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6 | [저널초점]
우리 삶, 우리문화/입거리
초목껍질에서 우아한 한복까지
우리옷의 변천 흐름
임상임 원광대학교교수 의상학과(2003-09-23 15:35:06)
1.
복식은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에 의한 생활양식의 표현임으로 우리는 복식의 문화사를 통하여 그 속에 흐르는 조상들의 예의와 의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복식은 이미 선사시대에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구석 시대의 유적에서 복식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는 초목의 껍질과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몸을 보호했으리라 생각된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는 복식자료가 발견되고 있어 방직이 이루어졌음을 짐작살 수 있으며,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복식도 발전하여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를 중심으로 하여 모자, 띠, 신발을 착용하고 여기에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의 장식물을 더한 복식구조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상대조선복식의 구조는 풍토, 민족성, 생활양식에 적응하여 발생되었다. 따라서 우리 복식의 특색은 아한대성 기후조건과 북방유목민 계통의 문화요소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좁은 소매의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 형태의 앞쪽을 튼 카프탄형식의 북방 호복(胡服)계통의 옷이다.
2
복식은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형태가 여러 가지로 변천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공유민족복식은 어떻게 얼마나 변천되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상대(上代)한국복식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북방 알타이계의 좁은 소매의 저고리와 통이 좁은 바지, 목이 긴 신발이다.
여기에 머리에는 삼각형 형태의 관모를 썼고, 저고리는 길이가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고 앞이 터진 것을 직선으로 교차시켜 왼쪽으로 여미고 띠를 매었다. 저고리의 여밈은 6세기쯤에는 오른쪽으로 고정되어 오른쪽 여밈은 오늘날 한복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 깃, 여밈, 소매부리, 조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둘렀다. 이것은 무지의 천에 색선을 가함으로서 의복을 화려하게 구미는 장식적인 기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을 두르는 부분은 마찰이 많아 쉽게 손상되며 오염이 잘 되는 곳이므로 여기에 다른 천을 대어 이를 방지하였을 것이고 필요시에는 이 부분만을 새로운 천으로 봉제해 사용하여 의복의 수명을 높여 실용적인 기능도 겸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선의 사용은 우리 조상들의 미의식과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저고리 밑에는 두루마기를 덧입었다. 여자의 경우는 바지 위에 치마를 의례 또는 방한용으로 입었고, 무릎 아래로 내려갈 만큼 긴 두루마기를 입기도 하였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끝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었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기계주름의 발목까지 오는 긴 스커트와 유사하다. 신발은 주로 부츠처럼 목이 긴 신발을 목이 짧은 이(履)도 신었다.
위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우리 고유복식의 형성기로서 복식은 일반의 일상복 이면서 군복과 같이 무풍적 요소가 있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식이 대체로 흡사하였다.
3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친당 정책을 쓰면서 복식에 있어서도 당나라 의복이 수입되어 통일신라시대는 우리고유복식이 외국문물에 적극적으로 접하게 되는 복식의 변혁기이다.
고유복식의 기본구조 위에 머리에 쓰는 복두, 오늘날의 배자(褙子)와 같은 반비, 배당, 여인들이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길게 드리운 일종의 목도리인 표 등 당나라의 새로운 복식이 수입되어 착용됨으로써 우리 복식구조의 일부가 되어 소화, 흡수과정을 거쳐 국속화 되었다. 그러나 중국 복식이 우리 복식사상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복식도 주로 귀족계급에 한한 것으로 일반서민과는 관련이 적었다. 신라말기에 이르러서도 서민들은 우리의 고유 복제를 습용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변국의 정치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복식제도에 있어서도 그 영향을 받아 전기에는 송나라의 복식, 후기에는 몽고복식, 말기에는 명나라의 복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반의 복장인 고유복식은 경동 속에서도 서민층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의 우리 고유복식은 풍속에 있어 몽고풍의 유사성 때문인지 비교적 쉽게 몽고의 영향을 받아들여 약간의 우리 옷의 변화를 가져왔다.
저고리의 길이가 차츰 짧아지고, 이에 따라 상대부터 필수품이던 띠가 없어지고 고름을 달게 되었다. 소매는 좁고 주로 노랑색의 저고리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의례용 복장에서 장도 차는 습속, 족두리, 도투락댕기 등 몽고 여인들의 풍속이 들어왔다. 족두리나 도투락댕기는 국속화 되어 오늘날에도 신부의 예장에 사용한다.
