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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 칼럼·시평 [문화칼럼]
채움과 비움 사이
전성환(2018-03-15 10:03:51)

"디자이너의 삶은 싸움의 삶입니다. 조악한 것과의 싸움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병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1931~2014)의 말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뉴욕의 지하철 노선을 깔끔하게 '구조화'한 최초의 디자이너다. 지하철 노선도를 디자인 개념으로 접근한 이는 그가 처음이다. 
디자이너를 싸움꾼에 비유하고, 의사가 병마와 싸우듯 주변의 조악함과 싸운다는 그의 말 속에는 일종의 숙연함조차 담겨 있다. 타이포그래피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타이포는 블랙이 아닌 화이트"라고 했다. 블랙으로 표현된 글자에만 집중하는 우리와 달리, 그는 '블랙 사이의 공간들'에 집중했다. 사실은 그 빈 공간이 타이포그래피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음악과 비슷하죠. 음악은 기록이 아닙니다. 음표들 사이의 공간입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실물만 보이지만 고수들의 눈에는 실물들 사이의 공간이 보인다. 도시의 디자인도 그렇게 접근되어야 한다. 각각의 건물과 조형물만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과 조화로움, 전체가 만들어내는 아우라. 이것이 도시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마시모 비넬리의 디자인 철학은 당시 혁명적으로 비춰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 명제가 되었다.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시각적 공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나는 전주라는 도시를 생각할 때마다 그 무한한 가능성에 가슴이 뛰지만, 동시에 답답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그걸로 밥벌이를 한 적도 없지만, 나쁜 디자인이 '병'이라는 데에 충분히 공감한다.
전주의 도심을 걷다보면 제멋대로의 안내판들, 건물을 가득 덮은 조악한 간판과 온갖 현수막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면도로로 들어서면 인도까지 점령해버린 불법주차 차량들 때문에 길을 걷는 일이 여유로운 산책이 아닌 위험한 곡예가 되곤 한다.
전주한옥마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느림과 비움, 절제의 가치가 가장 돋보여야 할 전통의 '한옥마을'이 천 만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번잡함과 무질서로 뒤덮여 가는 듯하다.
그에 비하면 전주역 앞 첫마중길은 어떤가. 홍익대학교 유현준 교수의 디자인 콘셉트는 전주의 현실보다 두어 발 앞서나갔다. 지극히 모던하고 절제된, 비움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고 산책할 수 있는 '일상의 거리'로서는 뭔가 부족함 있다. 한 줌 흙도 허락하지 않은 화강석 보도 포장은 더욱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쨌거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시도 없이 도시의 디자인은 발전하지 않는다. 다수의 현실적 필요에 맞추기 급급한 단기적 도시설계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다음 세대까지를 생각하고 도시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전주가 '사람의 도시'를 궁극으로 지향하면서, 채움과 비움 사이의 어디쯤에서 디자인적 균형을 잡을지 깊은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
야마자키 료의 <커뮤니티 디자인>을 읽으면서 정작 부러웠던 지점은 디자인의 힘보다는 커뮤니티의 힘이었다. 커뮤니티 디자인 활동가들의 끈기, 성심으로 지원해주는 행정기관,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디자인은 어느 한 순간에 발전할 수 없다. 끊임없는 노력과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감내해야 하고 향유하는 시민들의 수준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도시의 디자인은 곧 그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시선의 높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주가 글로벌 관광도시로 도약하려면 전주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연 도시의 진정한 랜드마크란 무엇일까. 기념비적인 건축물 한두 개로 도시에 관광객이 몰려오고 시민들의 자부심이 높아지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도시의 기억이 살아있는 작은 골목들과 상부상조하는 마을공동체, 마실 나가듯 들릴 수 있는 공원과 도서관들, 그 안에서 누리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야 한다. "도시의 가치와 진정성은 거리의 모퉁이에, 창살에, 난간에, 피뢰침에, 깃대에 쓰여 있다."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말처럼.
이제는 물적자본보다 지적자본이 더 우위에 서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적자본론>의 저자 마스다 무네아키는 도시의 지적자본이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정서자본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다. 우리나라 도시 가운데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만한 지적·정서적 자본을 가진 도시가 얼마나 될까? 나는 전주야말로 그러한 가능성이 풍부한 도시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 중심의 동선과 적정 규모의 인구, 전통문화와 생태환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휴먼스케일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휴먼스케일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라 일상의 행복에 다가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8 트렌드 분석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의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인간은 인간만의 따뜻함을 더욱 갈망하게 될 거라고 진단한다. 나는 전주라는 도시가 가진 따뜻함과 디자인적 가능성을 믿는다. 모두가 문제의식 없이 한 방향으로 갈 때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전주의 힘과 진정성을 믿는다. 전주가 가진 지적·정서적 자본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도시는 그 자체로 미디어"다 라는 말이 있다. 도시는 우리에게 숱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주라서, 전주니까, 전주만이 가능한 메시지와 디자인을 만들어갈 때 '사람의 도시, 품격의 전주'가 누군가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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