 두 권의 책이 나올 겁니다. 시골에 있는 출판사라 이런 구석이 조금 다르구나 하는 것을 독자들이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책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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