4
조선시대의 복식 문화는 사회 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삼국 시대 이래의 복식 문화를 꽃피워 아름다운 우리 고유복식인 한복 양식이 확립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저고리의 변천을 보면, 저고리의 길이가 길던 것이 연대가 내려올수록 짧아졌고, 소매는 좁고 배래선이 직선으로 되어 있는 넓은 끝동이 있던 것이 약간 소매의 부리 쪽을 향해 좁아지면서 곡선으로 변했다. 깃은 직령의 목판깃이던 것이 좁아지면서 둥글어졌다. 곁마기는 겨드랑이 아래에만 있던 것이 차차 소매 쪽으로 나가고 때 대신 고름이 사용되어 가늘고 짧던 것이 넓이가 넓어지고 길어졌다. 깃에는 동정이 달렸다.
여자저고리에서의 깃, 도련, 소맷부리의 선이 고려 말에서 조선조로 오면서 삼회장저고리로 변화되었다. 특히 조선조의 짧은 저고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반화되었고 말엽에는 젖가슴을 가릴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서 '졸잇말'이라고 하는 가슴의 성장을 억제시키기 위한 것이나 겨드랑이 살을 가릴 수 있는 가리개용 허리띠가 등장하였다.
치마는 저고리에 비하여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다만 길이와 넓이가 쓰임새에 따라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치마라는 용어는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쵸마'라고 처음으로 나타나고, 조선 초기 세종조의 '저고리'란 용어와 처음 사용되었다.
치마의 길이는 초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 짧았으며 후기로 올수록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치마의 길이는 길어졌다. 예복용 치마로는 스란치마가 있어 평상복보다 넓고 길며 화려하였다.
기본복장인 바지는 조선시대에 와서는 주로 상류층에서는 두루마기류 밑에 바지를 받쳐 입었으나 노동하는 서민들이나 천민들은 바지, 저고리 바람에 맨상투였다.
바지의 형태는 오늘날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삼국시대부터 폭이 좁고 짧은 바지, 폭이 넓으면서도 긴 바지 등이 있어 왔다.
여자의 바지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속옷으로 되면서 겹겹이 켜 입다가 1930년대 이후 겉옷의 간소화로 인해 속바지만 통용하게 되었다.
두루마기는 상대 사회부터 보편적인 의복으로 형태는 저고리와 마찬가지인데, 다만 길이가 길어 방한적인 목적과 의례용으로 착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포제류로 첩리, 직령, 도포, 창의 주의(周衣)등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일반적으로 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국말에 와서 이러한 포제류는 주의만 입게 함으로써 사라지고 두루마리 일색이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는 기원전으로부터 바지와 저고리의 고유민족복식을 착용하였다. 여기에 중국으로부터 치마를 받아들여 바지 위에 입게 되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당제(唐制)복식의 영향으로, 중국양식이 많이 도입되었다. 고려초기에는 송의 복식, 고려말기에는 원의 복식, 조선전기에는 명의 복식이 왕실과 극소수의 지배계급사이에서 입혀졌는데 남자는 관복(官服) 여자는 예복에만 국한되어 착용하였고 보통 때는 우리의 전통 옷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외래 복식과 고유복식의 이중구조의 복식문화는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이중구조의 현상 속에서도 서민층에 의해 우리의 고유한 전통 복식은 그대로 전수되어 왔었다.
5
우리의 복식문화는 조선 말엽의 근대화한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일대 전환기를 가져오게 되니, 양복의 착용과 한복의 개량으로 인한 통치마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일반서민들은 여전히 우리의 고유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날 자주 착용되고 있는 마고자나 조끼는 이때에 등장되어 일반화되었다.
극도로 짧아졌던 저고리의 길이도 1900년대를 고비로 차차 길어지기 시작했다가 약간의 변화들은 있지만 1935년 경에는 오늘날과 비슷한 길이로 정착되었고 배래선도 뚜렷한 곡선을 이루게 되었다. 고름도 넓고 길어졌으며 이후 고름 대신 단추나 브로치를 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