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단기 4291년(서기 1958년)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9일) 백중날, 완주군 봉동읍 전의이씨 집성촌 낙평리 주민들이 제1회 경로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봉동 마그내 다리 근처 자갈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남성 30명, 여성 48명 가운데 유일하게 홍원 씨를 제외하고 모두가 하얀 조선옷을 입고 있다. 모두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품위 있다. 홍원 씨는 1924년 묻지 마라 갑자생으로 일제 강점기 아오지 탄광에서 징용살이를 했다. 그는 머리가 좋아서 탄광에서도 관리자 생활을 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도 야학을 운영하고 원예농업 1세대로 활동하는 등 마을 중심 일꾼 중 하나였다. 홍원 씨가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양복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을까? 여하튼 이 사진은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이라는 말을, 작은 역사의 관점에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어쩌면 거의 마지막 사진일 듯하다.
이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는 점동 씨다. 점동 씨는 1919년 기묘생으로 2018년 올해 우리 나이로 딱 100세다. 귀가 좀 어둡기는 해도 눈이 맑고 안력이 좋아서 점동 씨는 사진 속 얼굴들을 알아보며 반갑게 호명하였다. "순원이가 구쟁이고 겸주, 홍원이, 나, 겸섹이, 백봉왹이가 반쟁여." 설명을 듣고 보니 구장 순원이 맨 앞줄 한가운데, 그 옆으로 홍원, 점동, 겸석, 겸주 등 반장과 동네 일꾼들이 앉았다. 점동 씨네는 점동 씨와 겸석 씨 뒤에 앉은 어머니, 연보 씨 뒤에 갓을 쓰고 서 있는 사인 씨까지 함께였다. 점동 씨의 부인 정덕이 할머니는 올해 여든다섯으로 스물 두 살에 서른일곱 애 둘 딸린 홀아비와, 나이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가야 오래 살 수 있다고 해서 혼인을 맺었다.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어 전실 자식 둘까지 육남매를 키웠다. 두 분은 올해로 육십육 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백 살 남편을 바라보는 여든다섯 아내의 눈빛은 따뜻하고 평안하기 그지없다.
점동 씨와 부인 덕이 씨는 사진 속 낯익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용냄이 아버지(성학)는 출입이 널뤄. 종중일도 많이 허고', '용냄이는 죽고 용재가 보상리 살어', '옥됭이는 쌍정 살고. 지금인게 쌍젱이지 그때는 전씨네띔이라고 힜어', '평식이는 방애실 옆으 살고', '성갑 씨는 학렬이 젤 높아, 용원이는 학렬이 야찹고', '영셉이네도 나왔네', '이이는 찬순노메 아녀?', '복됭이는 술 먹으먼 고약여, 펭소에는 존디', '영춘이는 육성이 좋아서 똘역사 헐 때는 영춘이가 돌아댕김서 똘역사 헌다고 그맀어.' 두 분은 사진 속 이름들을 호명하며 기억의 날줄을 따라 그들이 남긴 삶의 족적과 사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똘역사(役事)'는 매년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고산천에서 봉동 낙평리, 유편리, 성덕리, 신성리 등으로 흐르는 '냇가랑'을 정비하는 일이다. 낙평리는 '원똘, 첫똘, 지샛똘, 낸똘' 등 네 개의 똘이 흐르고 있고 그 똘 물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논밭을 가리켜 '또라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똘'에는 '원또라지', '첫똘'에는 '첫또라지', '지샛똘'에는 '지샛또라지'가 있다. '똘역사' 때는 그 '또라지' 주인들이 모두 나와 각각의 '똘'을 정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가 영춘 씨의 육성이 힘을 쓸 때인 것이다.
낙평리는 1930년대 생강 만여 석 생산에, 매상 십일만 원을 벌어들인 봉상산업조합의 탯자리며, 일찌감치 전근대적인 유통구조를 극복하고 조합원이 공평하게 이익금을 가져갈 수 있는 근대적 분배방식을 실현한 곳이다. 이익금의 일부로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복지를 지원함으로써 사회적 경제조직의 모델을 제시한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1960년대 말에는 전주농림학교 출신 이길용 씨를 주축으로 봉식, 겸칠, 홍원 씨가 합심하여 대나무 하우스 원예 농사를 시작하여, 봉동 하우스 농업을 선도하였다. 낙평 태영 씨(72세)는, 하우스 원예 농사에 필요한 농자재 공동 구매를 비롯하여 농사 준비, 생산, 출하 과정을 함께 해야 해서 아마 낙평리 작목반이 전라북도 최초 작목반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점동 씨 옆에 앉은 홍원 씨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농자재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둘째는 서울 모 대학의 약대 학장이다. 점동 씨의 아들들도 레미콘 회사, 건설 회사를 경영하며 윤기나게 살아가고 있다. 저기 저 사진 속 한 사람 한 사람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고단한 역사를 살아온 세대이고 그들로부터 이어진 자식, 손자들은 2016년 6월 현재 세계교역액 9위의 국가에 살아가고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입성(옷차림)과 생활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다. 60여 년의 세월 동안 기술문명과 교육 그리고 경제, 사회문화의 발달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변화는 이미 가속이 붙었고 그래서 다가올 60년의 변화는 지나온 60년과 비교할 수 없다. 홍원 씨의 큰아들 용남 씨는 경제적 풍요를 이룬 뒤로 나눔을 실천하며 지역사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 동생이 우리나라 최고 대학 출신이고 미국 유학도 하고 잘 나가는 약대 학장이면서도 지역을 돌보지 않는 것을 못내 마뜩지 않게 여긴다. 백 살 노인 점동 씨와 세 시간 넘는 면담이 진행되는 동안 점동 씨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마침 지근 거리에서 건설업을 경영하고 있는 막내 민규 씨가 부모님 안부 겸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온 까닭에 면담이 끝났다. 점동 씨의 집은 레미콘 회사를 경영하는 셋째 아들이 최근에 지은 집이다. 낙평리 본가에 새 집을 지은 까닭은 점동 씨의 손녀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집 지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빨리 집을 지으라'고 종용한 까닭이라고 한다. 1958년 사진 한 장, 그로부터 이어지는 각각의 역사를 보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